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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작가회의 개편 뒤 홀가분해 광안리 밤바다에 뛰어들었지

등록 2014-12-07 19:29수정 2015-04-27 22:17

왼쪽부터 이호철 소설가, 유시춘 소설가.
왼쪽부터 이호철 소설가, 유시춘 소설가.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④ 유시춘이 묻고 이호철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두번째 주자인 원로 소설가 이호철(왼쪽) 선생과 유시춘(오른쪽)씨가 회고한 60~70년대 문인운동의 전사와 작가회의 창립의 배경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달 26일 고양시 벽제 선유동 이호철 선생의 집필실에서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다.

이어 시인 고은-김형수,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87년 초 ‘박종철 고문치사’ 직후
전두환이 되레 ‘4·13 호헌선언’ 하자
자실은 ‘문학인 193인 견해’ 발표
각계 선언의 물꼬를 트게 됩니다

톨스토이·체호프·고리키 없이
20세기 러시아가 존재했겠는가
문학의 엄숙함과 힘이 있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출범 13년 만인 1987년 9월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했다. 자실의 대표로서 ‘6·10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던 이호철은 7월 사의를 표명하고, 백낙청·신경림 등과 김정한 선생을 새 회장으로 추대했다.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총회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출범 13년 만인 1987년 9월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했다. 자실의 대표로서 ‘6·10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던 이호철은 7월 사의를 표명하고, 백낙청·신경림 등과 김정한 선생을 새 회장으로 추대했다.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총회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유시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출범과 문인 간첩단 사건의 와중에도 1976년 선생님께서는 일본 소설을 여러 권 번역해 냈지요. 다니자키 준이치로 <춘금초>, 엔도 슈사쿠 <바다와 독약>, 아베 고보 <타인의 얼굴>등등. 선생님께서 적확히 지적하셨듯이, 대체로 이 작품들은 사소설 형식과 에로티시즘 미학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중과 현실로부터 괴리를 유도하는 문학들인데 유신 암흑기에 이런 일본 소설의 번역에 공들인 게 저로서는 좀 의아했습니다.

이호철 격랑 속에 있었지만 나는 늘 문학을 떠나지 않았어요. 일본 문학 하면 떠오르는 하이쿠는 그 형식과 내용이 작고 섬세하고 예쁘지요. ‘칼의 문화’가 오랫동안 일본 상층부를 지배한 것에 비해 군국주의가 일본인의 일상을 지배하지는 않은 거 같아요. 그런 일본 문학에 끌린 점이 있지요. 나는 천생 문인입니다. 늘 애 같고요. 문학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격랑의 와중에 내가 혹여 비문학적이 될까봐 늘 스스로 경계했습니다.

군국주의가 세계를 대참화 속으로 처넣던 시기에 일본에는 이를 번민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의 움직임이 전무했습니다. 작가들도 오락으로서의 문학, 에로티시즘 대중문학 일색 아니었습니까? 우리에게 ‘이수일과 심순애’로 알려진 작품들과 ‘감각의 제국’류들, 나중에 할복자살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일본식 죽음을 선택하는 미시마 유키오 등의 탐미주의 막장 등이 그렇습니다. 파시즘 창궐에 저항한 독일의 지식인운동과는 너무 대비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일본은 공산당, 사회당이 제도권 안에 있지요. 그리고 일본인의 삶이란 게 원래 좀 자잘합니다. 좌파가 지니는 진지함, 엄숙주의 이런 걸 싫어해요. 도쿄대 수재 출신의 부잣집 아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책임감 때문에 좌파운동 하면서도 진보진영의 진지·엄숙주의를 경멸하더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가 다시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세계사의 흐름에 반하는 일이잖아요?

78년 지학순 주교의 원주에서의 김지하 시인 석방 기도회, 79년 10·26 직후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식’ 등 여러 사건을 거쳐 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되셨지요?

80년 5월15일은 유신체제는 무너졌지만 새 체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안개정국에 불안을 느낀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계엄 해제와 민주화 일정을 요구한 날입니다. 그날 대법원 기자실에서 ‘지식인 134인 시국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튿날 오후 7시 자주 가던 청진동 남산집의 자실 임시모임에 갔다가 바로 그날 밤 자정 중앙정보부로 끌려갔지요. 지하실에서 2개월간 붙들려 있었는데 정말 모진 고통을 겪었습니다. 7월13일, 두 달 만에 하늘을 보았죠. ‘서울구치소 9사 상37 방’에 수감되었어요. 영문도 모른 채 계엄법을 위반했다며 군사재판을 받았지요. 그러다가 11월4일 한완상·서남동·심재철 등과 함께 풀려나왔습니다. 이 사건은 2012년에야 재심을 거쳐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문인 간첩단 사건’도 그때 재심을 거쳐 무죄 판명되었고요.

