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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돼지의 왕’ 3인방…“아역만 나오면 집중 안 된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았죠”

등록 2022-05-19 07:59수정 2022-05-20 09:57

‘아역’ 아닌 ‘프로 배우’ 최현진·이찬유·심현서
티빙드라마 <돼지의 왕> 철이·경민·종석
성인 능가하는 연기력으로 극 이끌어
캐릭터 만들고 감정 끌어내는 주체적 연기
행동 이해 안될 땐 “왜” 생각하며 일체화 노력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lt;돼지의 왕&gt;에서 정종석과 철이, 황경민을 연기한 심현서, 최현진, 이찬유. 스스로 캐릭터를 해석하고, 몰입하고, 감정을 추스르는 방법을 찾으며 ‘주체적 연기’를 선보이며 드라마를 이끌었다. &lt;돼지의 왕&gt;의 발견이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돼지의 왕>에서 정종석과 철이, 황경민을 연기한 심현서, 최현진, 이찬유. 스스로 캐릭터를 해석하고, 몰입하고, 감정을 추스르는 방법을 찾으며 ‘주체적 연기’를 선보이며 드라마를 이끌었다. <돼지의 왕>의 발견이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모든 질문에 시큰둥하게 답하고, 때론 “뭐래”라며 흘겨보면 어쩌지? 힘든 촬영으로 드라마와 관련해 안 좋은 기억만 갖고 있다면? 중2, 중3, 고1. 10대 청소년 셋과의 만남에 앞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그들이 내뿜은 에너지가 아역 배우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강렬했기 때문이다. 연기에 본모습이 상당 부분 반영됐을 거라고, 사춘기 청소년의 반항적 심리가 표출된 결과일 거라고, 생각했던 이유다. 하지만 그런 ‘짐작’은 다 틀렸다! 지난 6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세 친구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했다. “우린 반항하지 않아요. 헤헤헤.” 청소년 배우 최현진, 이찬유, 심현서다. 낯선 이름이라고? 티빙 드라마 <돼지의 왕>에서 철이와 어린 시절 황경민, 정종석을 연기한 인물들이다.

죽기 전날 밤. 친구들이 자신을 웃는 얼굴로 기억하길 바라며 웃고 있는 철이(가운데). 이들이 모두 웃는 행복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위 사진). 티빙 제공
죽기 전날 밤. 친구들이 자신을 웃는 얼굴로 기억하길 바라며 웃고 있는 철이(가운데). 이들이 모두 웃는 행복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위 사진). 티빙 제공

아역은 주입식 연기? 주체적 연기!

“실제 제 모습과는 달라요.”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해맑은 미소와 발랄한 목소리. 보는 이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기운을 가진 이들에게서 드라마 속 어두운 철이와 황경민, 정종석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아역 배우들이 성인 배우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춘 지는 꽤 됐지만, <돼지의 왕>에서는 이런 점이 특히 도드라진다. 분량은 물론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해 김동욱(성인 황경민), 김성규(성인 정종석)와 함께 극을 이끈다. 아역의 존재감이 이처럼 성인을 능가한 작품이 있었던가. 철이로 나온 최현진은 이야기 끝부분 김성규와 골목에서 대치하는 장면에서도 기에 밀리지 않았다.

똑부러지게 준비한 결과다. <돼지의 왕>에서 최현진, 이찬유, 심현서가 흘린 땀과 눈물을 엿보면 배우를 아역과 성인으로 구분 짓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최현진(철이)의 말이다. “드라마가 공개됐을 때 아역만 나오면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걱정했어요. 아역을 맡은 배우들끼리 자주 만나서 대본 리딩을 많이 했어요.” 철이는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황경민과 정종석을 도와주면서 영웅 같은 존재가 된다. 심현서(정종석)는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에 피해만 주지 말자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드라마가 처음이라 저도 저를 못 믿겠더라고요. 내 생각대로 하면 틀릴 것 같아서 감독님한테 많이 물어봤어요.” 정종석은 황경민을 도우려다가 학교폭력 피해자가 된다. 성인이 되어 가해자한테 복수하는 황경민의 어린 시절을 연기해야 하는 이찬유는 고민이 더 많았다. “처음에 아역 대본만 받아서 성인이 된 이후 상황을 모르겠는 거예요. 상상하며 서로 다른 감정을 끌어내려고 노력했어요.”

