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해 동안 문화계 각 분야(영화, 드라마, 대중음악, 공연, 미술·문화재)의 이슈를 결산하는 특집 기사를 29일까지 매일 싣는다. 첫번째는 영화계다.
무더운 여름 성수기에도 선선한 추석 성수기에도 올 한해 극장은 찬 공기가 가득했다.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무렵 ‘서울의 봄’이 몰고 온 뜻밖의 훈풍이 내내 썰렁하다 훈훈하게 급 마무리 되는 영화의 엔딩처럼 2023년 한국 영화계의 기상도를 바꿔놨다. 씨제이이엔엠(CJ ENM), 천만 흥행 강제규, 김용화 감독 등 업계 대표주자들이 속절없는 실패를 맛본 시장이었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 ‘잠’ 등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젊은 작품도 등장했다. 극장 문턱을 높인 관람료와 실제 객단가 간의 괴리는 내년에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 ‘서울의 봄’ 뒤집기 한판
팬데믹 종료가 무색하게 극장가는 불황이 이어졌다. 1월 설 연휴에 개봉한 ‘교섭’과 ‘유령’이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흥행 실패로 출발한 뒤 여름방학, 추석 등 성수기 한국 대작영화 중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절한 수준의 실패를 맛봤다.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산업 월별 자료를 보면 극성수기로 꼽히는 지난 8월 한국영화 매출액은 910억원으로 2017~2019년 8월 평균(1687억원)의 54% 수준을 기록했다. 관객 수는 939만명으로 2017~2019년 8월 평균(2052만명)의 46%에 머물렀다. 1월부터 11월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121편 가운데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범죄도시3’, ‘서울의 봄’,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 ‘30일’, ‘잠’, ‘옥수역 귀신’ 등 7편이 전부다. 다만 전통적인 비수기인 11월 말 개봉했고, 흥행코드가 많지 않았던 ‘서울의 봄’이 천만 흥행에 다가서고 연이어 기대작 ‘노량:죽음의 바다’가 이달 개봉하면서 막판 반전을 꾀하고 있다. 영화계에서는 두 영화의 흥행 쌍끌이로 팬데믹 이후 쪼그라들었던 관객수 크기가 2019년 수준으로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 입소문이 만든 역주행 트렌드
코로나 이후 1인당 극장관람 횟수가 연 2회 수준으로 코로나 전에 견줘 반 토막이 나면서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신중해졌다. 씨지브이(CGV)가 지난 8월 내놓은 2023 영화산업 자료를 보면 코로나 직전인 2019년 평균 관람 시점은 개봉 뒤 10.9일이었지만 2022년 여름부터 평균 15.1일로 4.2일 늘었다. 개봉 전 제작·배급사의 홍보 마케팅보다 개봉 뒤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가를 믿고 관람을 결정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의미다. 조진호 씨지브이 콘텐츠기획담당은 “코로나를 거치며 관객들의 영화 선택이 까다로워지고 개봉 뒤 입소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관객이 뒤로 갈수록 증가하는 ‘역주행’ 트렌드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특히 이런 변화는 20대 관객의 영화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20대 관객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애니메이션 ‘엘리멘탈’ ‘더 퍼스트 슬램덩크’ 등은 20대가 바이럴에 움직이면서 역주행 성공 스토리를 썼다. ‘서울의 봄’ 역시 개봉 첫주말보다 두 번째 주에 관객이 늘어나는 역주행을 하면서 흥행 상승곡선을 그렸다.
■ 체면 구긴 업계 선두주자들
2023년은 한국영화 대표주자들에게 더 혹독한 한해였다. 2019년 ‘기생충’ 신화를 일궈낸 업계 1위 씨제이이엔엠(CJ ENM)은 설 연휴 ‘유령’, 여름방학 ‘더 문’, 추석 연휴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등 주요 시즌마다 내놓은 기대작들이 전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계속되는 흥행 실패로 인한 적자가 쌓이면서 올 한해 단 한편의 새영화 투자소식도 내놓지 못했고 구조조정을 통해 전체 직원의 15% 가까이 감축했다. 올해 ‘소년들’을 개봉한 정지영 감독은 “대기업 투자자가 기존 투자 매뉴얼에 맞춰 새로움이 부족한 대작 몇편으로 관객몰이를 하려다보니 한국영화 전체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지적했다.
업계 1위 씨제이 뿐 아니라 흥행보증수표라고 일컬어지던 감독들도 줄줄이 실패를 맛봤다. ‘신과 함께’ 1, 2편으로 쌍천만 기록을 세웠던 김용화 감독의 ‘더 문’, 김성훈 감독의 ‘비공식작전’, 강제규 감독의 ‘1947 보스톤’,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 등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신작이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흥행 성적을 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 아래서 연출부 일을 하며 영화를 배운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유재선 감독의 ‘잠’이 비평과 흥행에서 준수한 성적으로 거두며 ‘포스트’ 박찬욱, 봉준호 세대의 출발을 알린 게 그나마 올해의 드문 수확 중 하나였다.
■ 부산국제영화제 ‘흔들’
한국을 대표하며 아시아 최고 규모와 권위의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가 내홍을 겪으며 지난 10월 이사장·집행위원장 모두 공석인 초유의 행사를 치렀다. 지난 5월 기존에 없는 운영위원장 자리가 만들어지면서 조종국 전 영진위 사무국장이 취임하자 허문영 집행위원장이 사표를 냈다. 이 사태에 대한 이용관 이사장의 책임론이 불거지자 이 이사장도 사의를 표명하며 영화제 개최를 석달 앞두고 정상적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이후 남동철 수석프로그래머가 집행위원장 대행을 맡고 배우 송강호가 영화제의 호스트로 나서며 지난해보다 축소된 규모의 영화제가 열렸다. 영화제 집행부는 혁신위원회를 꾸려 새 이사장 인선과 내부 문제들을 정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로 2014년 ‘다이빙 벨’ 사태 이후 해묵은 내부 갈등과 보수정권이 영화제에 보내는 곱지 않은 시선, 내년부터 당장 줄어드는 영화제 정부 지원 등 겹겹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 수익 낮추는 객단가
올 초 극장가에 관객이 오지 않는 위기의 원인을 관람료 인상에서 찾는 지적이 많았다. 코로나 때 극장요금을 세 차례나 인상하면서 주말 극장요금은 멀티플렉스 일반관 기준으로 1만5000원이 됐다. 전보다 30% 가량 껑충 뛴 가격이 안 그래도 오티티(OTT)에 빼앗긴 관객의 회복을 요원하게 만든다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관객 한명이 실제로 지불한 평균 금액인 객단가는 요금 인상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흥행에 성공한 ‘범죄도시3’와 ‘서울의 봄’ 모두 객단가는 채 만원이 되지 않았다. 통신사 할인과 극장에서 뿌리는 할인티켓 등으로 제값을 지불하는 관객이 지극히 적었다는 의미다. 이로 인해 배급사가 극장과 나눠 갖는 수익도 개선되지 않아 침체가 계속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관람료와 객단가간의 괴리가 빚는 극장시장의 왜곡은 한국영화계가 내년도에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