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쇳말로 미리 보는 문화계
2017년이 밝았다. 지긋지긋했던 ‘박근혜의 날들’을 보내고 맞는 ‘송박영신’의 새해, 문화예술계는 어떤 움직임을 드러낼 것인가? 억눌렸던 목소리는 터져나올 것이다. 드라마는 신랄한 풍자를 선보이고, 뮤지션들은 상심한 이들을 위로하며 광장의 경험을 소중히 보듬는 곡들을 발표할 것이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새로운 ‘입’들에 관심이 쏠릴 것이다. 미술계에선 세계적 전시 이벤트들이 올 한해 겹치면서 ‘황금의 해’를 선보일 것이다. 저마다의 취향을 찾아 나선 이들은 ‘나만의 문화’ 춘추전국시대를 만들어낼 것 같다. 또 한번의 격동이 예상되는 2017년 초입, 올 한해의 문화 트렌드를 엿볼 핵심 키워드 10가지를 추려본다. <한겨레> 대중문화팀 기자 전원이 나섰다.
■ 정치의 계절, 시사예능 전성시대 올해도 팝콘 먹으며 뉴스 보자. 지난해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현실에 뉴스 시청률이 치솟았다. 특히 사안을 쉽고 재미있게 분석해주는 이른바 ‘시사예능’의 인기로 <썰전>(제이티비시)은 시청률이 10%에 육박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사가 끝나고, 조기 대선 국면을 맞을 올해는 시사예능의 활약이 더 도드라지겠다. 2013년 시작한 <강적들>(티브이조선) 외에, <채널에이>도 최근 시사예능 <외부자들>을 시작했다. 지상파도 딱딱한 토론이 아닌 캐주얼한 시사프로를 고민하고 있다. 유시민 작가, 전원책 변호사 등 유머 섞어 쫄깃하게 말 잘하는 시사캐스트들도 덩달아 한층 주가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역사테인먼트 한국사 책 최고 판매기록을 세운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무적핑크 작가의 웹툰 <조선왕조실톡>, 다큐멘터리처럼 촘촘했던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 2016년 역사 콘텐츠물을 놀 거리로 만든 역사테인먼트 인기는 어느 해보다도 높았다. 2017년에도 역사테인먼트의 인기는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대장금> 이영애가 주연을 맡은 <사임당, 빛의 일기> <엽기적인 그녀>(이상 에스비에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군주-가면의 주인>(이상 문화방송) 등이 방송될 예정이며, 팩추얼 다큐드라마 역사스페셜은 <한국사기> 편이 잇는다. 류승완 감독 <군함도>, 이준익 감독 <박열>,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 등 영화에서도 역사를 소재로 한 기대작들이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남은주 mifoco@hani.co.kr
■ 드라마 주인공, 거대 권력과 싸운다 2017년에는 ‘한국드라마=멜로’ 공식을 깨보자. 병원에서 사랑하고, 전쟁터에서 연애하던 한국 드라마들이 지난해 <시그널> 성공 이후 장르 다변화를 모색하는 모양새다. 상반기 방영 예정인 11편 중에서 ‘대놓고 연애’는 <엽기적인 그녀>(에스비에스, 5월 예정) 정도다. 장르물이 늘었다. 거대 권력과 싸운다. <귓속말>(에스비에스, 3월 예정)은 국내 최대 로펌 태백을 무대로 돈과 권력의 거대한 패륜을 파헤치고, <군주: 가면의 주인>(문화방송, 5월 예정)은 힘없는 왕세자가 백성들을 위해 거대 막후 조직과 싸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미스터리도 가미됐다. <피고인>(에스비에스, 1월23일 예정)은 사형수가 된 기억상실 검사가 누명을 벗으려고 고군분투하고, <미씽나인>(문화방송, 1월 중)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라진 9명의 행방과 숨은 진실을 파헤친다. 코미디도 연애만 하지 않는다. 회사 경리과장이 부정부패, 불합리와 싸우며 무너져가는 회사를 살리는 <김과장>(한국방송2, 1월25일 예정) 등 가볍지만 묵직하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IT, 오리지널을 탐하다 2017년 영화와 드라마 제작 시장을 흔들어놓을 존재는 바로 넷플릭스·유튜브·아마존 같은 아이티 기업들이다. 