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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2005년 북서 남북작가회의…문인들 남북관계 더 관심 갖길”

등록 2015-01-04 19:57수정 2015-04-27 22:16

왼쪽부터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겸 문학평론가, 임홍배 서울대 교수.
왼쪽부터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겸 문학평론가, 임홍배 서울대 교수.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⑧ 임홍배가 묻고 백낙청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들려준다.

네번째 주자로 문학평론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임홍배 서울대 교수가 대담 2회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편, 남북작가대회,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교류와 작가회의의 방향 등을 들려준다. 사진은 두 평론가가 지난 26일 서울 서교동 인문학 카페 창비에서 만난 모습이다.

이어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자실’ 6월항쟁 뒤 ‘작가회의’로
89년초 남북작가회담 하기 위해
임진각으로 가다 문인 26명 연행
환갑 고은 선생만 구속돼 참담

2005년 남북작가회의 북서 열려
‘황진이’ 쓴 홍석중 작가 재회
김정일과 형제처럼 자란 배경
‘장군님이 쓰라 하셔 썼다’ 강조

전세버스를 타고 임진각으로 가던 남쪽 대표단 등 작가회의 회원 26명은 버스째 마포경찰서로 연행됐다. 3월29일 김규동(왼쪽부터) 고문, 고은 단장, 백낙청 부회장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세버스를 타고 임진각으로 가던 남쪽 대표단 등 작가회의 회원 26명은 버스째 마포경찰서로 연행됐다. 3월29일 김규동(왼쪽부터) 고문, 고은 단장, 백낙청 부회장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임홍배 198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재건에 관해 말씀해주시죠.

백낙청 79년 ‘10·26’ 전에 이미 자실이 굉장히 약화돼 있었고, ‘5·17’ 이후 거의 와해상태였어요. 고은 선생은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구속됐고, <창비>도 폐간되고, 이문구·박태순은 감시가 심해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였죠. 그런 상황에서 채광석, 김정환 등이 나서서 자실 개편 논의를 시작했고, 젊은 세대가 앞 세대와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84년 12월에 그 방향으로 개편됐죠.

그 3년 뒤 ‘6월항쟁’ 지나서야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출범했지요?

자실 개편 때 문인단체의 특성을 살려 선후배가 함께하는 조직을 만들었기에 87년 6월항쟁 과정에서 한몫을 했다고 봐요. 항쟁의 성과로 새로운 공간이 열렸을 때 투쟁 일변도가 아니라 좀더 범문단적 포용력이 있는 단체를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87년 9월에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탄생한 거죠.

작고하신 김정한 선생님을 초대 회장으로 모셨지요?

70년대부터 자실운동을 주도한 분은 고은 선생인데, 고 선생은 80년대 들어와서 작품세계가 유연하고 풍성해졌음에도 여전히 강성 싸움꾼 이미지가 강했어요. 그래서 결국 요산 김정한 선생을 모시기로 의견이 모아졌지요. 하지만 요산 선생은 부산에 계신데다 워낙 건강이 안 좋으셔서, 고 선생이 부회장을 맡아 실질적인 회장 노릇을 하셨고, 나도 부회장으로 뒷받침을 했지요.

그래서 89년 초 남북작가회담 추진할 때 고은 선생님이 총대를 메신 거군요?

그래요. 3월27일에 고은 선생을 비롯해 문인 26명이 버스를 타고 임진각으로 가다가 전원이 버스째 연행돼서 마포서로 왔지요. 처음에는 고은, 신경림, 현기영, 나, 김진경 다섯 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다더니, 결국 고 선생만 구속했어요. 그때 고 선생이 환갑살이 다 됐는데, 그런 분이 구속되니까 참담했어요.

그 무렵 문익환 목사님이 전격 방북을 해서 운동권에서도 논란이 됐는데, 선생님께서 2006년 일본에서 발표한 글에서 그 사건을 재평가하셨지요?

당시 문 목사님 행동에 대해 양론이 있었지요. 하나는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어야 되는데 이분이 몸을 던지신 게 훌륭하다는 거였고, 다른 한쪽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렇게 혼자 나서면 남쪽 사정을 어렵게 하지 않느냐는 거였죠. 내가 재평가한 거는 그분이 그냥 몸 던져 민간교류의 장벽을 돌파한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었고, 남북 당국의 공식 노선도 아닌 제3의 길을 찾는 쪽으로 뭔가를 개척했다고 본 거죠. 그 뒤 나 자신도 남한 민간사회가 남북관계에서 남북 당국과는 또 다른 ‘제3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시각과 일치하는 선구자로서 문 목사님을 평가한 거죠.

