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벼랑 위의 포뇨’
금붕어 소녀·인간 소년의 사랑 나래
금붕어 소녀·인간 소년의 사랑 나래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면 마법의 세계가 열린다. 그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금붕어 소녀에게 팔다리가 생기고, 바다 위를 뛰어다녀도 이상하지 않다. 논리를 따지던 어른들은 어느새 극장 밖 질서를 잊어버리고, 어린이들의 꿈은 총천연색으로 부풀어 오른다. 금붕어 소녀 ‘포뇨’와 다섯 살 소스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가 시작된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벼랑 위의 포뇨>는 아날로그 감성의 승리로 불러도 좋을 만큼 ‘손그림’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 차 있다. 컴퓨터는 물론 샤프도 거부한 채, 미야자키 감독이 연필로 손수 그린 17만장의 그림(<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1만장)으로 이뤄진 대작이다. 연필 자국 선명하지만,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은 저 파도의 움직임과 돌 하나하나에 미묘한 변화를 주는 채색. 굳게 닫힌 어른들 마음까지도 열어젖히는 마법의 원천이 바로 여기 있다.
아날로그에 대한 집착은 미야자키가 데뷔 이래 일관되게 지켜 온 세계관과 연관된다.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적기;赤旗)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에 연재했던 만화 <사막의 백성>부터, 애니메이션 연출 데뷔작 <미래소년 코난>(1978),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등에 이르기까지 그는 줄곧 기계문명을 반대해 왔다. <미래소년 코난>에서 ‘나쁜 편’으로 묘사되는 나라의 이름이 ‘인더스트리아’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1997년작 <원령공주>에서도 반문명적 세계관은 계속된다.
이들 작품과 달리 <벼랑 위의 포뇨>는 문명 비판을 직접 내세우지 않는다. 네살배기 여자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웃집 토토로>(1988)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줄거리도 단순하다. 바다 속 세상이 따분했던 금붕어 소녀가 해파리를 타고 바다 위로 올라왔다가 인간의 그물에 걸릴 뻔한다. 다행히 그물은 피했으나 유리병 속에 갇히고 만 금붕어 소녀를 바닷가 ‘벼랑 위’에 사는 다섯살 소년 소스케가 발견한다.
소스케는 금붕어 소녀에게 ‘포뇨’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포뇨는 소스케에게 반해 이렇게 외친다. “포뇨, 소스케 스키!”(포뇨, 소스케 좋아!) 포뇨는 인간이 되어 소스케와 함께 살고 싶어 하지만 바다의 신이자 포뇨의 아빠인 후지모토는 커다란 해일을 일으켜 포뇨를 바다로 데려가려 한다. 이 해일로 온 마을이 물속에 가라앉는 장면은 두근두근한 긴장감을 준다.
<…토토로>가 그랬듯, ‘나쁜 사람’이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스릴 넘치는 모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동그란 얼굴에 조그만 코와 입, 볼록한 배와 유난히 짧은 다리로 파도 위를 달리는, 앙증맞은 포뇨는 누구에게나 사랑스럽게 와 닿는 캐릭터다. 미야자키가 작화 감독인 곤도 가쓰야의 세살배기 딸을 모델로 만들어냈다고 한다. 포뇨라는 이름은 목욕탕에서 쓰는 유아용 장난감 금붕어를 만질 때 그 탱탱한 느낌을 표현한 의성어에서 가져온 말.
미야자키는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잊혀지지 않을 사랑스런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올해 67살의 할아버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려는 듯하다. 사랑은 나를 변화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며, 결국 세상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18일 개봉.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대원미디어 제공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대원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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