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서용선 작가의 작업실에서 작가가 스튜디오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외국 전문가들에게 근작 그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 항상 죽음을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김용익(75) 작가는 비장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신 앞에 놓인 작은 유리 관 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 안에는 통나무 줄기 조각이 들어 있었다. ‘너의 영혼이 극락정토로 들어가라고 천도재를 지내주련다’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수의처럼 통나무를 감고 있었다. 지켜보던 푸른 눈의 외국인 기획자와 미술시장 관계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가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씨앗을 심어 키웠던 낙엽송 나무가 죽은 게 아쉬워 이렇게 유리 관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정원에서 잘 자랐는데 공사하는 분들이 베어버린 겁니다. 너무 아쉬워서 향불까지 피워 장사를 지냈는데 그 흔적까지 고스란히 관에 넣었습니다.”
그는 현자나 수행자 같은 말을 거듭했다. 뒤이어 “내 삶의 끝을 모더니즘 문명의 종말과 결부시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최근 작업하고 있는 근작 그림을 들고 보여주었다. 흰 여백과 원색의 색조가 뒤섞인 듯한 표면이 눈을 끌었다. 그는 비축한 물감을 다 소진할 때까지 하는 작업이며, 물감이 떨어지면 작업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31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 있는 김용익 작가의 작업실 현장. 스튜디오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외국 전문가들 앞에서 작가가 폐기물을 재활용한 자신의 오브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31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 있는 김용익 작가의 작업실에서는 색다른 스튜디오 탐방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마련한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한국미술로 뛰어들기’(Dive into Korean Art). 평론가, 기획자, 미술언론인 등 미술 분야 국외 전문가 10여명을 초청해 한국의 중진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하고 대화 기회를 마련하는 자리였다. 세계 굴지의 미술품장터인 프리즈의 서울 마켓 행사와 국내 최대의 미술품 장터 키아프의 개막(2일)을 앞두고 미술계가 들뜬 가운데, 두 장터를 살펴보기 위해 한국을 찾아온 전문가들은 김 작가의 작업실에서 폐기물이나 자신의 과거 작업 흔적들을 활용한 독특한 이미지의 개념미술 작업들을 접하며 큰 호기심과 흥미를 보이며 몰입하는 모습이었다.
참석한 이들은 세계 굴지의 온라인 미술품 거래 플랫폼인 ‘아트시’의 카린 카람 글로벌 세일즈·파트너십 부사장과 팀 슈나이더 <아트넷뉴스> 편집장, 지아지아 페이 ‘퍼스트 디지털 에이전시 포 아트’ 설립자, 세바스티안 치호츠키 폴란드 바르샤바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등이었다. 이들은 김 작가에게 작품이 자신의 인생을 서서히 꺼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것 같다면서 앞으로 어떤 작업들을 구상하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에 작가가 자신의 삶은 음의 세계를 지향하며 더 이상 과시적인 작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자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고 중국에서 온 젊은 소장 큐레이터는 감동을 받았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뒤이어 근처 카페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한 뒤 2004년 결혼해 양평에서 작업 중인 김나영, 그레고리 마스 부부 작가의 작업실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눴다. 삶과 예술의 일치를 꿈꾸는 이들의 작업 공간과 거실은 그 자체로 조밀한 설치작품을 방불케 했다.
31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서용선 작가의 작업실에서 작가가 스튜디오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외국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근작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달려간 마지막 행선지는 서종면에 자리한 서용선 작가의 대형 작업실. 여러 곳으로 분리된 작업실 공간을 미술관 내부를 거닐 듯 여유있게 돌면서 참가자들은 작가가 30여년간 그려온 자화상과 역사화, 세계 각지의 도시 풍경화 등을 감상하고 작가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작은 작업실에서 작가의 단종 애사 역사화와 특유의 자화상을 본 뒤, 큰 작업실에선 전남 신안군 암태도 농민항쟁의 역사화와 수년 전 미국 뉴욕에서 그리기 시작한 현지 풍경화를 지금까지 작업하고 있는 현장을 살펴보았다. 폴란드 큐레이터 치호츠키는 일제강점기 암태도 해변의 물빛과 항쟁 농민들의 움직임이 담긴 최근 그의 역사화가 너무나 아름답다며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촬영하고 질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작가는 “내 작업은 단순한 역사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이 스며들어가며 만들어내는 풍경을 그린다”고 대답했다.
오후 5시 넘어 서종면 작업실을 나선 외국 전문가들은 파안대소하며 “즐겁고 짜릿한 탐방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온라인 예술사이트 아방 아르테 운영자인 흐리스티안 라위턴은 “갤러리나 아트페어에선 접할 수 없는 한국 작가들 특유의 깊은 생각들을 엿볼 수 있었다”면서 “스튜디오가 없는 젊은 한국 작가들도 플랫폼이 개설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했다.
양평/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