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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산의 아픔 지닌 ‘백남준의 파우스트’, 완전체로 모일 날은…

등록 2023-03-13 07:00수정 2023-03-13 08:56

[작품의 운명] 1989~1991 연작 ‘나의 파우스트’
지난해 11월부터 지난달까지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기획전 ‘백남준 효과’에 대표작으로 나왔던 <나의 파우스트> 연작 6점이 전시장에 설치된 모습. <나의 파우스트>는 1989-1991년 백남준이 스위스 등 서구에서의 대규모 미디어아트 전시를 앞두고 구상해 만든 작품으로 그의 세계관, 우주관이 온전히 압축된 거작이다. 원래는 13점을 만들었지만,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뒤 뿔뿔이 흩어져 다른 7점은 전시에 나오지 못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지난해 11월부터 지난달까지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기획전 ‘백남준 효과’에 대표작으로 나왔던 <나의 파우스트> 연작 6점이 전시장에 설치된 모습. <나의 파우스트>는 1989-1991년 백남준이 스위스 등 서구에서의 대규모 미디어아트 전시를 앞두고 구상해 만든 작품으로 그의 세계관, 우주관이 온전히 압축된 거작이다. 원래는 13점을 만들었지만,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뒤 뿔뿔이 흩어져 다른 7점은 전시에 나오지 못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백만 달러가 필요해!”

비디오아트의 ‘제왕’ 백남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김양수, 이 돈으로 내가 만든 파우스트를 사주면 한국에서 전시할 수 있다는군. 할 수 있겠어? ”

