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서 만난 이나은 작가. 김진수 선임기자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드라마 시장에서 작가와 연출자의 ‘이름값’은 중요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일으킨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름값보다 본질적인 ‘이야기의 힘’에 주목하는 이가 늘었다는 것. 드라마 방영 전부터 배우 최우식(최웅)과 김다미(국연수)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그 해 우리는>도 신인 작가·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모두가 섭외를 원하는 가장 ‘핫한’ 배우들이 대본을 믿고 출연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에스비에스(SBS)와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방영이 시작되자 시청자 사이에서 ‘작감배(작가·감독·배우)의 합이 뛰어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높은 화제성·시청시간을 기록했다.
2022년 발간된 대본집은 종이책만 10만 부 넘게 팔렸다.
여러 신인 작가가 빛을 발하는 가운데서도 <그 해 우리는> 대본을 집필한 이나은(29) 작가는 특별하다. 신인 작가 발굴이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보지 못한 소재나 장르물에 도전하는 과정과 맞물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나은 작가는 ‘청춘 로맨스’라는 클래식한 이야기로 주목받았다. <그 해 우리는>은 고등학생 시절 만나서 대학에서 헤어진 연인이 직장 일로 재회하며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다.
이 작가는 10년 전 방송(전교 1등과 꼴찌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이라도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언제든 다시 인기를 끌 수 있는 ‘역주행’ 현상을 소재로 삼는 등 바로 지금 우리 시대의 미디어·문화 감수성을 드라마 곳곳에 섬세하게 반영했다. 사랑에 냉소하기 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용기’의 가치를 감성적으로 보여줬다. ‘웅연수’(최웅과 국연수) 커플 이야기에 과몰입한 시청자들은 드라마 영상 댓글로 “작가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라는 호기심 어린 감탄사를 남겼다. 2023년 2월27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이 작가를 만났다.
1993년생인 이나은 작가는 자신이 쓴 드라마 주인공 ‘웅연수’와 스물아홉 동갑이다. 그는 드라마작가를 꿈꾼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일에 관심이 갔다. 2011년 대학에 입학하며 국제관계학을 택했지만, 수업을 듣다보니 전공과 맞지 않았다. 3학년 때 휴학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나섰다.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 인턴을 하다가 티브이(TV) 예능 외주제작사 웹콘텐츠팀 인턴으로 자리를 옮겼다. 페이스북, 유튜브 등 뉴미디어 전성시대였다. “TV용이 아닌 모바일 콘텐츠를 만들겠다”며 독립에 나선 팀장을 따라 이 작가도 모바일 방송사 ‘와이낫미디어’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이 작가는 <그 해 우리는>으로 지상파 미니시리즈 부문에 데뷔했을 뿐, 2016년부터 청춘 로맨스 드라마를 만드는 일을 계속해왔다. 그가 대본을 쓰고 직접 연출을 맡아 피디(PD) 역할까지 겸했던 웹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전짝시) 시리즈(2016~2017년)가 첫 작품. “<전짝시> 기획안은 첫 회의에서 보류됐어요. 선배가 ‘(소재가) 제한적이지 않냐’고 말했는데, 저는 기획안에 애착이 갔고 짝사랑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기획안이 보류된 바로 그날 네 편의 대본을 후다닥 써서 올리고 퇴근했죠.” 대본을 본 상사는 <전짝시> 네 편 제작에 총 150만원 비용을 할당했다. 시리즈는 큰 인기를 끌며 시즌 1~3.5까지, 브랜디드 콘텐츠를 포함해 75편가량 이어졌다.
이 작가는 웹드라마를 만든 시기를 ‘처음 글쓰기에 매료된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 전까지 글쓰기라고 하면 논술이나 리포트를 떠올렸어요. 그래서 작가 쪽을 생각하지 못했고요. 그런데 일상을 쓰는 게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이야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글쓰기가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전짝시>의 등장인물은 주로 대학생이다. 주인공들은 자신이 짝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시청자는 등장인물 모두의 속마음을 내레이션으로 전달받는 ‘전지적’ 시점에서 함께 애태운다. “제가 대학생일 때 대학생들 이야기를 쓴 거니까, 지금의 제가 절대 다시 쓰지 못할 글도 있어요.(웃음)”
1분, 3분, 7분, 30분, 60분…. 지난 7년여 동안 이 작가가 쓴 대본의 한 회 분량은 꾸준히 늘었다. <전짝시> 마지막 시즌을 끝내고, 2019년 와이낫미디어와 문화방송(MBC)이 공동제작한 크로스드라마 <연애미수>(웹 10부작, TV 5부작)부터는 연출자가 생기면서 대본에만 집중했다.
