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에 재벌가 남주가 평범한 여주를 사랑하는 2000년대식 설정이 자주 눈에 띈다. 왼쪽부터 <이번 생도 잘 부탁해> 문서하 이사, <킹더랜드> 구원 본부장, <셀러브리티> 한준경 대표. 각 방송사 제공
“본부장님~” “이사님~” “대표님~” 다시 시작됐다. 요즘 많은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을 직책·직급으로 부른다. <아름다운 날들> 같은 2000년대 전후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남녀 구도다. 평범하지만 똑 부러지고 긍정적인 여자주인공을 재벌 아들인 회사 상사가 사랑하는 진부한 설정이 2023년 티브이(TV) 드라마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중장년층 주부들을 대리만족시키는 일일드라마가 아니라 2030세대가 주요 타깃인 미니시리즈에서다.
임윤아와 이준호가 주연인 <킹더랜드>(JTBC)는 킹호텔 본부장 ‘구원’과 직원 ‘천사랑’이 사랑한다. 천사랑은 한달짜리 실습생으로 근무하다가 일을 잘해서 호텔리어들의 꿈인 브이브이아이피(VVIP) 라운지 ‘킹더랜드’를 맡게 된다. 구원은 악연으로 만난 천사랑과 티격태격하다가 어느 순간 반한다. 신혜선과 안보현이 주인공인 <이번 생도 잘 부탁해>(tvN)는 엠아이(MI)호텔 전무 ‘문서하’와 팀원 ‘반지음’이 마음을 나눈다. 전생을 기억하는 반지음은 인생 19회차로, 직전 18회차 인생에서 사랑했던 문서하를 찾아가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박규영과 강민혁이 나오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 <셀러브리티>는 코스메틱 브랜드 대표 ‘한준경’이 화장품 방문판매 사원 ‘서아리’한테 빠져든다. 별명이 ‘프린세스 메이커’인 한준경은 서아리를 소셜미디어(SNS) 스타로 만든다. <킹더랜드>는 가장 최신 회차가 11.3%(닐슨코리아 집계), <이번 생도 잘 부탁해>는 4.4%로 수치는 제각각이지만, 온라인 화제성은 모두 좋다. 지난해 지오(FO)푸드 사장 ‘강태무’(안효섭)와 직원 ‘신하리’(김세정)의 사랑을 그린 <사내맞선>(SBS)도 큰 사랑을 받았다.
과거에는 “실장님~”이 대세였다. 1990년대까지 주로 회장 아들이었던 남자주인공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실무를 하는 “실장님~”으로 등장했다. 알고 보니 ‘재벌 2세더라’는 식이었다. 드라마가 다양한 직업군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그 세계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은 집안의 반대에 늘 우여곡절 많은 가슴 아픈 사랑을 했다. 남자주인공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할 각오를 했지만, 여자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우리 아들을 생각한다면 헤어져달라”는 남자 부모의 얘기에 그의 행복을 빌며 사라지기도 했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다르다. 집안에서 반대하는 장면도 잘 등장하지 않고, 반대를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번 생도 잘 부탁해>에서 반지음은 문서하의 아버지한테 “아들 곁에 있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도 끄덕 없다. 아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는 생각에 반지음은 오히려 그를 지켜줘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설레는 로맨스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출 뿐, 재력 차이로 인한 갈등을 주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여자주인공은 과거에 견줘 더 긍정적이고 능력있고 자존감도 높아 보인다. 정통 멜로보다는 판타지와 코미디가 강조됐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주인공은 예나 지금이나 복잡한 가족사에, 어렸을 때 받은 상처로 인한 정서적 결핍이 있다. 차가운 성격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다가 씩씩한 여자주인공을 만나 달라진다. <이번 생도 잘 부탁해> 문서하와 <킹더랜드> 구원은 모두 트라우마가 있고, 각각 아버지의 애인과 누나와 호텔 경영을 두고 경쟁한다. <사내맞선>이 예상을 깨고 크게 성공하면서 여성 시청자들이 이런 남자주인공을 좋아한다는 고정 관념이 확고해진 분위기다. 정지욱 대중문화평론가는 “남자주인공의 뻔한 설정은 시대를 관통한다”고 했다.
<밀회>(JTBC) 등 2010년대 이후 드라마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반영해왔다. 현실적인 이야기가 인기를 끌면서 <스타트업>(tvN)처럼 젊은 세대가 열심히 살며 성장하는 모습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랬던 드라마는 왜 다시 판타지를 자극하는 “본부장님~”을 소환했을까.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2030세대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도드라진 점에 주목했다. 열심히 일해도 나아질 수 없다는 희망을 잃은 세대가 드라마에서나마 로맨스를 즐기고 싶은 정서적 반응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1990년대 캔디와 실장님은 ‘혹시 모를 로또’ 같은 확률을 염두에 두고 낭만적 로맨스를 즐긴 비현실적인 특징이 있었다면, 요즘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명확한 인식에 근거해 드라마에서나마 낭만적 로맨스를 즐기고 싶은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웹소설 등 서브컬처를 메인으로 소비하고 짧은 영상에 익숙한 세대의 특성이 반영됐다는 의견도 있다. 윤필립 대중문화평론가는 “멋진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웹소설, 웹툰에 자주 등장해 요즘 세대에게 거부감이 덜하다”며 “서사 보다 상황의 재미에 치중한 점도 쇼트폼에 익숙한 세대들이 좋아할 요소”라고 했다.
세태를 반영했다고는 하지만 ‘신데렐라 드라마’에서 자주 지적되는 스토리의 부실함은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다. <킹더랜드>는 임윤아와 이준호라는 배우를 한 화면에서 보는 ‘재미’를 제외하면 뚜렷한 내용이 없다. 섬에 갇히거나, 산에 고립되는 등 두 사람을 이어주는 뻔한 상황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셀러브리티>는 한준경이 신발도 혼자 벗지 않는 재벌로 나오는 등 황당한 설정이 많다. 드라마의 질적 발전을 저해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정지욱 평론가는 “설정은 진부하더라도 이를 풀어가는 과정은 발전적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지난해 인기를 끈 <사내맞선>. 에스비에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