아역에게 캐릭터 분석이란 부모나 감독이 밑그림을 그려주면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아니었나? 이들이 완벽한 철이, 정종석, 황경민으로 주체적으로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극 중 인물을 스스로 이해하려는 노력 덕분이다. 최현진이 말했다. “철이한테 다가가려고 스스로 질문을 많이 했어요. 지하철을 타면 철이라면 어떻게 앉아 있을까 생각했고, 어떤 상황이 생길 때마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물었어요. 버스에서 풍경을 보거나 사람 관찰하면서 철이는 이럴까 저럴까 생각도 했어요.” 이번에는 심현서의 대답이다. “종석은 어떻게 걸을까 먹을까,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게 재미있었어요. 철이와 있을 때, 경민과 있을 때 종석을 다르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경민과 있을 때는 형다움을, 철이와 있을 때는 그를 동경하는 마음을 좀 더 드러내고 싶었어요.” 이찬유도 빠지지 않는다. “경민은 학교폭력에 내몰린 아이예요. 우선 외적으로 그 상황이 완벽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늘 움츠려 있고, 어정쩡하게 걷고 말도 어눌하게 했어요. 오랜 시간 이렇게 행동하다 보니 가끔 길을 걸을 때 나도 모르게 경민의 행동이 나오더라고요.”

모두 비슷한 신발을 신고 왔다. 약속했느냐고 물으니 현진(철이)이 답했다. “통하는 거죠.” 백소아 기자
모두 비슷한 신발을 신고 왔다. 약속했느냐고 물으니 현진(철이)이 답했다. “통하는 거죠.” 백소아 기자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프로들

정종석은 철이를 옥상에서 밀고, 철이는 자살을 하려고 하고, 황경민은 학교폭력 피해 장면이 많다. 철이는 혼자서 무리를 상대로 싸움도 한다. 캐릭터들의 행동이 납득 안 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왜?”를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종석이 철이를 옥상에서 미는 장면은 상상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붙였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종석한테 말해줬어요.”(심현서) 셋 모두 “고양이한테 나쁜 짓을 하는 척 연기하는 장면은 좀 많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돼지의 왕>은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지거나 비극에 내몰리는 주인공의 사연을 전달하는 보통의 아역 역할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역을 통해 학교폭력의 잔인함을 강조해야 한다. 황경민을 향한 시청자의 연민과 그의 복수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학교폭력을 다룬 다른 작품에 견줘 훨씬 사실적이고 불편한 이유다. 어떤 장면은 드라마인 걸 알면서도 영상을 빨리 재생 해버릴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이를 연기해야 했던 현실의 10대, 미성년자인 이 배우들은 괜찮았을까? “촬영 전에도 심리상담 선생님하고 이야기하고, 리허설할 때도 이야기를 했어요.”(심현서) 촬영장에도 늘 심리상담 선생님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감정이 깨질까 봐 꼭 필요할 때를 빼곤 심리상담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감정이 깨지면 안 돼서 모든 촬영이 끝나고 (심리상담을) 받았어요. 마음이 힘든 날에는 엄마가 두 팔 벌려 꼭 안아주면 진정됐어요.”(최현진) “경민을 연기하려면 감정을 계속 갖고 가야 했어요. 다행히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어요.”(이찬유)

세 배우 모두 마음을 보듬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다. 심현서는 “노래를 듣거나 <몽실 언니> 같은 평화로운 책을 읽으면 힘든 감정이 차분해진다”고 했고, 이찬유는 “집에 있는 물고기와 교감한다”고 했다. “물고기 눈을 보면서 ‘아 힘들다. 너는 괜찮아’ 얘기하면 걔가 말해요. ‘야 잘했어’‘그래도 끝까지 잘해내야지’라고. 그러면 기분이 좋아져요. 경민 역에 빠져 점점 어두워지려고 할 때마다 자전거도 타고 책도 읽으면서 명랑한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데뷔작: 현진-&lt;자산어보&gt;, 찬유-&lt;사자&gt;, 현서-뮤지컬 &lt;빌리…&gt;
데뷔작: 현진-<자산어보>, 찬유-<사자>, 현서-뮤지컬 <빌리…>

“학폭은 지옥…선생님·방관자도 잘못”