드라마 작법을 따로 배운 적 없는 이 작가는 독학을 시작했다. 노희경 작가가 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그사세) 대본집을 ‘교과서’로 삼았다. “<전짝시>는 연출을 제가 직접 하기 때문에 저 보기 편하게 대본을 썼는데(웃음), 분량이 길어지니 기존 드라마 문법을 봐야 했어요. 이론적으로 공부하기보다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 대본집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해 우리는> 대본집을 든 이나은 작가. 김진수 선임기자
‘그 시절 우리의 감정에 정답은 없었어요.
누군가는 확신했고, 누군가는 부정했으니까요.’
-<연애미수> 중
이 작가는 <그사세> 대본집에서 신(scene)을 나누고 번호를 붙이는 법, 내레이션 기호([N]) 등 대본집 용어를 습득했다. 회당 20~30분짜리 드라마의 “호흡이 궁금해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빌어먹을 세상 따위>를 보면서 대사를 직접 컴퓨터로 받아썼다.
그에게 노희경 작가의 대본집은 ‘실용서’로서의 의미를 뛰어넘는다. 자신의 대본을 쓰다가 막히거나 불안할 때면 <그사세> 대본집을 펼쳐본다. “처음에는 제 작품에서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극적인 사건 없이 흘러가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런 특성을 강점으로 만드는 사람이 노희경 작가예요. 모든 인물의 감정을 잘 살리고요. 그래서 고민이 많아지면 <그사세>의 흐름을 다시 살펴봤어요.”
그의 말대로 <그 해 우리는>을 비롯한 이 작가의 작품에는 엄청난 극적 갈등이나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사랑을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인물, 열등감을 들키기 싫어서 이별을 선택해버리는 인물 등의 감정선이 드라마의 큰 줄기다. 인물의 속마음을 담은 내레이션 비중이 많은데, 삽입 타이밍이 매끄러워 전달력을 높인다. 이 작가는 “누군가의 속마음이 들리면 내가 정말 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좀더 자기 이야기처럼 느꼈으면 해서 내레이션을 쓴다”고 말했다. “만약 <그 해 우리는>에서 내레이션을 다 빼버리면 시청자들이 웅이 편, 연수 편으로 갈려서 누가 잘했고 못했는지를 다툴 수도 있어요. (내레이션은) 시청자에게 둘 다 이해시키는 저의 방법이죠.”
“연수야… 우리… 이거 맞아? (최웅이 한 걸음 다가온다.)
우리 지금 이러는 게 맞아? (한 걸음 더)”
-<그 해 우리는> 중
드라마 <그 해 우리는> 4화 엔딩 장면. 고등학생 국연수와 최웅이 다큐멘터리 촬영 마지막날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다. SBS 제공
이 작가는 ‘청춘 로맨스를 써온 이유’를 묻는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그 나이이기 때문에”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있고 고민하는 것이라서”라고 답했다. 이런 답변의 의미를 좀더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웹드라마를 쓸 때부터 내가 잘 알고 솔직할 수 있어야 글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쓸 때는 부자연스럽고 부족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제가 십 대일 때, 대학생일 때 짝사랑과 가족이나 친구 사이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친구들과 깊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밝은 친구도 자신만의 고통이 있어요. 누구나 어떤 결핍과 고통을 갖고 있다면 지금도 그런 고통을 겪고 있을 사람에게 당신의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걸 담백하게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시청자는 ‘가짜’를 알아챈다. 웹드라마 작가 겸 피디 시절 콘텐츠마다 시청자 댓글에 일일이 답글을 쓰는 등 실시간 소통 경험에서 배웠다. 이 작가는 자신과 친구들의 ‘진짜’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그 해 우리는> 3회에서 연수가 벚꽃 잎을 손에 모았다가 웅이 머리 위로 흩뿌리는 장면도 작가가 실제 겪은 일.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기록해둔 일기, 휴대전화 메모에서 드라마 속 인물의 속마음(내레이션)을 건져내기도 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도 글감으로 활용한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막상 앞에서는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편지를 쓰면서 정리해요. 막상 편지를 다 쓰고 나면 (상대에게) 건네지 못하기도 해서, 그런 편지를 모아뒀거든요. 제가 받은 편지를 꺼내 보기도 하고요.” 이야기의 개연성·핍진성을 위해 관련 인물을 인터뷰하거나 책·다큐멘터리를 참조하는 등 자료 수집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다양한 ‘마음들’의 역동이다. 이 작가가 인물을 짓는 데 도움받았다며 작가 지망생들에게 추천한 책도 캐릭터의 심리 기제를 정리한 <트라우마 사전>(윌북)이다.
