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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무기의 그늘’ 일본 출판기념회 핑계로 출국 뒤 평양으로

등록 2015-02-01 21:12수정 2015-04-27 22:02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⑫ 정도상이 묻고 황석영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여섯번째 주자로 작가 황석영(오른쪽)과 정도상(왼쪽)이 1989년 방북 사건을 중심으로 두번째 회고담을 들려준다. 사진은 두 소설가가 지난 2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황 작가의 자택에서 만난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왼쪽부터 정도상 소설가, 황석영 소설가.
왼쪽부터 정도상 소설가, 황석영 소설가.

1988년 독일서 윤한봉 만나
세계평화대회 얘기 듣고 방북 결심
‘불고지죄’ 어찌할까 고민 끝에
민예총 김용태하고 꾀를 내서
“문화교류 위해 방북하기로 했다”
술자리에서 맨날 떠들고 다녀

1989년 이와나미출판 도움으로
재일총련 통해 방북 초청장 받아
베이징 도착하니 북 간부 나와
‘껌 안하냐?’며 긴장 풀어줘
‘이제부터 조국 상공입니다’
비행기 안내방송에 울컥

정도상 방북의 첫 구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겁니까? 당시로서는 상상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는데요.

황석영 1988년 독일에서 윤한봉을 만나서 세계평화대회 안을 듣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아마도 내년쯤에는 방북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별로 놀라지 말고 있어라.’ 그때 이미 독일에서 시작이 돼버린 거죠. 그 무렵에 모르긴 몰라도 서경원 의원이며 재외동포들 몇 사람이 북에 비공개로 다녀왔어요. 나중에 서 의원의 방북이 알려져서 공안정국에 크게 활용되지만. 89년엔 문익환 목사와 황석영의 방북으로 시끄러운 바람에 한꺼번에 덮여서 지나갔지요.(웃음)

그런 구상이라는 게 사실은 의지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운동이란 상상을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황 선생님이야말로 상상을 현실로 변화시키는 동물적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황 상상하고 머릿속에 그림만 그린다고 일이 되는 건 당연히 아니지요. 몸을 던져 넣어야 겨우 가능하죠. 내가 독일에서 귀국한 이듬해 일본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무기의 그늘>을 출간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나는 그걸 기회로 본 겁니다.

아, 그러니까 이와나미 덕분에 실행에 옮겨지는 거네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랑 의논을 했더니, 불고지죄라는 게 있잖아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인이 된 민예총의 김용태하고 둘이서 꾀를 낸 게, 와이에스(YS)하고 디제이(DJ)의 코를 같이 꿰자고 했지요.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황석영이 ‘구라’로 알려져 있으니까 ‘허허실실’이라고 허풍을 좀 많이 쳐놓는 것으로 하자고 입을 맞췄지요. 그래서 김상현 의원이 야당 두 거두를 관장하고 있으니까 그를 먼저 만나는 것으로 밀고 나갔지요.

황석영 작가는 1989년 3월 남쪽 문인으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이래 10년 가까이 망명과 투옥의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해 3월20일 도쿄를 거쳐 베이징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단신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황 작가가 초청자인 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서 마련한 환영식에서 화동에게 꽃다발을 받고 있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황석영 작가는 1989년 3월 남쪽 문인으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이래 10년 가까이 망명과 투옥의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해 3월20일 도쿄를 거쳐 베이징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단신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황 작가가 초청자인 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서 마련한 환영식에서 화동에게 꽃다발을 받고 있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저도 기억이 나는데요. 인사동의 어느 술집에서 선생님께서 방북 계획을 적나라하게 틀어놓으셨어요. 그때, 평양에 간다면 몰래 가야 할 텐데 저렇게 떠들고 다녀도 가능할까 싶었죠. 지금 말씀을 들으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 더구나 ‘용태 형님’하고 둘이 상의해서 짰으면 관객 천만이 들어도 될 만한 각본이 나왔을 텐데 그걸 누가 당하겠습니까?

