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을 입은 남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한명의 여성. “임신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동일한 증상에서 살아남은 환자들 비율은요?” 양복 입은 이들의 질문이 쏟아진 뒤 한 남자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 병원은 지난 10년 동안 중절 수술을 단 한차례 승인했습니다.” 임신부의 생명을 위협하는 울혈성 심부전 진단을 받은 조이(엘리자베스 뱅크스)가 긴급 임신중지 수술을 받기 위해 진행된 심사 현장. “(살아남은 환자 비율이) 20%, 30%면 (수술을) 허락하시나요?” 임신부 당사자가 묻지만, 그는 도마 위에 올린 물고기 취급을 당할 뿐이다.
언제적 이야기냐고? 임신중지 수술이 법적으로 금지됐던 1968년 미국 시카고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지금은 다를까? 여성의 임신중지 결정권을 사생활에 대한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하는 ‘로 대 웨이드 판결’(1973)을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해 6월 폐기하기 전까지는 그저 철 지난 이야기였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이 이 판례를 폐기하고 임신중지 권한 결정을 각 주에 떠넘기면서 영화 <콜 제인>의 이 장면은 미국 곳곳에서 현재형으로 소환되고 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도약시킨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탄생 비화를 담은 <콜 제인>이 ‘세계 여성의 날’인 3월8일 국내에서 개봉하는 데 남다른 의미가 담긴 이유다.
사춘기 딸을 두고 둘째를 임신한 조이는 잘나가는 변호사 남편과 대학 동기지만 그 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랬듯 커리어를 포기하고 중산층 가정의 주부로 살아간다. 임신으로 생명이 위협받는데도 긴급 임신중지 수술을 승인받지 못하자 조이는 불안에 떨면서 대안을 찾는다. 계단에서 굴러라, 옷걸이를 이용해라 등의 위험한 조언을 듣거나 지저분하고 공포스러운 불법 수술 장소를 기웃대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임신인가요? 걱정되나요? 도움을 받으세요. 제인에게 전화하세요’라고 적힌 작은 벽보를 보고 ‘제인’을 찾아가게 된다.
‘제인스’(제인들)는 임신중지가 절박하지만 도움받을 수 없던 여성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임신중지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1965년 시카고에서 여성들이 실제로 만든 비밀단체다. ‘제인’은 익명의 여성을 표현할 때 쓰는 이름. 수술을 마치고 여성들이 모인 장소에서 따뜻한 음식과 휴식까지 제공받은 조이는 부족한 손을 보태달라는 단체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운전과 안내 등 소소한 지원에 나선다. 넷째 아이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여성, 성폭행으로 임신한 여성, 부모에게 알릴 수 없는 10대 임신부 등 간절한 요청이 물밀듯이 쏟아지자 조이는 돈 없는 임신부를 위해 수술법을 배워 직접 해주기로 결심한다.
<콜 제인>은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취급되던 시절 두 여성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영화 <캐롤>(2016)의 각본가 필리스 나지가 연출했다. “나도 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는, 제인스 리더 버지니아 역의 시고니 위버와 조이 역의 엘리자베스 뱅크스를 비롯해 모든 출연진이 영화의 대의에 공감해 기꺼이 작품의 일부가 됐다. 영화적으로도 긴장감 넘치고 짜임새가 촘촘한 <콜 제인>은 실화의 결말을 충실히 따라간다. 1972년 제인스 멤버 7명이 불법 임신중지 시술 혐의로 체포된다. 하지만 이들은 웃으며 법원을 나왔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판결 뒤 해체된 제인스는 단 한명의 희생 없이 1만2000여명의 여성들을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의 공포에서 지켜냈다.
한국에선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1년 낙태죄의 효력이 상실됐다. 하지만 후속 입법이 여전히 공전하면서 임신중지 약물 도입조차 거듭 무산되고 있다. ‘제인’들의 싸움은 2023년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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