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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 베어물면 과즙 터질듯…디지털 시대 ‘극사실주의자’의 붓질

등록 2022-06-14 08:00수정 2022-06-14 08:22

대구 작가들, 서울서 과일 정물화 전시
정창기 신작전·윤병락 회고전 ‘눈맛’
정창기 작가가 시에스와이(CSY)갤러리 신작전에 내놓은 자두 연작 중 일부. 아침햇살을 받아 분홍빛으로 빛나는 자두의 상큼한 자태를 부각시켜 그렸다.
정창기 작가가 시에스와이(CSY)갤러리 신작전에 내놓은 자두 연작 중 일부. 아침햇살을 받아 분홍빛으로 빛나는 자두의 상큼한 자태를 부각시켜 그렸다.

그림 속에서 자두와 사과, 딸기, 포도가 발갛게 익어간다. 과연, 과일 그림이 있어 대구의 미술판과 화단은 든든해 보인다.

초여름을 맞은 6월 서울 화랑가 한켠에 대구 화단 작가들이 가져온 생생한 과일 정물화가 신선한 눈맛을 안기고 있다. 실제 과일보다 더 실감 나게 색감과 모양새를 살린 과실의 극사실적인 정물화 전시들이 잇따라 차려졌다. 딸기와 자두 그림으로 잘 알려진 정창기 작가의 신작전 ‘바구니에 담긴 여름의 풍요’(7월10일까지, 서울 자하문로 시에스와이갤러리)와 2000년대 초반 사과 정물화를 그려 유명해진 윤병락 작가의 회고전 ‘윤병락: 아카이브’(6월18일까지, 서울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다.

좁은 전시장 삼면에 걸린 정 작가의 신작은 빛을 머금은 자두와 딸기들을 화폭 가득 채운 작품들이다. 아침의 투명한 햇살과 낮의 진득해진 햇살이 분홍빛 자두 표면과 그 위에 포말처럼 흔적을 남긴 허연 분과 어우러진 모습이 수십여점의 작품마다 변주되어 나타난다. 실제 과일보다 더 실감 나는 형상과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독특한 감흥을 준다. 아침 저녁으로 자두와 딸기를 번갈아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형상과 색감을 구상하지만, 작가가 직접 눈으로 관찰하고 느낀 색감에 얽힌 인상과 기억을 함께 붓질에 녹여내어 나온 작업이라고 한다.

서울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에 차린 ‘윤병락: 아카이브’전 전시장. 변형 캔버스 형태로 사과들이 캔버스 밖으로 흩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설치적 회화를 선보이고 있다.
서울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에 차린 ‘윤병락: 아카이브’전 전시장. 변형 캔버스 형태로 사과들이 캔버스 밖으로 흩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설치적 회화를 선보이고 있다.

사과 작가 윤병락씨의 아카이브 회고전은 크게 두가지를 보여준다. 2007년 전시를 시작하면서 시장에 작가의 사과 연작이 등장하게 된 계기를 낳은 보물찾기 연작, 일상적 사물 그림 등 과거의 경로를 보여주면서 지금 그가 구상하고 있는 설치작품 얼개의 변형 캔버스 사과 작업을 내걸었다. 빗자루나 과거 집안 가구 같은 오래된 기물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작업부터 사과가 그려진 화폭을 동그랗게 잘라 벽면 여기저기 내걸면서 마치 사과들이 공간에 확산되는 것 같은 착시감을 낳는다.

사진보다 더 정밀하게 그린 이들의 과일 그림을 소재주의에 빠진 장사용 그림이라고 낮춰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실제 이들의 작품과 작업 과정을 보면 그림 형식에 대해 간단치 않은 고민을 거친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이들이 내놓는 정물 연작들은 하루의 시간대와 사철의 변화에 맞춰 여러 과일과 일상의 기물들을 치밀하게 사생해 기록하고 캔버스 틀을 자르거나 변형시키는 파격적 시도도 감행하는 등의 과정을 거친 것들이다. 배경 없이 온전히 화폭을 채우거나 과일 모양을 그대로 도려내어 화폭을 만드는 이들의 작업은 한마디로 말이 필요 없는 그림이다. 보고 그리는 이의 인간적인 감성도 화폭의 도상에 녹아있다는 점에서 건조한 사진 기계의 시선을 낯설게 드러낸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와도 차이점을 지닌다. 대중과 격의 없이 소통하면서 리얼리스트와 모더니스트의 경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는 두 작가의 작업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전시들이다.

자두와 딸기의 정창기, 사과의 윤병락, 붓의 이정웅 같은 대구 출신 정물화가들의 면면은 ‘남나비’(남계우), ‘변고양이’(변상벽), ‘정괴석’(정학교) 등 조선 말기 활동한 감각파 스타일의 동물화·정물화 화원들과 통하는 대목이 있다.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21세기에도 오직 손을 놀리는 필력으로 재현한 이들의 사물 도상화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인기를 유지하는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 대구 구상화단만이 지닌 역사적 맥락을 간과할 수 없다. 20세기 초 새로운 감각의 정물화와 인물·풍경화를 그리며 조선 화단을 휘저은 천재 화가 이인성의 예혼을 계승한 사생 작업 전통이 뿌리 깊게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김일해, 장이규, 이원희 같은 1세대 전업작가들이 서울 화랑가에 진출하면서 현실감을 돋우는 인물·풍경화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초부터 중앙화단으로 출향한 선대 화가들의 단단한 성취가 지금 대구의 정물화 작가들이 활약할 기반을 앞서 닦아주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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