그때는 밥집이 다 요정이었어요. 가봤더니 김상현 의원이 쫙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같이 먹고, 그때 와이에스와 디제이한테 전화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아니, 형님만 알고 계시라고 그랬더니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더니 ‘나만 알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많이 해봐서 아는데, 아우님들, 이거 이렇게 하는 게 아냐’ 그래요. 그러더니 누가 오기로 했다고 기다리라는 겁니다. 좀 있으니까 슬리퍼 바람으로 이종찬 의원이 들어와요.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잖아요. 김 의원이 술을 한잔 마시더니, ‘어이, 황 형, 그거 얘기 좀 해드려’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별건 아니고요. 제가 이번에 평양을 좀 가볼까 합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 ‘그게 무슨 얘기요?’ ‘남북 교류, 문화인 교류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번 가보려고요.’ ‘아, 가보려고? 당국의 허가는 받았나요?’ 그래. ‘물론 받아야죠’ 그랬더니, ‘아, 거 민족적으로 좋은 얘깁니다.’ 그래서 또 우리도 ‘아, 정말 민정당에서 민족적으로 좋은 역할을 해주셔야 됩니다.’ 막 그렇게 나갔지요. 김용태도 옆에서 설레발을 치고. 그렇게 술을 잘 먹고 나왔어요. 그러고선 민예총에는, ‘황석영 선생이 문화교류를 위해서 방북하기로 했다’고, 공식화까지는 아니지만 술자리에서 맨날 떠들었지요. 그랬더니 금방 소식이 와요. 안기부 담당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황 선생님, 집에 가 봐도 됩니까?’ 그래서 오라고 했어요. ‘아니, 평양에 가신다는 얘기가 뭡니까?’ ‘별거 아니고, 당신네들한테도 얘기를 하려고 했지. 내 <무기의 그늘>이라는 책이 일본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나온다고 해서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어요. 거기에 가려는데, 당신네들이 허가를 좀 해주쇼. 평양에도 좀 가보려고.’ ‘아, 좋은 일이죠. 그런데 저희하고 협의를 해야죠.’ 그래서 내가 거기 총련에 초청을 해달라고 해서 초청장을 받으면 당신네들하고 협의를 하겠다고 말했지요. ‘아, 그러면 뭐. 좋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지요. 그래서 보따리 싸갖고 나갔어요.

방북 직후 귀환했던 문익환 목사와 달리 독일·미국 등지에서 망명객으로 떠돌며 통일운동을 펼치던 황 작가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자진 입국했다. 하지만 그는 93년 4월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됐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방북 직후 귀환했던 문익환 목사와 달리 독일·미국 등지에서 망명객으로 떠돌며 통일운동을 펼치던 황 작가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자진 입국했다. 하지만 그는 93년 4월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됐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그래 놓고 바로 가버리신 거예요?

내가 제비처럼 날래잖아요. 바로 가버린 거지요.(웃음) 일본에 도착해서 정경모 선생한테, ‘내가 이번에 평양에 가려고 합니다’ 하니까, ‘평양에 간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가나?’ 그래요. 자기는 작년에 갔다 왔고, 고등어구이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별놈의 얘기를 다 하는 겁니다.(웃음) 그러더니 ‘사실, (문)익환이 형이 나오시기로 했어’ 그러는 겁니다. ‘언제요?’ ‘지금 아마 틈을 보고 있을 거야.’ 나중에 보니까 나하고 보름 차이예요. 가만히 보니 정경모 선생이 아주 들떴더라고요. ‘한 손에는 문익환, 한 손에는 황석영을 쥐고 가면 말이 되는 거지, 우리가’ 이러면서요.

북에는 선생님이 먼저 들어가신 거죠?

