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큰 사랑을 받은 2022년 작품으로 기억될 거예요.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아요. 전 지금껏 모든 작품에서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지난 두달간 우리는 ‘<우영우> 시대’에서 행복했는데, 정작 ‘우영우’는 달콤한 나날들에 취해 있지 않았다. 24년(배우 데뷔 기준) 연기 내공이 오늘이 영원할 것 같은 기분에 빠지는 것도 차단한 듯했다. “작품이 끝나면 바로 박은빈으로 돌아옵니다. (오랜 배우 생활로) 박은빈과 캐릭터를 분리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역할의 여운에 오래 빠져 있지 않아요.” “7개월간 수고했다”는 말이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큰 찬사였다.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박은빈이 1998년 드라마 <백야 3.98>로 배우로 데뷔한 이후 꾸준히 자신의 페이스대로 연기했던 비결이다. 드라마와 영화 합쳐 70편 가까운 작품에 도전한 그지만, <우영우>(이엔에이·ENA)는 조금 달랐다. “대본을 봐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감독님과 작가님이 저를 믿어주는 만큼 잘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고사했던 우영우가 1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신중하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어요. 정말 좋은 작품이고 꼭 나와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대본과 연출도 좋았지만, 장점 중심으로 접근해 우영우만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캐릭터를 빚은 박은빈의 노력이 통했다. 그는 고정관념이 생길까봐 자폐 장애인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참고하지 않았다. “어떤 캐릭터도 우영우를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스펙트럼이란 말처럼 자폐는 다 다르니까요. 실제 자폐인의 행동을 따라 해 그들을 도구적 장치로 이용하게 되는 일도 금기하려고 노력했어요.” 자문 교수의 도움을 받고, 자폐 스펙트럼 진단 기준을 찾아보는 등 공부에 몰두했다. 누군가 안으려고 할 때 어깨를 움찔하고, 손동작이 어색하고, 악수할 때 손끝만 잡는 동작은 박은빈이 캐치하고 캐릭터에 적용한 것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아이를 둔 한 방송사 예능 피디는 <한겨레>에 “손가락 움직임 등 우영우 캐릭터의 세밀한 묘사가 좋았다”고 말했다. 2년 전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역을 소화할 때도 박은빈은 전공생처럼 레슨을 받는 등 공부하는 배우로 유명했다. 그는 당시 “전공생분들의 그 시간, 그 세월을 따라잡을 수 없으니 그런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영우>의 성공에는 박은빈의 연기력도 큰 몫을 차지했다. 갈수록 내용을 두고 의견은 갈렸지만, 박은빈의 연기평은 한결같았다. 특히 발음이 화제를 모으면서, 기본기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박은빈은 매회 많은 양의 대사를 속사포처럼 내뱉는데, 그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게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우영우는 매회 새로운 사건을 맡고 법정에 선다. 게다가 새 고래까지 등장한다. “대사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는 박은빈마저 “법 이야기와 고래 이야기를 함께 해야 하는 법정장면은 좀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다. “예전에는 대본 보고 속으로 외웠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이해하고 내뱉는 게 중요해서 에이포용지(A4)에 대사를 써놓고 끊어 읽기 표시를 해놓고 외웠어요. 매일 서술형 시험을 준비해놓고 채점해나가는 느낌으로 7개월을 살았습니다.” 대본에 새 고래가 등장하면 “헉”했단다.
박은빈이 빛난 작품 중 일부. 각 방송사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박은빈은 이 작품이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여러 한계를 시험해보는 장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성취감보다는 안도감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드디어 끝났구나 싶었을 때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 불쑥 올라왔어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던 조금의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박은빈은 지금의 자리까지 스스로 올라왔다. 데뷔 이후 다양한 역할에 꾸준히 도전했고, 그 경험들이 쌓여 처음에는 확신할 수 없었던 ‘우영우’를 거뜬히 소화해내게 됐다. 또렷한 발음과 여유 있는 마음도 어렸을 때부터 사극에 출연하며 여러 “선생님들한테” 배운 것이다. 무엇보다 아역에서 어른으로 가는 과도기를 성공적으로 벗어났다.
단아한 이미지로만 그려진 박은빈한테 새로운 모습이 있다는 걸 알려준 드라마 <청춘시대>를 통해서다. 이태곤 피디가 그를 캐스팅했지만, 그 선택은 박은빈이 이끈 면이 있다. 이태곤 감독은 23일 <한겨레>에 “캐스팅을 할 때 배우가 그 배역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를 중요하게 보는데, 박은빈 배우가 잘할 수 있다며 굉장히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떡볶이 먹어’라고 말하며 의자에 앉는 첫 촬영에서 잘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잘해냈다”고 말했다. 그 후 <이판사판> 판사, <스토브리그> 야구 구단 운영팀장, <연모> 남장 여자 등 스펙트럼을 넓히며 작품마다 ‘인생 캐릭터’를 만들었다. 박은빈은 “나는 나의 가능성을 믿는다. 하기로 마음먹으면 제대로 해내야지 하는 마음이 있고, 그런 결심이 잘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간 박은빈은 안정적인 상황을 좋아하지만 배우로서는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게 새로운 경험이 된다고 믿어요. 누군가한텐 실패로 보였을 순간도, 내게는 시행착오이자 교훈의 순간이었어요. 꾸준히 하다보니 <우영우>로 사랑받는 날이 온 것 같아요.” 그는 “도전이 두려운 만큼 지금도 꾸준히 도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제 박은빈은 어디로 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고, 지금은 다음에는 어떤 캐릭터를 보여줘야 할까 고민할 때인 것 같아요.” 시즌2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많은 분의 사랑을 받은 만큼 기대에 부응하려면 제가 처음 <우영우>에 투입될 때 마음보다 더 큰 결심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보물 상자 안에 잘 넣어둔 것을 다시 열면 아름다운 결정체가 훼손될까 봐 걱정도 되고. 먼 미래여서 지금 당장 속 시원한 답변을 드릴 수는 없지만, 배우로선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요.”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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