‘(N) 한없이 멀게 느껴지다 한없이 가까이 다가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그 해 우리는> 중
이 작가에게 스토리를 만드는 행위는 자연스레 “어디선가 누군가 겪고 있는 이야기를 수집해 나만의 언어로 들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저는 세상에 없던 걸 만들어내는 개발자가 아니라, 이미 구전으로나 경험으로 존재하는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리게끔 하는 중간 필터 같은 역할을 하지 않나 싶어요.”
그는 가끔 “너무 작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다가도 “사소한 것들도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마음을 다잡는다. “드라마 댓글에서 ‘나는 이런 사랑 한 적 없는데 왜 이걸 보며 울고 있나’ ‘난 모솔(모태 솔로)인데 왜 울지’(웃음) 이런 걸 많이 봤어요. 사랑이란 가치에서 누군가를 전염시키는 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봐요.”
많은 사람이 협업하는 드라마 제작 환경 특성에서 비롯한 믿음과 책임감도 한몫한다. 드라마 대본 집필은 끝없는 피드백과 수정 작업의 연속이다. <그 해 우리는> 때는 다른 제작진에 초고를 보낸 뒤 회차마다 평균 3~4고까지 고쳤고, 최대 9고(아홉번째 원고)에 이르기도 했다. 돌고 돌아 2고로 촬영한 경우도 있다. 이 작가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제 대본에 설득되지 않는데, 무턱대고 찍는다고 다른 사람을 공감시킬 수 있을까 싶다. 현장에서 불확실한 대본으로 촬영하는 것만큼 불안한 일도 없다. 작가로서 대본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동료들이 대본에 공감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애쓴다는 뜻이다.
이 작가는 작가가 자신에게 솔직한, “지금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지닌 힘을 믿는다. 그는 대학생 때 대학생 이야기를 썼고, 이십 대 후반에 동갑내기 이야기를 썼다. 이 작가에게 ‘드라마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걸 발전시켜나가면 돼요.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여겨져도, 어떤 건 사랑받고 어떤 건 사랑받지 않을 수 있어요. 자신이 중심을 잘 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보세요.”
‘마침내 드라마에도 1990년대생이 오는구나.’ 2021년 12월 <그 해 우리는> 첫 방송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본방사수’의 시작은 드라마의 트렌디함이 빛났고, 영화 <마녀>(2018년)만으로는 감질이 난 김다미와 최우식의 연기 합을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20대의 나’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행복하면서도 괴로웠다. 나와 타인과 세상을 알아가는 데 사랑과 연애만큼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은 없다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로 청춘을 버텼다.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상처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언어가 자란다.”
생각해보면 벨 훅스, 에리히 프롬 등 사랑을 진지하게 탐구한 석학들은 한결같이 사랑에는 노력과 훈련,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이나은 작가의 작품들 역시 우리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고, 그 사랑이 우리를 연결하고 성장시킨다는 믿음을 키운다. 사랑의 가능성과 입체성을 그의 표현대로 “담백하게” 전한다. 드라마 속 일차원적 ‘러브라인’에 질려버린 시청자에게 사랑의 가치를 새롭게 환기한다.
작가를 직접 만나고 나니 역시나 그를 엠제트(MZ)에 가둘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는 “(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다르게 포장하는 게 아닐까 고민한다”면서도, “(기본 메뉴를 잘하는)
‘김치찌개 맛집’ 해야지(웃음), 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지” 다짐한다고 했다. 여름을 닮은 사람이 아닐까 예상했는데, 사계절을 품은 듯 너르고 단단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젊어서 좋은 점은 하나다. 그의 다음 작품을 오래 볼 수 있다는 것.
<전지적 짝사랑 시점>(콬TV, 2016~2017년): 웹드라마 최초로 누적 조회수 1억 회 돌파. ‘술의 신’ 편은 페이스북에서만 1천만 뷰를 넘겼다. 이 작가가 와이낫미디어 재직 시절 대본·연출은 물론, 댓글 관리까지 직접 맡았다.
<연애미수>(MBC, 2019년): 와이낫미디어와 MBC가 공동제작한 크로스드라마. 연애하고 싶은데 ‘미수’에 그치는 청춘의 짝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연출은 흠 감독.
<그 해 우리는>(SBS, 2021년): <연애미수> 대본을 눈여겨본 스튜디오N 한혜원 기획피디와 이 작가의 만남이 <그 해 우리는> 프로젝트로 성사됐다. 김윤진·이단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김효실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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