1991년 10월 미국 뉴욕 맨해튼의 백남준 스튜디오를 찾아간, 백남준의 화랑계 지인 김양수(두손갤러리 대표)는 작가의 말을 듣고 가슴이 뛰었지만 내심 막막했다. 1980년대 중반이래로 백남준의 비디오 조형물을 도맡다시피 만들던 신시내티의 칼 솔웨이 갤러리 쪽에서 작가에게 제시한 한국 전시의 전제 조건은 감내하기 어려웠다. 한화 10억원을 넘는 100만달러는 소장 화랑주로서는 구하기 힘든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단념할 수 없었다. 그해 8~10월 스위스의 취리히 쿤스트하우스와 바젤 쿤스트할레에서 열린 백남준 기획전의 ‘신들린 듯한’ 매혹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백남준은 취리히에선 ‘비디오타임’, 바젤에선 ‘비디오스페이스’란 제목으로 동시다발적인 전시 난장을 펼쳐 놓고 기발하고 창의적인 모양새의 비디오로봇들과 중세 첨탑과 인물상에서 영감을 얻은 영상조형물들을 처음으로 대거 풀어놓았다. 그의 야심찬 기획은 비디오 거장의 이론적, 철학적 뿌리를 색다르게 드러내면서 유럽의 미술판을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 전시의 핵심인 대표 신작 <나의 파우스트> 연작 13점을 온전히 수중에 넣고 돌아가 국내 전시를 꾸리면, 한국 현대미술사에 획을 긋는 기념비적 사건이 될 것이고 영상미술품을 잘 모르는 국내 컬렉터들에게도 팔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김양수는 백남준과 만난 직후 신시내티 칼 솔웨이 갤러리로 달려가 담판을 지었다. 서울 대학로 갤러리 건물을 저당 잡히고 대구 등지의 부동산을 처분한 돈으로 요구액 100만달러의 4분의 1인 25만달러를 선금으로 치르고 작품 13점을 모조리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92년, 백남준 전시의 새로운 지평이 한국에 열리게 된다. 그해 7월30일부터 9월6일까지 서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나의 파우스트>를 위시한 취리히·바젤 전시의 주요 컬렉션들이 그대로 들어와 전시 무대를 펼치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 열린 역대 백남준 전시회의 대명사로 미술 전문가들이 흔히 떠올리곤 하는 저 유명한 전시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이 그것이다.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백남준 기획전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 전시 당시 과천관 2층 회랑에 전시된 &lt;나의 파우스트&gt; 연작 중 일부의 모습. 전시장 안에 들어온 2022~23년 기획전과 달리 당시엔 전시장 바깥 중앙홀을 둘러싼 회랑에 작품들을 설치했다. 백남준 미디어아트의 설치와 수리를 도맡았던 전기기술자 이정성씨가 찍은 영상을 갈무리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백남준 기획전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 전시 당시 과천관 2층 회랑에 전시된 <나의 파우스트> 연작 중 일부의 모습. 전시장 안에 들어온 2022~23년 기획전과 달리 당시엔 전시장 바깥 중앙홀을 둘러싼 회랑에 작품들을 설치했다. 백남준 미디어아트의 설치와 수리를 도맡았던 전기기술자 이정성씨가 찍은 영상을 갈무리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전의 주인공은 두말할 필요 없이 <나의 파우스트> 연작 13점이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지난달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백남준 효과’전에 30년 만에 리바이벌 작품으로 설치돼 주목을 받은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는 무모한 모험에 가까운 김 대표의 결단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 1989~1991년 만든 13점의 비디오 설치 연작인 이 대작은 19세기 독일 문학 거장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세계 문명사에 대한 백남준의 통찰을 담아낸 미디어아트의 명작이다. 뾰족한 고딕 성당의 첨탑 같은 구조물에 20여대의 작은 티브이(TV) 모니터들이 콜라주된 형식으로 설치돼 영상으로 덮힌 종교적 제단을 연상시킨다. 맨 위 첨탑 부분에 환경, 농업, 경제학, 인구, 민족주의, 영혼성, 건강, 예술, 교육, 교통, 통신, 연구와 개발, 자서전이란 13개의 문명적 주제(연작을 구성하는 각 개별작품들의 제목이기도 하다)에 해당하는 오브제들을 각각 달아맨 독특한 얼개와 모양새를 지녔다. 개별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지구 문명의 여러 단면들을 반영한 복수의 주제들로 백남준이 통찰한 세계관, 문명관을 통합해 내놓은 말년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91년 8월 취리히에서 전시가 개막한 직후 <동아일보> 문화부의 이용우 기자와 현지로 날아가 뜨거운 화제 속에 열리고 있던 백남준 개인전을 샅샅이 살펴본 김 대표는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은 반드시 이 전시를 가져와 성사시킬 것이라고 직접 다짐하는 메시지를 작가에게 보내면서 의기투합했다. <나의 파우스트> 대작 13점 모두를 모두 국내로 들여온 기적 같은 에피소드는 전시를 보고 심취한 김 대표가 홀린 듯 막후 협의를 작가와 진행하면서 이루어졌다. 스위스 취리히와 바젤의 전시회는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1991년 11월~1992년 1월)과 오스트리아 빈 현대미술관(1992년 2~4월)의 순회전으로 이어졌으나 한국 전시 일정은 원래 잡혀있지 않았다. 국내 미술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백남준 미디어 영상 작품 소개에 적극적이었던 당시 이경성 국립현대미술관장의 호의와 노력도 전시를 성사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고 전해진다.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백남준 기획전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 전시 당시 과천관 2층과 3층 회랑에 전시된 &lt;나의 파우스트&gt; 연작 중 일부의 모습. 전시장 안에 들어온 2022~23년 기획전과 달리 당시엔 전시장 바깥 중앙홀을 둘러싼 회랑에 작품들을 설치했다. 백남준 미디어아트의 설치와 수리를 도맡았던 전기기술자 이정성씨가 찍은 영상을 갈무리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백남준 기획전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 전시 당시 과천관 2층과 3층 회랑에 전시된 <나의 파우스트> 연작 중 일부의 모습. 전시장 안에 들어온 2022~23년 기획전과 달리 당시엔 전시장 바깥 중앙홀을 둘러싼 회랑에 작품들을 설치했다. 백남준 미디어아트의 설치와 수리를 도맡았던 전기기술자 이정성씨가 찍은 영상을 갈무리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어렵게 한국 전시를 유치했지만, 설치 과정부터 곡절이 많았다. 작품이 고딕 종탑을 연상시킬 정도로 뾰족한 형태를 띠고 있고 사람 키보다 훨씬 큰 높이 3m가량의 영상 조형물들이 연속으로 도열한 구조를 이루고 있어 과천관 전시장에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30년 전 개인전에는 13점 모두 과천관 전시장이 아닌 중앙홀 2·3층 회랑에 전시됐다. 전시장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복도에 놓인 구도가 어색하긴 했지만, 아래 홀의 다른 작품들을 내려다보는 연작들의 압도적인 형태감과 카리스마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화상 김양수의 노력 끝에 예정에 없던 한국 순회전으로 급하게 마련된 기획전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1984년 사상 초유의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후로 다시금 한국인들 사이에 백남준 미디어아트에 대한 선풍을 일으키는 기점이 됐다. 이 전시로 자신감을 얻은 백남준은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 유치와 광주비엔날레 창설,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개설 등에 힘을 쏟으며 한국 현대미술의 글로벌 무대 진입에 결정적인 밑돌을 놓았다. <나의 파우스트> 연작 또한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포스터에도 들어가면서 한국 전시의 상징적 작품으로 떠올랐다.

