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감독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담한 라디오 스튜디오에 단독 게스트로 그를 초대해, 한 시간 넘게 대담을 진행한 것이다. 나이 어린 독자들 중에 배창호라는 이름이 낯선 분들이 있다면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사실 그는 나보다 더 윗세대가 열광했던 감독이어서 어른이 된 다음에 그의 영화를 뒤늦게 접했다. 다만 지금 청소년들이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을 보는 시선으로 그를 선망했던 기억이 있다.
필자를 비롯한 1975년생들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이듬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노태우가 물러난 이듬해에 고등학교를 마친 세대다. 성인이 되기 전 학창 시절이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이 시기는 배창호 감독의 전성기와도 맞물린다. 그는 1982년에 <꼬방동네 사람들>로 첫 연출을 맡았고, 군사정권하에서 <고래 사냥> <깊고 푸른 밤> <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꿈> 등의 대표작을 내놓았다. 서슬 퍼런 검열기관에 일일이 대본을 검사받고, 수정해서 영화를 찍고 나면 개봉 전에 또 검열을 당하고, 그렇게 가위질당해 가면서도 기어코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걸었던 배 감독의 담담한 회고를 들으며 숙연해졌다.
예전 칼럼에서 요즘도 횡행하는 대중문화 심의에 대해 개탄한 적이 여러번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검열의 행태는 바뀌지 않는 듯하다. 고등학생이 그린 그림에 발끈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무려 엄중 경고를 내린 ‘윤석열차 사건’만 봐도 그렇다. 표절 의혹도 코미디(표절했다고 하는 작품 자체가 이미 패러디)고, 창작의 영역에서 정치적 의도를 제외해야 한다는 문체부의 입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오히려 반대로 정치가 예술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데,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다시 배창호 감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의 겸손함에 감탄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성취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면 다른 이들에게 공을 돌렸다. 그 시절 최고 인기 작가였던 고 최인호 선생을 치켜세웠고(실제 배 감독 작품 중 여럿이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이제는 우리 영화계의 큰 어른이 된 배우들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최근 혈액암 투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안성기 배우에 대해 말할 때는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지는 듯했다.
감독 데뷔 40년을 맞은 올해, 배창호 감독 특별전이 열렸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몇번째인지 모를 전성기를 맞이한 배우 이정재의 첫 영화 출연작인 <젊은 남자>도 영상과 소리를 다듬어 다시 극장에 걸렸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만든 작품이어서 그런지 <젊은 남자>는 배 감독의 어떤 작품보다 더 자유롭고 노골적이다. 그를 잘 모르는 젊은 독자들께 가장 무난하게 입문할 수 있는 작품으로 추천한다. 이정재도 단 한 편의 인생작품을 골라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꼽는다고 말한 바 있다.
배창호 감독의 연출작이자 이정재의 첫 영화 ‘젊은 남자’. <한겨레> 자료사진.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배창호 감독 영화는 <고래 사냥>이다. 가수 김수철이 주연을 맡았는데, 배 감독은 김수철의 천재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판을 깔아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시절 가수왕(1984년)을 차지할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김수철이 무대와 방송사에 있었다면 훨씬 더 큰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춥고 고된 촬영장에 있어 줘서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말도 전했다. 연기 경험이 일천한 김수철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안성기와 이미숙의 연기나 이른바 리즈 시절의 풋풋한 모습도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오늘 칼럼은 이 영화의 주연이자 음악감독 김수철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할까 한다.
일단 오해부터 풀자. 많은 사람이 영화 <고래 사냥>의 주제곡을 송창식의 ‘고래사냥’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그 노래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주제곡이다. 제목이 같아서 생기는 오해인데, 영화 <고래 사냥>의 주제가는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 딱 한번만 들어도 잊히지 않는 이 노래는 웃음과 슬픔, 모험과 허무함이 뒤섞인 영화의 분위기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원곡도 좋지만 2002년에 강렬한 록밴드 버전으로 다시 녹음한 곡을 꼭 찾아 들어보시기를. 기타리스트로서도 일가를 이룬 김수철의 연주를 짧게나마 맛볼 수 있다.
음악보다 시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김수철의 음악을 듣고 있다. 엉뚱하게도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과 <와이티엔>(YTN) 뉴스 타이틀 음악을 그가 만들었다.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케이비에스~ 한국방송”이라는 가사가 붙은 로고송도 그의 작품. 그뿐인가. 만화영화 주제가도 불렀고, 영원한 응원가 ‘젊은 그대’도 그의 노래다. 흔한 성과 이름처럼 김수철의 흔적은 너무나도 많고 친근하다.
무려 1978년에 데뷔한 작은 거인은 아직도 활동 중이다. 각종 방송, 공연, 광고, 연극, 영화 등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필요한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티도 내지 않고. 동화책 속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있다면 우리 곁에는 아낌없이 주는 천재 김수철이 있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