96년에는 작가회의 회장을 맡으셨는데, 어떤 일에 가장 역점을 두셨는지요?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돈 끌어대는 일이었어요.(웃음)

1988년 7월2일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남북작가회의를 열자고 북한 쪽에 제안을 했고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89년 3월27일 임진각에서 예비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남북 문인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아현동 사무실에서 남쪽 대표단(김진경·현기영·신경림·고은·백낙청) 일행이 기자회견을 한 뒤 펼침막을 든 채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7월2일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남북작가회의를 열자고 북한 쪽에 제안을 했고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89년 3월27일 임진각에서 예비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남북 문인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아현동 사무실에서 남쪽 대표단(김진경·현기영·신경림·고은·백낙청) 일행이 기자회견을 한 뒤 펼침막을 든 채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우중 회장을 만나 작가회의 기금을 희사받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늘 재정이 쪼들려서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았지요. 작고한 이수인 의원이 마당발로 많이 도와주었고, 당시 김영수 문체부 장관을 만나 기업가를 소개받고 작가회의 사단법인 인가도 받았어요. 그런데 97년 들어 내가 98년에 임기 마치고 그만두려면 돈을 만들어 놓아야 빠져나오겠더라고요. 돈 때문에라도 연임하라는 압력이 만만찮았거든요. 그래서 고교 동문 김우중 회장을 찾아가서 5억원을 받기로 한 거죠. 그해 말 외환위기(IMF)가 터져서 무척 힘들었을 텐데 약속을 지켜줬어요. 그 뒤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김우중 그 친구가 어렵게 됐지만,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일이었고, 김 회장으로서도 좋은 일 했다 싶어요.(웃음) 실은 70년대 엄혹한 시절에도 오래전 작고한 박윤배라고 김 회장과 친한 동창이 다리를 놓아 김 회장이 ‘창비’를 도와준 적이 있어요. 그건 진짜 비밀이었지, 유신 때니까.

2000년 남북 정상의 6·15 공동선언이 나오자 선생님께서는 획기적인 계기로 평가하셨죠.

특히 6·15 선언 제2항에서 통일과정이 점진적일 뿐 아니라 중간단계를 둔다고 명시했는데, 그건 분단국가 통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거든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을 한다면 시민참여의 공간이 열려서, 제3당사자가 적극 참여할 여지가 생기는 거죠.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지금까지 남북 교류가 거의 끊어졌는데, 2009년에 쓰신 글에서는 ‘시간을 벌었다 생각하고 더 열심히 실력을 쌓고 준비해야 된다’고 하셨지요.

시간을 버는 건 좋은데, 너무 많이 벌고 있는 것 같아.(웃음) 이명박 정권이 남북 교류의 흐름을 뒤집어 놓았을 때, 우리가 아직 제대로 못하니 지체를 감내하고, 차라리 시간을 벌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자고 한 거지요. 그런데 박근혜 정권까지 10년을 벌어놨으니, 이젠 문제가 심각해졌어요. 10년 이상 이렇게 가면 회복하기 어렵지 않나,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정말 이제부터는 제대로 준비하고, 적공(積功)을 해서 머지않은 장래에 대전환을 이뤄봐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세월호 참사 이후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공감이 국민들 사이에 형성된 것 같아요.

예, 이번 ‘창비’에 쓰신 ‘큰 적공, 대전환을 위하여’에서 아주 구체적인 현실분석과 전망을 하셨지요. 2005년 3월부터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아 연임까지 4년을 하셨고, 그 무렵 남북 민족작가대회도 열려서 평양과 백두산에 다녀오셨지요?

남북작가대회에서 홍석중(<임꺽정> 작가 홍명희의 손자) 작가도 다시 만났는데, 처음 만난 건 2004년 금강산에 가서 만해문학상을 줬을 때였어요. 개인적으로도 호감이 갔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북 공식 행사에서 원고 없이 발언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그때 백두산 천지에서 홍석중만 원고 없이 바로 얘기하더군요. 그해 8·15 때 서울에도 왔는데, 그 뒤에는 남북 공동 행사에서 안 보였어요. 북쪽 당국에서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닌 듯해요. 그의 작품 <황진이>도 북쪽의 보통 소설과는 다른데,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에서 한마디도 평이 없었다고 해요. 홍석중이 워낙 김정일 위원장과 가까운데, 같이 자랐다죠. 김일성 주석의 첫 부인 김정숙이 사망하고서, 벽초 홍명희의 쌍둥이 딸이 그 집에 가서 미래의 ‘장군님’을 길러줬다고 해요. 그러니까 홍석중·김정일이 형제처럼 자란 겁니다. 그래서인지 홍석중이 ‘황진이’도 ‘장군님’이 쓰라고 해서 쓴 거라고 강조하더군요.