그랬지요. 정경모 선생이 원래 여운형 노선이에요. 좌우합작 노선. 중립파. 그걸 실행하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이렇게 가면 안 되겠더라고요. 문익환 목사는 처음부터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남쪽의 연합제 안과 북쪽의 연방제 안에 대한 정치협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나는 그건 ‘정치적 틀’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거기에 흡수되면 안 되는 거죠. 문화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할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겁니다. 우리 문화계나 문학의 독자적인 역할을 위해서는 그 점을 고려해서 처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 이건 분리해서 합시다. 저는 따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일본 작가들과 협의를 했어요.

일본에 그런 문제를 협의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많습니다. 문학평론가 이토 나리히코 교수라고, 도쿄대 독문학과 시절에 대학신문 편집장을 했던 사람인데, 로자 룩셈부르크를 전공한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이토 나리히코와 가까운 사람이 사회당 총재 도이 다카코 의원입니다. 둘이 오누이처럼 친해요. ‘어떻게 라인을 정하면 좋겠냐?’고 이토 교수가 물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것을 풀었죠. 비공개적으로는 이와나미의 야스에 료스케 선생이, 공개적으로는 도이 다카코 사회당 총재가 책임지는 쪽으로 하자. ‘목적은?’ ‘남북 문화교류입니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야스에 료스케 선생님이 그 유명한 ‘티케이(TK)생,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신 분이죠?

그렇지요, <세카이>(세계)지의 주간을 맡아서 한국의 독재시대 내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했지요. 내가 85년 말에서 이듬해까지 6개월 동안 일본에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미 야스에 선생과는 여러번 만나면서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스에가 총련에 연락하여 방북 초청장이 나오도록 도왔지요. 그리고 중국과 협조해서 중국대사관에서 통관비자를 금방 내주었고요. 도쿄를 떠나기 전에 사회당 당수 도이 다카코의 방에 가서 기념사진도 촬영했어요. 그게 도이 총재와 협의해서 나를 보냈다는 식의 기사로 나간 거지요. 그래야 전세계의 사회당이 있는 나라들로부터 협조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여튼 베이징에 도착하니까 그 촌스러운(웃음) 통전부 과장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내가 긴장할까봐, 자기도 자본주의 세계를 안다 이거야. ‘껌 안 합니까?’(웃음) 그러고 서 있더라고요. 그 친구랑 호텔에서 이틀을 묵고 북으로 들어갔지요. 비행기 안에서 ‘아나운스멘트’가, ‘이제부터 조국의 상공입니다’ 하면서 음악이 나오는데, 바깥을 내다보니까 서해안 바다에서부터 평안도 일대 산과 땅까지 쫙 보이는 겁니다. 가슴이 울컥하더라고요.

 국외 체류하며 5차례 북한을 오가며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쪽 대변인으로 활동한 혐의로 8년형을 받은 황 작가는 5년 만인 98년 3·1절 특사로 석방됐다. 당시 공주교도소 앞에서 풀려나온 황 작가가 마중나온 고은 시인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국외 체류하며 5차례 북한을 오가며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쪽 대변인으로 활동한 혐의로 8년형을 받은 황 작가는 5년 만인 98년 3·1절 특사로 석방됐다. 당시 공주교도소 앞에서 풀려나온 황 작가가 마중나온 고은 시인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진 작가회의 제공
얼마 전에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에서 떠도는 이야기꾼의 생애에 대해 말씀하셨죠. 사실 작가는 나그네인데요. 선생님의 평양 방북은 나그네가 고향을 떠나 떠도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과 북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서본 것은 작가로서는 귀중한 체험이었지요. 꽤 오래전부터 내가 남과 북이라는 분단이 주는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앞으로 문학도 시원스럽게 해내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내게 자유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살아온 인생 체험 자체라고 해야 될 겁니다. 어려서부터 전학 많이 다니고, 노동자 구역의 공장지대에서 혼자 놀고, 사춘기 때는 퇴학 맞고, 쫓겨났다고 생각하면서 중심부에 안 들어가는 거지요. 중심부에 들어가면 내가 못 견디거든요. 그러니까 늘 바깥에 있고, 바깥에 있으면서 저 안을 그리워했던 거죠. 그게 이야기꾼 나그네의 숙명인 거죠.