새로운 미디어와 통신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들 기업이 자신들만의 영화와 동영상을 제공하는 콘텐츠 경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걸음이 빠른 곳은 지난 1월부터 한국 서비스를 시작한 넷플릭스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 580억원이라는 한국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를 투자한 넷플릭스는 <더 디스커버리>, 마블 스튜디오 등과 계약을 맺고 2017년엔 자체 제작물 공세에 나설 전망이다. 지난해 12월부터 한국에서 프리미엄 서비스를 시작한 구글 유료서비스 유튜브레드는 올해 초 빅뱅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시작으로 자체 제작을 확산하겠다고 밝혔다. 가장 공격적으로 콘텐츠를 확장해온 아마존도 올해에 한국에서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 2017년은 소년!? “당신의 소년에게 투표하세요.” 엠넷은 <프로듀스101> 남자 버전을 진행 중이다. 일반인의 ‘입덕 바람’을 일으키고 걸그룹 열풍을 이끈 <프로듀스101>의 시즌2다. 대한민국 청춘들이 처한 무한경쟁·각자도생의 현실을 잔인하게 축소해 보여주며, ‘픽미’는 세대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또 다른 ‘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래퍼를 발굴하는 엠넷 <고등래퍼>는 오디션이 한창이다. <쇼미더머니> <언프리티 랩스타>에 이은 새로운 힙합 프로그램이다. 진행자로는 정준하와 하하가 결정되었고 1월 편성으로 가닥이 잡혔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 20세기 아이돌의 21세기 컴백 1997년 데뷔한 소녀그룹 에스이에스(S.E.S)가 앨범 <리멤버>를 발표한다. 새해가 밝자마자 더블 타이틀 곡 중 하나인 ‘리멤버’를 선공개하고, 2일 낮 12시 또 다른 타이틀곡 ‘한 폭의 그림’을 포함해 전곡을 선보인다. 앨범에는 이수만 프로듀서의 1989년 곡인 ‘그대로부터 세상 빛은 시작되고’와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등 리메이크 곡이 포함되었다. 2일 0시에는 신화가 13집 앨범을 발표한다. 신화는 1998년에 데뷔했다. 지난해 10월 와이지엔터테인먼트로 새로운 소속사를 옮긴 젝스키스가 활동을 재개하고, 신곡 ‘세 단어’는 일간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젝스키스는 1997년 데뷔했다. 1990년대 말을 풍미한 아이돌 그룹 중 컴백하지 않은 그룹은 핑클이다. 핑클 멤버는 ‘현재’가 뚜렷하다. 이효리는 이승환의 시국곡 ‘길가에 버려지다’에 참여하고, 엄정화의 새 앨범에 피처링을 하면서 여전히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옥주현은 뮤지컬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2년 데뷔한 비는 오는 15일 컴백을 예고했다. 구둘래 기자anyone@hani.co.kr
■ 괴물밴드들 ?내한,? 내한,? 내한 스쳐 지나가던 세계적인 밴드들이 줄지어 한국을 찾는다. ‘오픈 암스’ ‘돈트 스톱 빌리빈’ 등 히트곡을 가진 록밴드 저니는 2월15일 첫 내한공연을 한다. 결성 44년 만이다. 총 14장의 정규 스튜디오 앨범 등을 통해 통산 8천만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했다.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는 결성 18년 만에 한국에서 첫 단독 공연을 한다. 공연은 4월15일 한 차례 예정되었지만, 예매 시 동시접속수가 90만을 기록하자 공연이 한 차례 추가되었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1월에만 메탈리카, 제프 벡, 투 도어 시네마 클럽이 한국을 찾는다. 메탈리카와 제프 벡은 세번째 한국 방문이다. 메탈리카는 2006년과 2013년 내한공연을 통해 누적 10만 관객을 모았는데, 이번에는 한국 최대 규모의 공연장인 고척 스카이돔에서 공연을 한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 가려도 빛나는 윤이상 탄생 100돌 ‘상처입은 용’은 아직도 뒤척인다.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95) 탄생 100돌이 찾아온다. 