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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왕위도 버린 로맨스 ‘단짝 불상’…17년 만에 국보

등록 2022-10-14 07:00수정 2022-10-14 22:14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해인사 쌍둥이불상 드라마틱한 사연
학계와 승단은 조선 불상으로 여겼지만
불상 내부 시료 미국까지 옮겨 연대 측정
명문 연대와 일치…17년 만에 국보 확정
형상과 크기, 제작 연대가 거의 같은 것으로 판명된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상. 현재 비상시 두 불상을 통째로 자동하강시키는 엘리베이터를 갖춘 대비로전에 함께 봉안되어 있다. 해인사 제공
형상과 크기, 제작 연대가 거의 같은 것으로 판명된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상. 현재 비상시 두 불상을 통째로 자동하강시키는 엘리베이터를 갖춘 대비로전에 함께 봉안되어 있다. 해인사 제공

1100여년 전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살아 숨 쉰다.

9세기 통일신라 진성여왕(재위 887~897)과 연인 사이가 되었던 귀족 위홍(?~888). 조정 중신이던 위홍은 처자가 있는 몸이었으나, 여왕은 그와 부부처럼 사랑을 불태웠다. 먼저 위홍이 세상을 떠나자 여왕은 가야산 해인사에 추모 원당을 지었다. 나중엔 아예 왕위를 내려놓고 절 부근에 칩거하며 기리다가 결국 거기서 삶을 마쳤다.

이들의 로맨스를 담아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 경남 합천 해인사 대비로전의 쌍둥이불상이 13일 국보 자리에 올랐다. 이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회의에서 위원들은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해인사 대적광전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두 불상의 몸체 안에서 나온 복장유물들에 대한 국보 지정을 확정했다.

무려 17년에 걸친 국보 지정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두 불상은 원래 대장경을 보관하는 해인사 장경판전 건물의 일부인 법보전과 대적광전에 따로 봉안돼 있었다. 불상의 지위 또한 다른 후대 불상에 눌려 높지 않았고, 학계나 승단에서는 조선시대 불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2005년 7월 절 쪽에서 한 발표가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법보전 불상 몸체 내부 복장을 조사한 결과 안에 붙은 나무판에 신라 헌강왕 치세기인 중화 3년, 즉 883년에 조성했다는 먹글씨 명문이 나왔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불상임이 밝혀진 것이다. 또 대적광전 불상과 빼닮은 쌍둥이불이 확실하다고 발표하면서 두 불상은 단짝 사이라는 설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불상이 진성여왕과 위홍의 로맨스를 담은 것이란 풍문이 퍼졌고, 절 쪽은 국내 최고의 목조불이자 쌍둥이불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2007년 대비로전에 봉안해 같은 거처에 모시게 된다.

과거 해인사 법보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 비로자나불좌상.
과거 해인사 법보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 비로자나불좌상.

과거 해인사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 비로자나불좌상.
과거 해인사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 비로자나불좌상.

하지만 학계 반응은 2005년 명문 발견 당시부터 싸늘했다. 절 쪽이나 문화재계 호사가들은 모양과 얼굴이 닮았고 9세기 제작 근거까지 나온 만큼 9세기 해인사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애인 위홍을 추모했던 진성여왕의 사적을 토대로 이 쌍둥이불이 진성여왕과 위홍을 형상화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지만, 학계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나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 등 미술사학계 원로학자들은 법보전 불상 내부의 연대 명문은 1천여년 전 것으로 보기엔 재질이 너무 생생하고, 신라시대 복장유물도 없다는 점에서 섣불리 연대를 올려 볼 수 없다고 했다. 명문, 복장물은 후대에도 넣을 수 있고, 불상 양식도 고려·조선시대까지 내려 볼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이 아니라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절 쪽의 숙원인 국보 지정이 되지 않고 2012년 보물 지정에 머문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2005년 당시 승려들이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상의 몸체 내부(복장)를 열고 조사하는 광경. 해인사 제공
2005년 당시 승려들이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상의 몸체 내부(복장)를 열고 조사하는 광경. 해인사 제공

지난한 국보 지정의 산고가 다시 시작된 건 지난해 1월 해인사 쪽이 경남도를 통해 지정 신청을 하면서부터다. 정은우 동아대 교수와 임영애 동국대 교수 등 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의 불교문화재 전문가들과 문화재청 관계자들은 무언가 진전된 내용이 있어야 지정이 가능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법보전 불상 몸체를 다시 열고 내부 복장과 명문의 나무 시료 일부를 떼어 방사성 연대 측정을 하기로 하고 올해 초 해인사 쪽에 불상 몸체를 다시 열어 조사할 것을 제안했다. 원래 불가에서 부처의 성스러운 내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복장을 넣고 봉인한 몸체를 다시 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해인사 쪽은 난색을 표했지만, 이내 국보로 지정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재개봉을 승인했다.

이런 곡절 끝에 지난 3월9일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들이 절을 찾아와 법보전과 대적광전 불상 내부 몸체를 열고 목재 시료 수십군데를 채취하는 조사를 벌였다. 채취한 시료를 미국 베타연구소로 옮겨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을 벌인 결과, 명문의 연대대로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몸체의 목재 연대는 772~978년(95.4% 유의확률),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몸체의 목재 연대는 706~944년(95.4% 유의확률)으로 확인됐다. 이에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들이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리면서 9월 초 문화재청이 국보 지정 예고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법보전 불상 몸체 안에 붙어있는 별개의 목판에 쓰여진 명문. 신라 헌강왕 치세기인 883년 만들었다는 내용이 먹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해인사 제공
법보전 불상 몸체 안에 붙어있는 별개의 목판에 쓰여진 명문. 신라 헌강왕 치세기인 883년 만들었다는 내용이 먹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해인사 제공

아직도 학계에선 두 불상의 연대를 두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제작됐을 것이란 이론이 없지 않지만, 상당한 과학적 근거를 확보한 만큼 국보 지정 과정에서 정식 이의는 제기되지 않았다. 해인사는 고려시대 최고 문화적 업적이라 할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명찰로 유명하지만, 쌍둥이불의 연대 검증과 국보 지정을 통해 또 다른 역사의 드라마를 쓰게 되었다. 형상과 크기, 제작 연대가 거의 같은 것으로 판명된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은 유사시 통째로 자동 하강시키는 엘리베이터를 갖춘 대비로전에 다시 봉안됐다. 이제 남은 유력한 과제는 쌍둥이불이 과연 진성여왕과 위홍의 로맨스를 담은 역사적 산물인지를 사적과 기록 등을 고찰하며 실증하는 것일 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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