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차정숙이라고 부르는 게 정말 기뻐요.” 입술이 떨리는 걸 애써 참는 게 보였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1993년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데뷔해 가수 생활을 병행하면서 40편 넘는 작품에 출연한 엄정화가, 이렇게까지 북받칠 일인가. “저 처음이에요. 활동하면서 극중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어요.” 그러고 보니, 4일 종영한 <닥터 차정숙>(JTBC)은 엄정화가 데뷔 30년 만에 만난 드라마 대표작이었다.
전업주부로 살다가 20년 만에 다시 의사가 되기 위해 도전하는 차정숙은 많은 이들을 위로했다. 엄정화는 “스스로 행복을 찾으려는 차정숙의 마음에 시청자들이 공감하고 힘을 얻기를 바랐다”고 했다. 개연성 등 여러 아쉬움에도 시청률 최고 18%(회차 기준)의 힘도 공감이다. 시청자들은 차정숙이 “남편 죽었다”거나, “너(딸) 좋자고 공부하지, 나 좋자고 공부하냐”고 말하는 장면에서 특히 환호했다. 엄정화는 “딸 입장에서는 그렇겠지만, 모든 엄마들이 하고 싶은 얘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 죽었다’고 할 때는 (시청자분들이) 너무들 좋아하셔서, 결혼을 해야 하나 말하야 하나.(웃음)”엄정화도, 남편의 외도 같은 부분만 빼면 차정숙이 놓인 상황에 대체로 공감했다고 한다. 그 역시 2008년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8년간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다.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는데 성대 신경이 마비됐던 것. 그는 “제 기준에서는 큰 수술이었고, 수술 이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차정숙이 간 이식 후 새롭게 도전하는 것처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를 위해서 인생을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예능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가수로서 다시 무대에 선 엄정화. 티브이엔 제공
그동안 경험해보지 않은 캐릭터인 차정숙에 도전한 것도 그래서다. 지난해 <우리들의 블루스>(tvN)에 잠깐 나온 것을 제외하면 2017년 <당신은 너무합니다>(MBC) 이후 6년 만의 드라마 도전이었다. 이효리, 김완선, 화사, 보아와 함께 <댄스가수 유랑단>(tvN)을 하면서 대학 축제에 참가하는 등 새로운 시도도 즐기고 있다. <닥터 차정숙>이 잘돼서 다른 일들에 더 확신을 가지게 된 듯하다. “<유랑단> 첫 무대와 <닥터 차정숙> 첫 방송 날이 같았어요. 무대를 끝내고 숙소에서 촬영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죠. 곧 (드라마) 방송인데 어떡하지, 그러면서. 다음날 반응이 좋으니 그제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는 “‘유랑단’을 하면서 <닥터 차정숙> 때문에 더 많은 환호를 받고 있어서 이 드라마에 정말 감사한다”고 말했다.
엄정화가 극중 이름으로 기억된 <닥터 차정숙>. 제이티비시 제공
차정숙이 집에서 참고 지냈던 것처럼, 엄정화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내가 예전처럼 큰 관심을 받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지난 세월을 짐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시절, 엄정화는 친구인 가수 정재형과 술 마시며 속을 털어놓고 울곤 했다고 한다. “일을 더 하고 싶어 결혼을 생각 안 했다”는 그가 일을 쉴 수밖에 없는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선물 같다”는 그는 앞으로 더 열심히 달릴 거라며 욕심을 털어놨다.
“봉준호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어요. 저는 대부분 신인 감독님들의 데뷔작에 많이 출연했어요. 거장 감독님들과 작품 하면 내가 어떤 배우로 변신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어떤 모습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런 기대감 때문에 언젠가 한번은 꼭 만나보고 싶어요.” 신나고 힘차게 말하는 엄정화의 모습에서 불쑥 드러나 보이는 것은 차정숙이 틀림없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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