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시 작업실에서 ‘고바우 십장생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김성환 화백. 사진 남은주 기자
4칸짜리 세상에서 45년을 살았던 고바우 영감이 불로장생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27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서울 가나 인사아트센터에서 십장생도와 고바우 영감이 어우러진 그림 80여점이 걸린다. ‘고바우 십장생도전’에서 새로운 고바우 영감을 세상에 내놓는 김성환(83) 화백을 경기도 성남시 구미동 자택에서 만났다.
가끔은 버젓이 병풍이나 족자에 걸리기도 했지만 옛적부터 십장생도는 주로 집 벽이나 창문에 붙여둔 서민과 가장 가까운 그림이었다. “본래 오래 살기를 비는 축수용 그림이었잖아요. 돈 많든 권세가 있든 누구나 속상한 일이 있을 거에요. 그럴 때 보면서 마음이 풀어지라고 그렸어요.” 2012년부터 올해 초까지 3년동안 그려낸 그림에선 소나무, 구름, 불로초, 거북 같은 장생의 상징들과 고바우 영감이 유유자적 한 화면에서 노닌다. 어머니를 닮은 구름이 이들을 품고 있다. 담백한 진서체를 좋아하는 화가는 여기에 ‘가화만사성’이나 ‘소문만복래’ 같은 쉬운 덕담들을 얹었다. 누구나 알아보기 쉽고, 슬며시 웃을 수 있는 이런 그림은 말하자면 김성환 화백이 빚어낸 21세기풍 민화인 셈이다.
45년 연재 끝내고 다시 화가로
십장생도 풍경속 영감 ‘유유자적’
“속상할 때 보면서 마음 푸시길”
김성환 화백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고바우 십장생도’ 중 하나.
고바우 영감은 김성환 화백이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했던 만화 주인공이다. 2000년 9월29일 고바우 영감이 큰 절 하며 물러갈 때까지 여러 신문을 옮겨가며 45년 동안 서민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활약했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를 맞은 시기에 그만 뒀어요. 독일 사회의 표정을 그리고 풍자했던 화가 게오르그 그로스 같은 사람을 보면 그가 나치에 항거할 때 그린 그림은 다 재미있죠. 그런데 미국으로 옮겨가서 마음대로 풍자할 수 있는 여건이 되니까 그림이 전만 못해졌어요. 고바우 영감이 막을 내리게 된 데는 그런 뜻도 약간은 포함됐죠.” 김 화백이 고바우 영감을 신문에서 은퇴시킨 이유다. 중앙정보부와 경찰, 검찰에 불려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며 “밤이 어두울수록 촛불이 환한 법. 칠흑같은 시대를 지났으니 밝은 시대에선 촛불을 끌 필요가 있었다”고도 했다.
만화에 대한 푸대접도 한몫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그리던 시절, 정년이 넘었다고 촉탁직으로 일하라는 거에요. <문화일보>에선 약속받은 연봉이 있었는데 절반을 우리사주조합으로 투자하라 그러지 않나. 경영자는 다 똑같아요. 툭하면 월급을 깎든지 아니면 10개, 20개를 그려내라는 식이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동아일보>를 그만두게 된 데에도 정권의 압력만이 아니라 이 김에 촉탁직으로 옮기라는 회사의 요구도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일찍이 국방부에서 <만화 승리>라는 만화 잡지를 혼자서 만들다가 사환 노릇까지 시키려 하자 외출증 끊어서 그길로 부대를 떠나버렸던 화백의 팽팽한 자존심 그대로다.
그러나 어딜 가나 신랄한 풍자와 통렬한 비판으로 인기를 누렸을 때도 결코 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고 했다. “빈정대기도 했고 무언가에 빗대서 욕하기도 했지만 종교나 특정 학교를 거론하는 풍자는 절대 하지 않았어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거죠.”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 그가 고바우 영감을 계속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신문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 4칸짜리 만화가 시사만화로서 독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연재 횟수 1만4139회로 한국 최장수 시사만화인 고바우 영감의 원화중 6496장은 2013년 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남들은 내가 만화만 그리는줄 아는데 원래 나는 화가였다”는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 은퇴 뒤, 화가로 돌아왔다. 외국여행 할 때마다 그린 스케치 1000점을 다시 화폭에 옮기고 있으며, 판화도 찍어내고 있다. 2001년 후배 만화가들을 위해 ‘고바우 만화상’을 만들었던 그는 한 지방자치단체와 ‘고바우 기념관’도 열 예정이다. 고바우 나이 벌써 환갑이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캐릭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글·사진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