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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1888년, 미국 땅 달리는 철마를 먹으로 그린 조선인이 있다?

등록 2022-12-23 07:00수정 2022-12-23 17:32

[노형석의 시사 문화재]
강진희가 1888년 그린 <화차분별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근무하면서 볼티모어 등에 열차로 여행 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강진희가 1888년 그린 <화차분별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근무하면서 볼티모어 등에 열차로 여행 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간송 수장고에서 흥미로운 게 나왔지. 약 100년 전 미국에 간 조선 관리가 그린 그림첩 하나를 찾았는데, 한번 보시겠소?” “당연히 봐야지요.”

39년 전인 1983년 5월 초였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놀라운 발견이 한 언론에 공개됐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이 일제강점기 유출될 뻔한 민족의 문화유산들을 사들여 소장·전시해온 한국 미술사의 보루와도 같은 곳. 미술관을 우연히 들러 술동무였던 40대 미술사학자 최완수 연구실장을 만난 당시 <동아일보>의 30대 미술 담당 기자 이용우는 최 실장이 보여준 19세기 말 작가 강진희(1851~1919)의 그림첩과 청나라 외교관리 팽광예의 합작 그림첩 <미사묵연>(美槎墨緣)의 작은 수록 그림 한 점을 보고 눈을 번쩍 치켜떴다. 놀랍게도 미국산 종이에 먹으로 기차를 그린 그림이었다. 두 열의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하나는 강물 위 현수철교를 달리고 다른 한 열은 산을 지나 언덕배기를 달리는 풍경이 아닌가. 화폭 상단엔 작가가 쓴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란 제목이 선명했다. 아래쪽엔 첨탑 달린 서양식 5층 집까지 묘사돼 있었다. 28x34㎝ 크기의 화첩에 적힌 연대와 장소는 1888년, 미국이었다. 이 땅에서 처음 근대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된 것이 1899년이다. 그러니까 11년 전 조선 왕조의 외교관이 미국 땅에서 연기 뿜는 철마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지난 5월 서울 강남 예화랑 기획전 당시 출품된 변재언 작가의 <디지로그, 1851-1919, 미래서사>. 이 현대 설치작품의 배경으로 강진희의 19세기 말 초상사진이 등장한다. 노형석 기자
지난 5월 서울 강남 예화랑 기획전 당시 출품된 변재언 작가의 <디지로그, 1851-1919, 미래서사>. 이 현대 설치작품의 배경으로 강진희의 19세기 말 초상사진이 등장한다. 노형석 기자
최완수 연구실장은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1882년 미국과 조선 정부가 수교한 뒤 미국 현지에 견미사절단을 파견했을 때 화가를 데려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하지만, 화가가 그린 작업의 흔적이나 작품은 전해지지 않았죠. 간송미술관 수장고에서 바로 그 기록이 담긴 화첩이 발견된 것이고 이 발견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확인으로 의의가 있습니다.”

언론사 사회부 시절 광주항쟁 현장을 누비며 민완 기자로 활약했던 이용우는 바로 감을 잡았다. 흥분한 그는 회사로 돌아가 단독 기사를 송고한다. ‘최초의 미국 견문화 발견’이란 제목으로 1983년 5월21일치 <동아일보> 문화면에 실린 이 기사는 한국과 미국의 외교사의 여명기에 미술이 소중한 메신저 구실을 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첫 계기가 된다. 그것은 통역을 맡은 청년 외교관이자 법부, 문부의 요직을 맡은 관료였으며 서화와 전각에 밝은 엘리트 예술가였으나 사후 60년 넘게 묻혔던 강진희의 작가적 면모를 우리 미술판에 제대로 알린 물꼬가 되기도 했다.

초대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일행을 담은 모습. 윗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강진희다.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제공
초대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일행을 담은 모습. 윗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강진희다.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제공
구한말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서 청년 외교관으로 일했던 문인이자 서화가인 강진희가 남긴 그림들은 숱한 이야깃거리를 안고 있다. 사상 처음 조선 작가의 붓으로 증기기관차 등 미국의 근대 문물을 그린 그림 <화차분별도>가 지난봄 그의 먼 후손인 예화랑 김방은 대표의 회고 기획전에서 소개되면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대중에 처음 이 그림이 소개되는 자리로 강진희의 매화도와 글씨 등이 함께 소개되어 학계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낭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연말까지 이어졌다. 그가 당시 미국에서 <화차분별도>와 더불어 나라와 고종 황제를 생각하며 그렸던 영물과 소나무, 별들을 담은 그림들인 <승일반송도> <삼산육성도>가 작별한 지 140여년 만에 한자리에 만나 전시된 것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과 이화여대 등 여러 공·사립기관과 개인 소장가의 손에 뿔뿔이 흩어졌다가 지난주 끝난 국립고궁박물관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기획전 ‘갓 쓰고 米國에 公使 갓든 이약이’전에 기적적으로 출품이 확정되면서 한자리에서 두달간 어울려 전시되는 장면이 펼쳐졌다.

강진희가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서 고종과 순종을 생각하며 그렸다고 전해지는 <삼산육성도>. 실물이 국립고궁박물관의 기획전에서 <화차분별도>와 함께 한자리에 전시되었다. 노형석 기자
강진희가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서 고종과 순종을 생각하며 그렸다고 전해지는 <삼산육성도>. 실물이 국립고궁박물관의 기획전에서 <화차분별도>와 함께 한자리에 전시되었다. 노형석 기자
구한말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정당 공간의 모습. 왼쪽에 강진희의 <승일반송도>와 비슷한 느낌의 소나무 그림이 붙어있어 눈길을 끈다. 독립기념관 제공
구한말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정당 공간의 모습. 왼쪽에 강진희의 <승일반송도>와 비슷한 느낌의 소나무 그림이 붙어있어 눈길을 끈다. 독립기념관 제공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오늘달 대사관의 집무실에 해당하는 당시 공사관의 정당 얼개로 기획전 진열 공간을 연출하면서 <승일반송도> <삼산육성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나란히 걸고 다른 한쪽에 <화차분별도>를 놓아 색다르게 볼 수 있게 한 점이었다. “박정양이 홍콩에서부터 모셔온 성상의 어진 1본과 동궁의 예진을 공사관 정당에 봉안하고, 조선의 외도(外道)에 따라 매월 1일과 15일에 망배례를 행하였다”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의 활동 기록을 고증한 결과였다. 고종과 순종 사진과 함께 전시해 외교적 사료로서도 각별한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강진희는 뛰어난 화력을 지닌 화가였고 민족 예술단체의 시초가 되는 서화협회의 1918년 창립 발기인 중 한명이었으나 외교관 관료 활동에 가려 우리 근대 회화사에서 잊힌 존재였다. 그의 작품들이 한 데 모이는 데는 후대 미술계 인사들의 열정과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간송미술관 전 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 선생이 그 시작이었고, 당시 <동아일보> 미술 담당 기자이자 현재 글로벌 기획자로 베네치아비엔날레 등 국제무대에서 활약 중인 이용우씨, 선조의 유업을 알리고자 묻혀있던 사료와 소장기관들을 수소문한 후손 김방은 예화랑 대표의 노력이 힘을 더해 올해 강진희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모이고 전시될 수 있었다. 외부 대여가 까다로운 국립박물관 소장품들을 <화차분별도>와 한자리 진열장에 모은 국립고궁박물관 임지윤 학예사의 노력도 기억되어야 할 부분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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