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의 11시 클래식’ 진행자 정경이 지난 19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교육방송 스튜디오에서 1천회 특집 공개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교육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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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가자!”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에 공부와 담쌓고 살던 그가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노래를 시작했다. 그것도 성악이다. “평소 목청 좋다는 소리를 들어와서 제가 성악을 잘할 거라 판단하셨나 봐요.” 하지만 지도를 받으려고 간 곳에서 “돈이 없으면 성악은 포기하는 게 낫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절망하자 그는 그제야 비로소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노래가, 대학이 뭐라고 어머니를 울리나 싶더라고요. 그때 결심했어요.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해보자.” 틀을 깨는 성악가 바리톤 정경의 시작이었다.
교육방송(EBS) 라디오 프로그램 ‘정경의 11시 클래식’(매일 오전 11시) 진행자로 더욱 친숙한 정경은 시작만큼 파격적인 행보를 걸어왔다. 예고를 나오거나 유명 음악가한테 지도받지 않고도 성공하면서 클래식계에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재수 끝에 대학에 갔더니 동기들이 대부분 예중·예고 출신이더라고요. 그들보다 실력도 안됐고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제겐 버거운 일이었어요. 매일 밤늦게까지 연습해도 제가 1등이 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걸 내세워 이 분야를 한번 흔들어보자 생각했어요.”
틀을 깨는 장르 ‘오페라마’도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음악대학을 졸업한 뒤 이례적으로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오페라와 드라마를 결합한 오페라마를 2010년께 기획했다. 강연과 공연, 프레젠테이션을 융합해 클래식을 콘텐츠화한 것이다. “고전 예술은 대중과 접점이 거의 없잖아요. 클래식은 딱딱하고 어렵다는 생각에 접근 자체를 어려워하고. 여러 장르와 결합해 콘텐츠를 다양화하면서 편견을 깨고 싶었어요.” 슈베르트 ‘마왕’에 관한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들려준 뒤 노래를 불러주면서 음악을 더 깊게 이해하게 하는 식이다. 클래식을 알아도, 몰라도 재미있다.
워너뮤직코리아에서 그의 공연을 보고 ‘클래식 신사업 예술경영부’를 신설하는 등 정경의 철학은 클래식계에서 여러 길을 내고 있다. 1년에 100회 이상 공연과 강의도 해왔다. 철칙은 있다. “변해야 하지만 고전의 본질은 잃지 말아야 한다.”
지난 19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교육방송 사옥에서 진행된 ‘정경의 11시 클래식’ 공개방송 현장. 교육방송 제공
2021년 3월부터 ‘정경의 11시 클래식’을 진행한 것도 다양화 차원이다. 23일 1천회를 맞는 이 프로그램은 교육방송에서 10년 만에 클래식 라디오를 신설해 주목받았다. 진행자로 정경이 등장하는 순간 많은 이들이 예상했듯이 그는 1천회 동안 클래식 라디오의 틀도 깨왔다. “초대 손님들이 대본대로 가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해요. 하하하. 음악가들은 완벽하고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벽을 허물고 싶었어요.” 그는 “진행 실력은 전문가를 따라갈 순 없지만, 가장 재미있고 유쾌한 클래식 방송이라는 건 자부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경의 11시 클래식’이 허브 구실을 하길 바라며 꼭지(코너) 선정에도 신경썼다. 유명 음악가들이 나오고 완곡을 들려주기도 하지만, 수요일 고등학생들을 초대하는 ‘어린 예술가’는 기존 클래식 프로그램에는 없던 시도다. 지금껏 200명이 출연했고 이들한테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정경은 “전국의 많은 학교에서 자신 있게 신청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한테도 정경은 말한다. “음악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음악 하는 친구 외에 다양한 경험을 하는 친구들을 두루두루 사귀어야 한다”고.
정경의 마음은 더디지만 많은 이들한테 스며들고 있다. 지난 19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교육방송 사옥에서 열린 1천회 공개방송에는 이 프로그램으로 클래식을 듣게 된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80대 어르신은 “70살 이후 시력을 잃어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 매일 이 방송을 들으며 그 힘으로 하루를 산다”고 했다. 친구를 따라서 왔다는 한 여성은 “클래식 프로그램을 이렇게 유쾌하고 재미있게 진행하는 건 처음 본다”고 했다.
“하하하.” 어떤 질문에도 늘 웃으며 대답하지만, 다른 길을 걸어온 삶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클래식에서 그의 행보가 폄훼되기도 한다.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클래식의 문턱을 낮추는 데 그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 나의 의지를 꺾은 적은 없다”며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 큰 꿈을 꾼다”고 했다. 아프리카에 공연장을 지어 모두 하나 되어 노래하고, 미국 플라스틱 쓰레기섬에서 자연을 위해 노래하는 것 등이다. 당장은 국악기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한 애국가를 내년 삼일절에 선보이려고 준비 중이다. 스스로 동기 부여를 할 줄 아는 정경은 계속 자가발전해나가고 있다. “모두가 1등이 될 순 없고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잖아요. 자기만의 콘텐츠를 갖고 넓게 보며 자신만의 삶을 살면 좋겠어요.”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