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가 글로벌 오디션을 통해 결성한 다국적 걸그룹 비춰(VCHA).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20여년간 케이(K)팝은 항상 세계로 진출해왔습니다. 일본·중국·아시아를 넘어 미국·유럽까지 전세계를 향한 도전의 역사였죠. 지난해 미국에 갔다가 코로나 팬데믹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케이팝의 영향력이 커진 걸 보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 당당히 엔터테인먼트 본고장 미국에서 시작하는 케이팝 회사를 만들면 어떨까?’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한세민 타이탄 콘텐츠 이사회 의장은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옥에서 열린 출범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이탄 콘텐츠는 그가 지난 4월 미국에 설립한 케이팝 회사다. 처음부터 미국에 케이팝 회사를 만든 건 최초 사례다. 지난 6월 한국 법인을 만들고 이번에 한국 사무소를 출범한 데 이어, 내년 1월 로스앤젤레스 본사 사무소를 열 예정이다.
케이팝이 한국을 벗어나 처음부터 글로벌로 확장하는 흐름이 거세지고 있다. 타이탄 콘텐츠처럼 미국에서 시작하는 케이팝 회사가 나오는가 하면, 하이브·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 등 대형 케이팝 회사는 다국적 케이팝 그룹을 처음부터 미국에서 데뷔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한국인이 아예 없는 케이팝 그룹도 등장했다. 케이팝은 이제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의미를 넘어 시스템 자체를 세계화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처음부터 미국에 본사를 설립한 케이팝 회사 타이탄 콘텐츠 창립 멤버들. 왼쪽부터 한세민 이사회 의장, 리아킴 최고안무책임자(CPO), 강정아 최고경영자(CEO), 이겸 최고시각책임자(CVO). 타이탄 콘텐츠 제공
한 의장은 지난 20여년간 케이팝 흐름을 주도해온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대표 출신이다. 다른 3명의 창립 멤버도 쟁쟁하다. 에스엠 출신으로 동방신기·소녀시대·엑소·더보이즈 등을 발굴·육성한 강정아 최고경영자(CEO), 트와이스·마마무·선미 등 안무를 만든 리아킴 최고안무책임자(CPO), 세븐틴·갓세븐·더보이즈 등 비주얼을 창조한 이겸 최고시각책임자(CVO)가 뭉쳤다. 다수의 글로벌 투자회사들이 투자했고, 버라이어티·빌보드 등 미국 현지 매체들은 출범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타이탄 콘텐츠는 2028년까지 다국적 보이그룹 2팀, 걸그룹 2팀, 남녀 솔로 각각 1명씩 데뷔시키는 것이 목표다. 내년 글로벌 오디션을 시작해 2025년 첫 신인을 공개할 예정이다. 웹3·메타버스·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을 활용한 플랫폼 사업도 병행한다. 중소기획사 케이팝 아티스트들도 글로벌 팬들과 손쉽게 만날 수 있는 플랫폼 구실을 하겠다는 것이다. 케이팝 제작 시스템과 팬덤 비즈니스 모델을 글로벌로 확장하는 모양새다.
케이팝 열풍의 주역인 대형기획사들도 새로운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을 키운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요즘 “케이팝에서 케이를 떼야 한다”고 자주 말한다. 기존의 한정된 팬덤 시장을 넘어 “더 넓은 시장에서 더 넓은 소비자층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성장에 제한이 생기고 케이팝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이 방 의장의 생각이다. 그가 새로운 돌파구의 하나로 시도한 것이 글로벌 오디션을 통한 다국적 케이팝 그룹의 출범이다.
하이브가 글로벌 오디션을 통해 결성한 다국적 걸그룹 캣츠아이. 하이브 제공
하이브는 2년여간의 여정 끝에 최근 글로벌 걸그룹 캣츠아이의 최종 멤버 6명을 확정했다. 소피아(필리핀)·라라(미국)·윤채(한국)·메간(미국)·다니엘라(미국)·마농(스위스)이 그들이다. 하이브와 미국 게펜 레코드가 협업한 오디션 프로그램 ‘더 데뷔: 드림아카데미’를 통해 선발된 이들은 미국 데뷔 준비에 들어갔다. 방 의장은 미국 경제매체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 그룹으로 발돋움해 케이팝의 외연을 확장하고 영속성을 갖는 데 기여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밝혔다.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 1위를 4번 연속 달성한 그룹 스트레이 키즈의 소속사 제이와이피도 글로벌 걸그룹 비춰(VCHA)를 결성하고 데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비춰는 제이와이피와 유니버설뮤직 그룹 산하 리퍼블릭 레코드가 합작한 글로벌 오디션 프로젝트 ‘에이투케이’(A2K)를 통해 탄생했다. 미국 5개 주요 도시와 한국을 거쳐 지난 9월 최종 멤버 6명(렉시·케이지·카밀라·사바나·케일리·켄달)을 추렸다. 미국인 4명, 캐나다인 1명, 한국·미국 이중국적 1명이다. 이들은 지난 9월 프리 데뷔 싱글 ‘새빛’을 내놓은 데 이어, 1일 두번째 프리 데뷔 싱글 ‘레디 포 더 월드’를 발매했다. 비춰는 내년 1월26일 공식 데뷔할 예정이다. 에스엠도 영국 엔터테인먼트 그룹 문앤백(M&B)과 손잡고 현지에서 보이그룹을 데뷔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전원 외국인으로 결성된 케이팝 걸그룹 블랙스완. 디알(DR)뮤직 제공
국내에서도 한국인 없는 케이팝 그룹이 등장하는 등 색다른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중소기획사 디알(DR)뮤직의 걸그룹 블랙스완은 2020년 데뷔했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섞인 다국적 걸그룹으로 출발했다가 한국 멤버들이 빠지고 새로운 외국인 멤버들이 들어오면서 지난해부터 전원 외국인 그룹이 됐다. 현재 가비(브라질)·스리야(인도)·앤비(미국)·파투(벨기에)가 활동 중이다. 이들은 국내 활동은 물론 지난달 미국 서부 4개 도시 투어를 도는 등 글로벌 활동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걸그룹 스타비는 지난 8~11월 한국에서 케이팝 연수를 받으며 자신들의 음악과 케이팝을 결합하는 시도를 했다. 이른바 ‘케이인니팝’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케이팝을 결합한 인도네시아 걸그룹 스타비. 순이엔티 제공
업계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음악 스타트업 스페이스 오디티가 지난달 연 ‘케이팝 레이다 컨퍼런스’에서 김영대·김윤하·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와 아이돌 스케줄 애플리케이션 ‘블립’ 팬덤 연구원 정소연 매니저는 올해 케이팝 트렌드의 열쇳말 중 하나로 ‘케이 없는 케이팝’을 꼽았다. 이들은 “현재 케이팝의 경계와 정의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케이팝에 대한 범주 역시 넓어지고 있다”며 케이팝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두고 토론했다. 김영대 평론가는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한국이 만든 케이팝 그룹, 한국이 만든 외국인 케이팝 그룹, 한국과 외국이 합작한 케이팝 그룹, 외국인이 만든 유사 케이팝 그룹이 빌보드 차트 톱 10에서 경쟁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