86년 11월11일 민통련 해산명령에 따라 경찰이 사무실에 난입하던 날, 저도 마침 그 현장에 있었는데 선생님과 김정환 시인을 반가이 뵈었습니다. 자실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김 시인은 며칠 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지요. 그러다 87년이 시작되자마자 1월초 일상화된 국가폭력에 의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납니다. 민주화 세력이 연대해 투쟁 대오를 갖추기 시작하자 전두환은 되레 ‘4·13 호헌 선언’을 하지요. 이때 자실은 재빨리 ‘4·13 조치에 대한 문학인 193인의 견해’를 발표해 이후 들불처럼 번지게 되는 각계 선언의 물꼬를 트게 됩니다. 한편으로 매우 부끄럽게도 문인협회가 앞장서서 그 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을 낸 직후였습니다.

1986년 11월8일 민통련이 당국의 해산명령을 받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비롯한 24개 민주화 단체들은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에 있는 중앙본부 사무실에 모여 농성과 함께 대책 마련에 나섰다. 사진은 그때 자실의 사무국장으로 농성에 참여한 김정환(맨 왼쪽) 시인의 모습.  사진 박용수 작가
1986년 11월8일 민통련이 당국의 해산명령을 받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비롯한 24개 민주화 단체들은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에 있는 중앙본부 사무실에 모여 농성과 함께 대책 마련에 나섰다. 사진은 그때 자실의 사무국장으로 농성에 참여한 김정환(맨 왼쪽) 시인의 모습. 사진 박용수 작가
그때 채광석, 이영진이 성명서의 초안을 잡았을 것이고, 내가 이를 최종 검토한 것 같습니다. 누구도 아무런 이견이 없었습니다. 이영진이 구속된 김정환 후임으로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 5월25일, 드디어 6월항쟁의 지도 구심이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뜹니다. 나는 문인으로 공동대표를 맡았고 이 사무국장이 상임집행위원에 합류했지요. 당시 유시춘씨가 인재근씨와 함께 열심히 상임집행회의를 진행하던 기억이 나요.

국민대회 날인 6월10일을 사흘 앞두고 국본 임원들이 모두 가택연금을 당해서 나는 6월7일부터 꼼짝 못했어요. 막상 10일 저녁에는 문화센터 강의를 하러 간다 했더니 형사 두 명이 대동해서 중앙일보사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오고 가는 길에 시내 상황을 보고 정말 눈을 의심했습니다. 전장이었지요. 믿기지가 않았어요.

6월11일, 대책회의 뒤 공동대표들이 조를 짜서 사무실을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14일에 김상근 목사, 한승헌 변호사와 함께 박형규 목사 등 구속된 국본 임원들을 면회하러 갔는데 그때 유시춘씨도 구속자 명단 13명 중에 들어 있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저 역시 문인인지라 주로 성명서 작성, 6·10 국민대회를 국민에게 알리는 홍보 업무를 맡았습니다. 6월항쟁이 폭발로 치닫자 국본은 6월16일을 2차, 6월26일을 3차 총궐기일로 정했는데요, 이때 계엄령 풍문이 파다했지요?

당번일인 6월18일 사무실로 갔는데 내 강의를 듣던 최아무개 준위로부터 며칠간 피신해 있으라는 다급한 연락을 받았어요. 친구 서기원이 도와줘서 팔당으로 피했는데 20일 아침 총리 담화를 듣고서야 계엄령은 일단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귀가했지요. 훗날 최 준위에게 확인해보니, 80년 5·17 때처럼 87년 6월18일 밤 체포 대상자 명단 가운데 문화계 인사 맨 첫번째로 이호철이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연락을 했다더군요.

문학인이 불의한 체제에
저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문인은 현상 꿰는 밝은 눈 지녀
후배들이 좀더 현실 직시했으면

실제로 그 뒤 여러 증언과 정황을 보면 6월 중순 전두환 신군부에서 계엄령을 검토한 것은 사실이었고, 또 미국이 모종의 협상과 압박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즈음 미 행정부 요원들의 한국 출입이 부쩍 빈번했고, 6월항쟁 이후 미국의 하원청문회에서 아·태지역 담당자가 6·29 선언을 가리켜 ‘미국 평화외교의 결실’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계엄령 선포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으로 봐야 옳습니다. 6월 한달 내내 우리 국민이 보여준 힘이 전두환이 구사할 수 있는 군경 등의 물리력을 합한 총합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6월항쟁 직후 자실은 조직의 재편을 준비합니다. 그 계기가 무엇인지요?