보름 뒤 문익환 목사가 와
공개 환영행사 진행하는 동안
비공개 초대소서 꼼짝도 못하다
김 주석 만나러 갈 때야 서로 대면

1993년 4월 황석영 작가가 방북 활동 때문에 구속되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8월5일 ‘작가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를 결성해 98년 풀려날 때까지 줄기차게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진 박용수 작가 제공
1993년 4월 황석영 작가가 방북 활동 때문에 구속되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8월5일 ‘작가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를 결성해 98년 풀려날 때까지 줄기차게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진 박용수 작가 제공
게다가 페레스트로이카 직후라 세계사가 요동을 칠 때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냉전체제가 해체되는 ‘움직이는 세계’의 복판을 가로지른 거예요. 숨은 이야기가 참 많을 텐데요.

나는 순안 근처에 있는 비공개 초대소에 있었어요. 그런데 문익환 목사가 왔다고 지도원이 알려주더라고. 잘됐다고 박수를 쳤어요. 문 목사의 대대적인 환영행사와 스케줄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꼼짝도 못했어요. 비공개니까 뒤에서만 문인들을 만나고 공식적인 집회에는 일체 못 가는 겁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갈 때는 같이 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서로 대면한 거지. 나는 문 목사를 평양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문 목사가 떠나는 날이 돼서 당일 아침에 연락을 해왔어요. ‘서로 말이나 맞추고 헤어지자.’ 그래서 대동강 초대소로 나갔지요. 거기는 외국의 수반들이 머물던 곳이지요. 김 주석이 문 목사를 외국의 수반 정도로 대접해드린 겁니다. 가보니 대동강 물이 내려다보이는데 조선식 정자가 하나 있고, 난간에 문 목사가 걸터앉아 있다가 막 손짓을 하더라고요. 곁으로 갔더니 ‘내가 시를 하나 지었어’ 그러면서 뭘 쓴 걸 보여주려고 합디다. 그래서 ‘아, 직접 읽으시지요’ 그러자 목청을 돋워 즉흥적으로 낭송을 하는 거예요. 그 양반 정말 호방한 로맨티시스트입니다. 지금도 가끔 그리운 분이고요.

제가 알기로는 문 목사나 김 주석이나 언어에 대해 좀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겨레말큰사전> 사업을 위해 어떤 책을 보니까 김두봉이었던가, 하여튼 누가 순우리말 사용을 주장해요. 가령, 이화여대를 ‘배꽃 계집 큰 배움터’라고 하자는 식으로요. 거기에 김 주석이 반대를 하는데 그 이유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두 가지였던 것 같은데, 하나가 남북이 막혀 있어서 어느 한쪽이 언어를 과도하게 바꾸면 민족 내부의 단절이 심해진다는 취지예요. 더욱 뜻밖인 것은 또 다른 이유였는데, 언어는 곱기만 하다고 되는 게 아니라 소통의 기능이 우선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때 김 주석이 이런 얘기도 하더라고. “함경도 말에는 여진 말이 많이 섞여 있지 않은가. 우리말에는 풍부한 어휘가 있는데도 이것을 잘 사용하지 않아 잊어버리니까 그것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서 우리말을 되살려내는 것이 소설가가 해야 될 큰일의 하나”라고요. 그래서 내가 여진 말의 예를 물었더니 주을온천의 주을이라는 말이 원래 ‘뜨거운 물’이라는 뜻을 가진 여진 말이라는 겁니다. 또 아오지탄광의 아오지도 ‘불붙는 돌’이란 뜻의 여진 말이라고 합디다. 문 목사야 시인이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최고위급 정치인이 언어란 원래 그렇게 섞이면서 발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허락된 지면이 꽉 차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요. 언젠가 다시 듣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오늘은 여기서 마치는 것으로 하죠.

그럽시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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