7개월가량 촬영하고 드라마가 공개된 이후 그들은 한 학년씩 올라갔다. 이날 심현서는 “두달 만에 만났더니 현진의 키가 부쩍 커졌다”며 놀랐다. <돼지의 왕>을 촬영하면서 그들의 마음도 자랐다. 힘든 현실을 담은 내용만큼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도 알게 됐다. 이찬유는 “<돼지의 왕> 촬영 전에는 학교폭력은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현실에서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강아지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경민을 연기하면서 피해자 입장이 되어보니 진짜 지옥 같은 것이더라고요. 절대 일어나선 안 돼요!” 최현진은 이번 드라마 관련 기사의 댓글을 읽으며 현실을 간접 체험했다. “드라마 보신 분들이 예전에 당했던 일들을 댓글에 쓰셨더라고요. 몇년이 지났는데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고. 이 드라마가 19금이어서 청소년들은 볼 수 없는데, 한편으로 더 많은 이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맞아. 보기만 해도 예방될 것 같아. 가해자는 기억 못 한다는 것도 정말 현실을 보여주잖아. 다 봐야 해요.”(심현서) 이찬유는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이번 드라마에서도 선생님이 가장 나빴다”고 했다. 최현진은 “성인이 된 친구들을 보며 ‘저 친구 중에서 한명이라도 나서서 말렸더라면 지옥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사가 있다. 학교폭력을 방관하는 친구들도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돼지의 왕>이 인기를 끌면서 학교에서 스타가 됐다. 복도를 지나가면 “쟤야 쟤”라고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19금이지만 학교폭력을 다루다 보니 유튜브로 많은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봤다. “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다 저를 알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이찬유) “친구들이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었네’ 그래요.”(최현진) 하지만 무례하게 구는 친구들도 있다. 자신들을 특별하게 대하는 시선도 불편하단다. “학교에서는 그냥 학생으로 대해주시면 좋겠는데.”(심현서) “수업시간에 발표나, 인물을 표현해야 할 때 배우니까 해보라며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최현진의 말에 심현서와 이찬유가 “맞아” “맞아” 추임새를 쉴 새 없이 내뱉었다.

발레, K팝, 영화가 열어준 길…‘배우의 왕’으로

이 똘똘한 배우들은 어떻게 연기를 하게 됐을까? 심현서는 6살 때부터 발레를 했고 10살 때인 2017년 오디션에 합격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 빌리로 출연했다. 이후 단편영화 등을 거쳐 <돼지의 왕>으로 드라마에 데뷔했다. 드라마 데뷔작에서 홈런을 친 셈이다. 최현진은 4살 많은 누나가 그가 트와이스 춤을 추고 노래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이를 본 연기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2021년 영화 <자산어보>가 시작이다. “오디션장에서 만난 이준익 감독님이 배우는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있어요.” 이찬유는 계기가 귀엽다. “전쟁 영화에서 전쟁고아들을 보면서 엄마한테 쟤네 진짜 전쟁 중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연기학원에 데리고 가셨어요. 헤헤.” 1년 만에 휴대폰 광고를 촬영하고 상업영화 중에서 비중이 컸던 <사자>를 시작으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묻는 질문에도 앞다퉈 답을 쏟아낸다. “전 하정우 배우요. 저의 존재를 모르시겠지만 함께 촬영하고 싶어요.”(이찬유) “전 이병헌 배우와 최정원 배우도 좋아요. 전 눈빛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좋아요.”(심현서) “전 이제훈 배우요. <돼지의 왕> 준비하면서 영화 <파수꾼>을 봤어요. 그 작품을 보면서 매력을 느꼈어요.”(최현진)

이찬유는 “연기는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자>를 촬영할 때 엔지(NG)를 많이 내면서 카메라 울렁증이 생겼다. 이후 연기는 즐기는 걸 넘어 매 순간 진지하게 최선 다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드라마 <초콜릿> 때부터 진짜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마음가짐부터 달리 했다고 한다. 이런 자세는 심현서와 최현진도 다르지 않다. 아역을 한때의 경험 혹은 성인 연기자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자체를 ‘프로 배우’로 대하는 마음을 갖는 것. 이들이 <돼지의 왕>을 성공시킨 비결이자, 이 배우들이 아역에 머물지 않고 배우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이유다. <돼지의 왕> 이후 이들에게 기획사에서 계약하자는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결정했을까? 돌아온 답도 ‘프로’답다. “신중하게 선택해야죠. 미래가 달려 있으니.”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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