이명박 정권 이후 남북교류 끊겨
박근혜 정권까지 이어져 심각
제대로 준비 남북교류 대전환 꿈
문학인 관심 넓혀 왜소화되지 말길

1988년 7월 남북작가회의를 북쪽에 제안한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이어 12월13일 ‘통일과 문학’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분단 현실 속에서 문인들이 지녀야 할 민족과 통일에 대한 인식을 논의했다. 당시 작가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던 백낙청 교수가 토론회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원식·백낙청·조정환·김명인씨.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7월 남북작가회의를 북쪽에 제안한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이어 12월13일 ‘통일과 문학’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분단 현실 속에서 문인들이 지녀야 할 민족과 통일에 대한 인식을 논의했다. 당시 작가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던 백낙청 교수가 토론회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원식·백낙청·조정환·김명인씨. <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정부가 통일대박론을 앞세우고도 여전히 남북관계가 답답한데요.

근본적으로는 이 정부에 큰 기대를 안 해요. 분단체제라는 큰 틀에서 보면 남쪽에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정부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작게 보면 이명박 정부보다 낫게 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어요. 나는 이 정부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주기를 바라고, 북도 통 크게 응해서 함께 해낼 수 있는 일을 몇 개만 해놓아도 분위기가 확 달라질 거고, 다음 정부가 일하기도 편해지지 않겠나 싶어요.

그나마 다행히 지난 12월25일에 김석철 선생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가건축정책위원회에서 두만강 하구에 남북·중국·러시아가 함께 참여하는 ‘다국적 도시’를 만들자는 제안을 통일준비위원회에 내놓았던데요.

포용정책을 지지하는 분들은 대개 2007년 10·4 선언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을 최우선 과제로 꼽는데, 물론 그건 멋진 구상입니다. 그러나 이게 시행되는 것은 교류협력이 한참 진전된 뒤의 나중 단계가 될 거예요. 북방한계선(NLL)이 걸린 문제거든요. 비유하자면 6·15 공동선언 제2항의 합의 같은 거죠. 거기서 1단계 통일에 대한 원칙적 합의가 나왔기 때문에 3·4·5항의 인도적 문제, 경제 문제 등의 진전이 가능해졌지만, 이들 분야의 진전이 어느 정도 되고 나서야 2항의 합의가 진척될 수 있는 것이죠. 나는 10·4 선언의 평화특별지대 합의도 그런 성격이라고 봐요. 현재 엔엘엘을 둘러싼 갈등이 제일 골치 아픈 쟁점인데, 여기에 대해 큰 틀의 합의를 전제로 실행을 위한 접촉을 시작해서 진행하면, 그게 몇 년 걸릴지 모르지만, 그사이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가능해진다는 말이죠. 그것 때문에 다른 문제가 막히는 상황을 타개한 셈입니다. 그렇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그것만 하면 서해 충돌도 안 일어났을 것이고 한반도 평화가 되고 다 좋은데’라고 주장하면, 아니 그걸 누가 몰라요? 그거야말로 제일 어려운 일이거든요.

1966년 1월 백낙청 교수가 창간한 <창작과 비평>은 시국 상황에 따라 강제폐간과 복간의 수난 속에서 진보담론의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다. 88년 2월 김윤수 주간과 백낙청 편집인이 ‘창비’ 복간을 알리는 현판을 다시 걸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6년 1월 백낙청 교수가 창간한 <창작과 비평>은 시국 상황에 따라 강제폐간과 복간의 수난 속에서 진보담론의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다. 88년 2월 김윤수 주간과 백낙청 편집인이 ‘창비’ 복간을 알리는 현판을 다시 걸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니까 그러기보다는 두만강 하구 구상 같은 것이 러시아와 중국을 끌어들일 수 있고, 또 남쪽에서 보면 개성공단하고 달라서 북한의 주권에 전속된 구역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남쪽 정부도 부담이 적고, 북으로서는 기왕의 나진·선봉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두만강 하구 개발의 하나로 훨씬 확대하고 실리를 키울 수 있으니 매력적이죠. 미국이나 일본 자본도 끌어올 수 있고요. 상당히 현실성이 있는 구상이라 봅니다. 나는 문학인들도 이런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문학 하는 내가 뭘 그런 것까지…’ 하며 포기하는 건 문학을 왜소화하는 태도지요.

예, 실은 자실 창립부터 작가회의에 이르는 과정도 문인들이 종래의 좁은 틀을 깨고 문학의 폭을 넓혀온 거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작가회의의 앞날과 관련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자실 개편 직후 ‘민족문학과 민중문학’ 강연에서 한 얘기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작품의 생산에 헌신적이고, 좋은 작품과 덜 좋은 작품, 또 아주 좋지 않은 작품을 가리는 데 있어서 공명정대한 문인들의 모임이 되어야겠습니다.”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는 좀 무리한 주문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의 한국작가회의야말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 지금은 많은 회원들에게 절실하게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소중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사진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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