1960년대 ‘창작과 비평’의 필진 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거시기 산악회’는 80년대 들어 해직과 탄압 등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낭인 생활을 하게 된 지식인들이 합류해 시대의 양심을 상징하는 모임이 됐다. 사진은 2004년 근교 산을 함께 오른 거시기 회원들로, 고 이돈명 변호사(앞줄 맨 가운데), 이호철 작가(오른쪽 둘째), 백낙청 교수(뒷줄 맨 오른쪽) 등이다.  이호철씨 제공
1960년대 ‘창작과 비평’의 필진 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거시기 산악회’는 80년대 들어 해직과 탄압 등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낭인 생활을 하게 된 지식인들이 합류해 시대의 양심을 상징하는 모임이 됐다. 사진은 2004년 근교 산을 함께 오른 거시기 회원들로, 고 이돈명 변호사(앞줄 맨 가운데), 이호철 작가(오른쪽 둘째), 백낙청 교수(뒷줄 맨 오른쪽) 등이다. 이호철씨 제공
한달 동안 뜨거웠던 열기는 6·29 선언과 함께 급속히 잦아들었습니다. 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국민들 역시 생업으로 복귀했지요. 민주화 일정에 대한 기대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7월2일 열린 자실 운영위 회의에서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뭔가 임무를 다한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소나기 퍼붓고 번개 치는 길을 걸어 혼자 공덕동 우체국까지 걸어가 450명 회원들께 보내는 편지봉투의 우표를 직접 붙이며 씁쓸했었지요.

8월 말께 자실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개편하는 의제를 놓고 여름비에 푹 젖어 가면서 거시기 산악회의 백낙청, 조태일 등과 함께 산에서 여러차례 의논했어요. 그리고 신경림과 같이 부산으로 갔습니다. 김광일 변호사, 윤정규, 임수생 등을 만나서 함께 요산 김정한 선생을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첫 대표가 결정되었습니다. 너무 홀가분해서 그 즉시 광안리 밤바다에 뛰어들었는데 여름 끝자락의 바다가 몹시 차가웠어요. 이제 문학인들이 ‘운동’이 아니라 ‘문학’으로서 존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동문학이 대두하고 그 세력이 확장되고 논쟁이 격발되는 것을 보면서 그곳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많이 알려진 대로 50년 12월, 주머니에 찔러 넣은 막심 고리키의 문고본 에세이 한 권이 유일한 재산이었던 19살 소년이 원산을 ‘탈향’해 단신 월남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전쟁 중에 부두 노동자, 미군부대 경비원을 전전하면서도 문학에 입문해 70~80년대 정치적 격랑의 중심에 계셨습니다. 격렬한 문학논쟁도 겪었습니다.

내 삶이 시대의 격랑에 휩쓸렸던 이유를 스스로 진단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천진난만’한 내 본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평소 계산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이건 틀렸다, 아니다 싶으면 그 이외의 것은 잘 볼 줄 모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작가는 특히 천진난만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현상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권력을 탐하지 않아도 힘을 갖게 됩니다. 나는 천생 문인입니다. 문학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내가 혹여 비문학적이 될까봐 늘 스스로 경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시간상으로는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내 문학의 성채 같은 게 있어서 결코 침범당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문학의 시대가 저물어버렸다는 자조도 있습니다만, 마무리로 자실 40년에 대한 자평과 후배 문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가령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러시아를 생각해봅시다. 아무리 차르 체제였다지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고리키, 체호프 없이 러시아가 존재하겠는가요? 그들이 없으면 러시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러시아라는 나라의 존재와 수준을 규정합니다. 자본이나 사회과학이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문학의 엄숙한 영역과 힘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가끔 일제시대 카프 문인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슬픕니다. 그 대부분이 빼어난 재능과 성실성에도 불구하고 삶이 비극적이었습니다. 민족의 자산인데 큰 손실이라고 봅니다.

문학인이 불의한 체제에 저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실을 태동시킨 유신독재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구요. 특히 7·4 남북공동성명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과 같은 좋은 주제를 남북 모두 독재 강화의 수단으로 삼았으니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어요. 자실은 어느 문명사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집단적 저항과 문학적 실천을 해냈습니다. 역사가 기억할 만합니다. 젊은 후배 문인들이 좀 더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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