아직 낡은 이념의 잣대가 그를 옭아매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제 예산 중 국비·경남도비가 삭감되고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올해 개최가 불투명하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빛난다. 생일인 9월17일에 맞춰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가 독일 베를린 등 유럽에서 ‘바이올린 협주곡 3번’ 등을 연주하고, 성시연이 지휘하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독일 음악축제 ‘무지크페스트베를린’에 초청받아 9월17일 교향곡 ‘예악’과 ‘무악’ 등을 들려준다. 3월13일~4월9일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첼로 협주곡’을,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서주와 추상’을 연주한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 20년 만이다, 황금의 해 미술동네는 2017년을 ‘황금의 해’라고 부른다. 현재 세계 미술계 흐름을 가늠해 보여주는 유럽의 4개 대형 이벤트가 새해 한꺼번에 열려 애호가들을 설레게 한다. 우선 2년마다 열리는 세계 비엔날레들의 어머니 격인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5월13일 개막해 11월26일까지 치러진다. 6월10일 동시에 막을 올리는 독일의 카셀도쿠멘타(9월17일까지)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10월1일까지)도 베네치아에 필적하는 세계 현대미술의 큰 잔치다. 카셀도쿠멘타는 앞서 4월8일 서구 고전미술의 고향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사상 처음 분산 전시회를 개막해 7월16일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세계 미술 시장의 최고 권력으로 꼽히는 스위스의 미술장터 바젤 아트페어도 6월15~18일 열린다. 네개의 ‘슈퍼이벤트’가 겹치는 것은 20년에 한번꼴이라고 한다. 개막 전후한 기간의 현지 항공·숙박편은 대부분 예약이 끝났다는 후문도 들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나홀로 트렌드’ 춘추전국 2016년 영화계에서 가장 의외의 현상은 영화 <귀향>의 선전이다. 관객들이 영화의 의의를 알리고 독려해 360만 관객을 이끌어냈다. 관객 주도는 다양한 영화에서 반복됐다. <아수라> <연애담>은 팬들이 장기 상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자백>은 관객 힘으로 개봉관을 늘렸다. 한국 문화 시장은 어느덧 돈 많고 덩치 큰 대형 기획사·제작사·배급사 중심으로 재편된 상태다. 돈이 몰리는 곳으로, 힘이 작용하는 곳으로 창작이 쏠리고, 유통 시장도 기우뚱해진다. 쏠림 현상이 반복되도록 구조화된 한국 문화 시장에서 개인의 정의감과 취향을 바탕으로 한 팬덤은 다양성의 유일한 희망이다. 가치있는 콘텐츠가 무한애정을 누리게 되겠지만, 그 주인공이 누가 될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나홀로의 힘들이 이합집산하며 무언가 짐작 못할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낼 것이다. 2017년을 움직일 마지막 키워드를 관객들을 위해 비워둔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제이티비시 정치 토크쇼 <썰전>.
팩추얼 다큐드라마 역사스페셜 <한국사기>.
에스비에스에서 오는 23일 방영 예정인 <피고인>.
넷플릭스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 580억원이라는 한국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를 투자했다. 사진은 <옥자>의 스토리보드.
엠넷 1월말 방영 예정인 <고등래퍼> 출연자 모집 공고.
2017년 새해가 밝자마자 컴백하는 에스이에스.
1월11일 메탈리카의 내한공연이 서울 구로구 고척 돔구장에서 열린다.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때 한국관 전시장에 모여든 관객들. 노형석 기자
2016년 360만 관객을 모은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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