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김지석의 앎과 함
“어젠다(의제)가 없다.…미국이 무엇을 했으면 하는 것인지 자신들의 견해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얼마 전 ‘월가 점령’ 시위대를 향해 한 ‘애정어린 충고’다. 그의 말대로 지구촌 곳곳에서 불만은 넘쳐나지만 새 체제의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런 딜레마는 기존 경제·사회 체제를 유지하려는 쪽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여러 정부가 부채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보듯이 긴 시야는 없고 그때그때 임기응변할 뿐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4.0’이란 용어가 상당히 퍼져 있다. 영국 언론인 아나톨 칼레츠키가 지난해 펴낸 <자본주의4.0>에서 쓴 말로, ‘21세기형 자본주의’의 진로를 제시한 것처럼 포장되기까지 한다. <자본주의4.0>이 흥미로운 책임은 분명하다. 지난 30년가량의 시기를 자본주의3.0으로 지칭하고, 이 시기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시장근본주의를 비판한 뒤 새 경제체제로 자본주의4.0의 밑그림을 제시한다. 하지만 한계도 뚜렷하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이념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니 기존 체제의 비판에서부터 철저하지 않다.
자본주의4.0이 기대는 것은 이른바 ‘민주적 자본주의’, 그 가운데서도 미국·영국을 중심으로 한 금융지향적 자본주의인 앵글로색슨 모델이다. “1980년대에 도입된 금융 주도의 글로벌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는 건전하지만 변화하는 여건에 맞춰 진화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간주하는 것”이 핵심이다. “역설적이게도 금융위기 때문에 미국은 다른 민주국가들에 대해 정치적 모델과 지도자로서 매력이 더 커졌다”는 것도 주요한 전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근본주의와 함께 금융 자본주의, 정치적 신보수주의 등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 책은 시장근본주의만을 도마에 올린다. 이 책이 자본주의3.0에 대해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자본주의4.0은 신자유주의의 중요 내용을 계승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체제의 속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상하게도 이 책 한국판의 부제는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돼 있지만 말이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동행하는 세계 체제로서 민주적 자본주의는 2차대전 이후 서구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듯이, 1인1표가 아니라 1주1표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적이지 않다.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를 민주적 자본주의라고 치켜세워서는 몇해째 계속되는 경제위기조차 해결하기 어렵다.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시기가 있었다면 서구 각국이 복지국가를 발전시켜나갔던 1950~60년대가 가장 가까울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함께 가는 관계라기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교정하면서 이끌고 가야 하는 관계다. 곧, 민주주의가 앞서가야 민주적 자본주의의 가능성도 커진다. 지금 얘기해야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후속편이 아니라, 좀더 확실하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견인하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자체가 민주화할 수 있는 경제·사회 체제다. 콘텐츠평가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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