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족 엄마들의 회복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장기자랑>의 이소현 영화감독(왼쪽부터), 예진 엄마 박유신씨, 김태현 노란리본 감독이 지난 3월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여긴 어디? 난 누구?’
다큐멘터리 <장기자랑> 이소현 감독이 2019년 2월 4·16 가족 극단 ‘노란리본’을 만나러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기분은 딱 이랬다. 극단 홍보영상을 만들기 위해 경기도 안산의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김태현 극단 감독은 “잠깐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하더니 “홍보영상 못 찍겠다”고 했다. 새 작품 <장기자랑>의 캐스팅을 두고 연기하는 엄마들 간의 갈등이 폭발했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작업은 해야겠기에 다음날부터 엄마 배우 7명을 각각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질문 두세개에 답을 받으려고 했는데 서운함과 억울함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가 두세시간씩 이어졌다. 이소현 감독은 그때 결심했다고 한다. “홍보영상이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야겠다”고.
5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장기자랑>은 2015년 설립돼 지금까지 작품 4개를 무대에 올리고 5번째 작품 <연속, 극>을 준비 중인 노란리본의 무대 뒤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단순히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과 그 속에서 피워올린 예술혼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고 더 뭉클하다. 지난달 29일 연극 <장기자랑>의 주인공인 예진 엄마 박유신씨와 연극 <장기자랑>을 연출한 김태현 감독, 이번 영화를 만든 이소현 감독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겨우 저거 가지고 그렇게 힘들어했나 창피하기도 하고 감독님한테 죄송했어요. 가슴 밑바닥에는 여전히 죄책감과 피해자다움이라는 족쇄가 있는데 무대에서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하니 너무 자유로웠던 거 같아요.” 당시 영만 엄마 이미경씨와 다신 안 볼 것처럼 등을 돌렸던 예진 엄마 박유신씨가 웃으며 말했다. 예진이는 “얘가 누구 뱃속에서 나왔나 싶을 정도로 남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던”,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2016년 그가 극단에 합류한 이유가 예진이의 못다 이룬 무대의 꿈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지인이 대본읽기 모임이라고 추천을 했어요. 외부 사람들을 피하고 지내던 때라 거절했는데 유가족들이 많다고 해서 가봤죠. 대본이 정말 재밌었어요. 웃지 못할 때 대본을 핑계로 웃을 수 있는 게 좋아서 모임을 나가기 시작했어요.”
다큐멘터리 <장기자랑> 스틸 컷. 영화사 진진 제공
2015년 4월 유족과 처음 만난 김태현 감독의 처음 목표 역시 공연이 아니라 엄마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었다. “안산에서 활동하며 언젠가 세월호 가족들과도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죠. 그러던 중 엄마들에게 바리스타 과정을 가르쳤던 지인한테 ‘연극을 하고 싶으시대’라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죠.” 자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간 김 감독 역시 ‘난 누구? 여긴 어디?’를 경험했다. 이 과정은 영화에도 담겼다. “어머니들은 바리스타 끝나고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도자기를 해볼까, 연극도 재밌겠다 지나가는 말로 한 건데 제가 달려와 버린 거죠.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에 당황했다가 코믹한 연극놀이를 하며 갖은 애를 썼죠. 웃기는커녕 다들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시더라고요. 하하” 두번째 모임 참가자는 첫 모임의 열명에서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2016년 예진 엄마와 영만 엄마가 합류하면서 극단은 활기를 찾아갔다. 하지만 무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두 배우의 경쟁은 극단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2019년 연극을 준비하면서 하고 싶었던 역할을 예진 엄마에게 양보해야 했던 영만 엄마의 마음이 크게 상했던 탓이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 ‘엄마가 애 보내고 나서 뭐가 그렇게 좋아서 저렇게 살 수 있지?’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영화 속에서 영만 엄마가 하는 이 말은 관객의 마음을 크게 흔드는 순간 중 하나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갇혀 있던 깊은 동굴에서 걸어 나와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장기자랑> 스틸 컷.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는 두 사람의 화해와 다른 엄마들의 묵묵한 노력, 그리고 엄마들의 긴 토론과 외적인 문제들을 힘겹게 통과하며 2021년 12월30일 단원고 무대에 처음 오른 노란리본이 <장기자랑>을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수인이, 동수, 예진이, 영만이, 순범이, 윤민이가 열심히 연습했지만 끝내 무대에 올리지 못한 장기자랑을 엄마 배우 김명임, 김도현, 박유신, 이미경, 최지영, 박혜영, 그리고 생존 학생 애진 엄마 김순덕이 무대에서 흥겹게 보여주는 것으로 연극은 마무리된다.
“그날 너무 떨렸어요. 내 아이가 올라갔던 그 자리에 올라가면 흔들리지 않을까, 눈앞에서 교복 입은 아이들이 보이면 머리가 하얘지지 않을까, 엄마들 모두 불안했거든요.” 공연은 무사히 끝났고 눈물은 공연을 본 아이들을 꼭 안아주면서 쏟아졌다. 예진 엄마는 이어 말했다. “공연이 끝나면 모두 누구 엄마 누구라고 소개를 하면서 인사해요. 이제 세월호 참사의 시간도 지나고 많은 사람들이 생업에 바빠서 잊을 수 있잖아요. 이렇게 이름을 우리가 한번이라도 더 불러줘서 아이들이 잊히지 않고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