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80)가 성악가의 얼굴을 가격하면서 예정된 유럽 투어 공연을 중단했다. 몬테베르디 합창단·오케스트라 누리집 갈무리
영국의 저명한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80)가 성악가의 얼굴을 가격한 사건을 계기로 지휘자의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올랐다. 가디너가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유럽 투어 공연도 중단했지만 여파가 적지 않다. 그가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에 클래식 음악계의 당혹감은 더욱 컸다. 당대의 악기와 주법으로 연주하는 ‘시대악기 운동’의 기수인 그는 내년 내한 공연이 잡혀 있다.
사건은 지난 8월22일(현지 시각)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고향인 프랑스 동남부 라 코트 생 앙드레에서였다.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 2막이 끝나고 성악가 윌리엄 토머스(28)가 무대에서 내려갔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이었다. 가디너는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소리치며 “머리 위에 맥주를 부어버리겠다”고 위협했고, 입 주변 얼굴을 주먹으로 때린 것으로 보도됐다. 토머스는 크게 다치지 않았고, 다음 공연에도 출연했다.
가디너는 사건 직후 “변명의 여지 없는 잘못된 행동을 깊이 후회하며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악가 윌리엄 토머스에게도 별도로 사과했다. 가디너는 “물리적 폭력은 절대 용납할 수 없고 음악가들은 언제나 안전해야 한다”며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이번 일로 발생한 고통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자세를 낮췄다. 가디너의 측근들은 프랑스의 극심한 폭염과 복용해온 약물을 새로 바꾼 게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원인을 짚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가디너는 ‘시대악기 연주’를 주류로 끌어올리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트, 낭만과 혁명 오케스트라를 창설했고, 세계 대부분의 1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지난 5월 찰스 3세 대관식도 그가 지휘했다. 바흐에 관한 방대한 저작을 저술했고, 바로크 음악은 물론,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의 곡들에도 새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권위가 높았던 만큼 이번 사안이 남긴 그늘도 깊다. 무엇보다 독재적 권한을 행사해온 ‘권위적 지휘자 리더십’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영국 ‘더 타임스’의 음악 전문기자 리처드 모리슨은 “매혹적인 지휘자 가디너가 공룡이 돼버렸다”며 “이런 형태의 고압적 지휘자 모델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지휘자들은 매너 좋고, 일도 잘하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고 일침을 놓았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도 “‘권위적 지휘자 신화’는 수십년 동안 그것을 신화로 포장해온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가장 ‘지적인 지휘자’로 꼽히던 가디너가 신화로 미화되고, 전설로 포장돼온 ‘카리스마형 지휘자 리더십’이 난타당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는 것.
실제로 가디너는 연주에 매우 까다로웠고, 쉽게 만족하지 않는 지휘자로도 유명했다. 2010년 인터뷰에서는 “나는 참을성이 없고 짜증을 잘 내지만 여러분이 들은 것만큼 악랄하게 행동하지는 않는다”며 “오케스트라의 구조는 비민주적이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2014년 가디너가 런던심포니 트럼펫 주자를 공격했다’는 가십 기사까지 거론했다.
‘독재형 지휘자’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유튜브 갈무리.
‘독재형 지휘자’의 극단적 사례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다. 그는 1920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를 공격해 재판에 회부됐다. 리허설 도중 바이올린 활을 부러뜨리고 지휘봉으로 눈을 찔렀다는 혐의였다. 토스카니니는 “음악의 마력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1943년 토스카니니가 엔비시(NBC) 심포니와 진행한
리허설 녹음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다. 분노에 가득 찬 그가 괴성을 지르며 뭔가 집어던지는 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단원들의 연주자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거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에도 변화가 왔다. 오케스트라 노동조합의 발언권이 커졌고, 지휘자의 불합리한 조처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췄다. ‘최후의 독재 군주’로 불리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의 죽음은 ‘권위적 리더십’의 종말을 상징하는 듯했다. 베를린필 단원들은 카라얀과 정반대 유형인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와 사이먼 래틀(68), 키릴 페트렌코(51)를 차례로 지휘자로 선택했다.
지휘자들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거장 신화’의 계보를 잇는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84)도 한 인터뷰에서 “지휘자가 독재적으로 행동하는 게 가능하지 않은 시대”라며 “단원들이 지휘자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도록 토론하고 설득하는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했다. 샌프란시코 교향악단을 이끄는 지휘자 에사 페카 살로넨(65)은 아예 “낡은 마에스트로의 존재는 불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럼에도 음악에 대한 절대적 결정권을 지닌 지휘자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고, 언제든 남용될 여지가 있다.
국내에서도 ‘소통하는 지휘자’ 시대가 도래했다. 세대교체가 이뤄져 30~40대 지휘자들이 대세를 이룬다. 이병욱(48·인천)과 최수열(44·부산), 정나라(43·공주), 김건(42·창원), 홍석원(41·광주), 정헌(41·목포), 안두현(41·과천), 정민(39·강릉)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까지 서울시향을 이끈 오스모 밴스케(70)는 단원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했고, ‘소통의 리더십’으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7월 경기필을 떠난 마시모 자네티(61)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단원들과 격의 없이 소통했다. 국립심포니 음악감독 다비트 라일란트(44) 역시 부드럽고 세심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다만, 내년에 서울시향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는 얍 판 츠베덴(63)에 대해선 일부 염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가 단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호랑이 스타일 오케스트라 조련사’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80)는 당대의 악기와 주법으로 연주하는 ‘시대악기 운동’의 기수로, 음악계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몬테베르디 합창단·오케스트라 누리집 갈무리
지난달 부천필 상임지휘자에서 퇴임한 장윤성(60) 서울대 교수는 “단원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게 아니라 음악적 합의점을 찾고 동의를 구해내는 게 지휘자의 역할”이라며 “요즘은 연주자들 기량이 워낙 뛰어나 단원들과 공감대를 이룰 때 음악이 자연스러워지더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부천필 리허설에서 단원들과 웃으면서 얘기하고 소통하는 데 2년 반이 걸렸다”며 “지휘자가 단원들 옷차림까지 간섭하며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연습하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