문제는 전시 이후였다. <나의 파우스트>를 들여오는 데 들어간 100만달러의 구입가를 벌충하기 위해 반드시 작품들을 팔아야 하는 현실적 문제가 남은 것이다. 예산이 빠듯하고 국내 다른 미술 대가들의 눈치도 봐야 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거액의 작품을 일괄 구입하는 건 당시로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의 파우스트> 연작들은 화상 김양수와 다른 시장 관계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삼성과 대우, 효성, 한솔 등 대기업과 일부 부유한 컬렉터들에게 낱개째로 팔렸고, 결국 완전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의 역사를 겪게 된다. 한점은 미국 뉴욕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팔리면서 다시 태평양을 건너 돌아가기도 했다.

‘백남준 효과’전에 나온 &lt;나의 파우스트-민족주의&gt;. 고인의 미디어아트 대표작으로 꼽히는 &lt;나의 파우스트&gt; 연작의 일부로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백남준 효과’전에 나온 <나의 파우스트-민족주의>. 고인의 미디어아트 대표작으로 꼽히는 <나의 파우스트> 연작의 일부로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애초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의 전시 30주년을 맞아 차린 ‘백남준 효과’전에 연작 13점의 소재를 수소문해 한자리에 모으고 다시 선보이려는 복안을 세워놓았었다. 아쉽게도 작품 상태와 모니터 보존을 둘러싼 소장자들과의 이견 등을 좁히지는 못했고, 삼성가 리움과 현대화랑, 용인 한국민속촌 박물관 등에 소장된 <농업> <인구> <민족주의> <예술> <통신> <교통> 6점을 모으는 데 그쳤다. 미술관에는 과거 전시의 관련 자료들도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백남준의 생전 측근이자 작품 제작기술자였던 이정성(79)씨가 1992년 개막일 당시 찍은 작품 영상 아카이브를 내놓고 친분 있는 컬렉터들을 설득한 덕분에 6점의 작품이나마 소재와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컬렉터들로부터 <나의 파우스트> 연작을 대여하기가 쉽지 않은 배경에는 기술적인 어려움도 작용한다. <나의 파우스트>는 일본 나쇼날사의 80년대 제품 ‘콰이사’를 모니터로 썼는데, 제품이 완전히 단종돼 여분의 부품을 조달할 길이 막연하다. 백남준의 최대작으로 과천관 들머리 램프에 전시된 영상탑 <다다익선>과 달리 대체부품이 전무하므로 고장날 경우 엘시디 기기로 대체하지 않는 한 원상 복원할 방법이 없다. 백남준이 생전 영상작품의 모니터를 대체할 예비품이 없을 경우 다른 영상기기를 써도 된다는 메모를 남겨준 것도 바로 <나의 파우스트> 연작을 제작할 때 기기 수급상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 계기가 됐다는 게 이정성씨의 회고다. 이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고인 20주기나 탄생 100주년 등 앞으로 다가올 미래 기년 때 전체 연작을 다 모아 전시하는 것이 미술판 전문가와 지인들의 숙원이 됐다”면서 “공공미술관 쪽이 작품을 소장한 컬렉터들에게 지속적으로 작품 상태 등을 문의하고 수리 등을 전담하면서 신뢰를 쌓아야 향후 13점이 온전히 모여 전시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될 것으로 본다”고 조언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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