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에 나온 <허클베리 핀의 모험> 미국판(2판) 표지. 초판은 1884년 12월 영국에서 먼저 출간됐다. 책이 출간되자 주인공 허크의 비도덕적 행동을 들어 작가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마크트웨인하우스 누리집
“말하면 천벌을 받지. 맹세할게. 사람들이 날 천한 노예폐지론자라고 부르고 고발 안 했다고 경멸해도 상관없어.”
왓슨 부인의 노예로 일하다 주인이 자기를 뉴올리언스로 내다팔 거라는 얘기를 엿듣게 돼 도망쳤다고 고백하는 짐에게 백인 소년 허크는 약속한다. 통나무로 엮은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떠돌던 둘 사이에 ‘우정’이 싹틀 무렵이다. 허크도 심한 매질을 해대며 어린 아들을 갈취하려 드는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무턱대고 탈출한 처지였다. “오하이오에서 온 자유로운 검둥이가 있지. 하얀 셔츠를 입고 최고로 빛나는 모자를 쓰고 다녀. 그놈은 자기 고향에서 투표도 할 수 있대. 그러니 내가 환장하지.” 술주정뱅이인 아버지로부터 평소 이런 불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허크였으나, 어느덧 소년의 가슴속엔 아버지가 조롱하고 욕하던 ‘검둥이’를 대하는 다른 감정이 웅크리고 있었다.
뗏목에 몸을 맡긴 허크와 짐. 어느날 뗏목이 그만 증기선과 충돌해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젊은 ‘공작'과 늙은 ‘임금'을 만나 그들의 울타리 안에 갇혀 이용당하기도 한다. 기회를 엿보던 허크가 도망쳤으나 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임금'이 펠부스 집안에 팔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펠부스 집안은 허크의 ‘절친’인 톰의 숙모네 집이었다. 때마침 만난 톰과 공모해 짐의 구출 작전이 펼쳐지는데…. 숱한 에피소드 끝에 결국 짐은 꿈에 그리던 자유의 몸이 되고, 허크는 자기를 양자 삼아 예절을 가르치려는 샐리 아줌마를 뿌리치고 인디언들이 사는 부락으로 홀연히 떠나는 것으로 흥미진진한 모험담은 끝을 맺는다. “짐에게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당당하게 증기선에 태워 고향으로 데리고 간 뒤 그때까지 버린 시간에 대한 보상을 해주려고 했던 거야.”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친구 톰의 입을 빌려 전하는 허크의 속마음은, 흑인 노예 짐의 처지를 공감하고 그가 겪은 고통에 안타까워하던 백인 소년의 의식이 어느새 노예제도라는 현실의 정곡을 비판하는 데 이르렀음을 짐작게 한다.
헤밍웨이, “미국 현대문학의 시작”
1884년 출간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작가 마크 트웨인이란 이름을 후대에까지 또렷하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책이 세상에 나온 직후의 반응은 무척 싸늘했다. 주인공인 허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물건을 슬쩍 훔치고 거짓말을 식은 죽 먹기처럼 일삼으며 온갖 비속어와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불량 소년처럼 묘사됐는데, 이런 비도덕적인 행동이 청소년들의 정서에 해롭다며 ‘도서관 비치 금지 도서’로 지정한 학교도 많았다. 하지만 허크는 거칠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제도와 문명의 굴레에 얽매이기 싫은 자유의지와 모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소년이었다.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은 절대 해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따뜻한 마음씨는 결국 도망 노예 짐을 한 인간으로 받아들였다. 앞서 1876년에 나온 <톰 소여의 모험>의 속편 격인 작품임에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두고 “미국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이 소설에서부터 비롯됐다”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흑인 노예들이 내뱉는 날것 그대로의 ‘입말’을 처음으로 문학작품 속에 생생하게 살려냈다는 이유에서다. 궁핍한 집안 살림을 돕느라 열두 살에 학교를 그만뒀던 마크 트웨인에게 영국 옥스퍼드대학이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톰 소여의 모험> 속편으로 출간
허크와 짐의 ‘우정’ 통해 노예제 고발
도둑질 등 “비도덕적 내용” 혹평에도
흑인 ‘입말’ 살려낸 기념비적 작품
양심과 인간애 승리라는 게 통설이나
노예제는 미국경제 지탱한 물적 토대
남북전쟁 이후 펼쳐진 ‘도금시대’엔
빈부격차 등 새로운 사회문제 등장
주인공 허크는 거칠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제도와 문명의 굴레에 얽매이기 싫은 자유의지와 모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소년이었다. 위키피디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시대적 배경은 남북전쟁(1861~1865년) 이전인 대략 1840~50년대. 노예제도라는 냉혹한 현실과 이에 대한 날선 비판이 혼재하던 시기, 노예제도 유지냐 폐지냐를 놓고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혼돈의 시기였다. 마크 트웨인의 인생 역정과도 얼추 들어맞는다. 1835년 미주리주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그는 미시시피강을 낀 해니벌이란 마을 강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매일 수많은 증기선이 오가고 사람들로 북적대던 곳이다. 어려서부터 식자공과 인쇄공을 전전하던 마크 트웨인은 스물둘에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증기선 항해사 격인 수로안내인이 됐다.(※사실 ‘마크 트웨인’이란 이름은 작가의 필명으로,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다. 수로안내인들이 수심이 사람 키의 두 배 정도(12피트, 약 3.6미터)인 곳에 배가 이르면 안전수역에 들어섰다는 신호의 의미로 “두 길”(Mark Twain)이라 외친 데서 작가 자신이 따왔다고 한다.)
특히 그가 나고 자란 미주리의 독특한 역사도 빼놓을 수 없다. 19세기 초·중반 미국 사회는 중서부 너머로 새로 확장된 영토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하느냐의 문제를 두고 갈등의 골이 깊이 파였다. 이때 등장한 게 북위 36。30 북쪽 지역엔 노예제도를 금지한다는 규정이다. 그러나 미주리는 북위 36。 북쪽에 위치했음에도 이른바 ‘미주리 타협안’에 의해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예외로 인정받았다. 미주리는 남부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개척한 지역이라 대부분의 가정이 흑인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합중국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선 미주리의 연방 가입이 꼭 필요했던 탓이다. 이런 연유로 남북전쟁 동안 유독 미주리에선 11만명이 북군에, 3만명이 남군에 따로 참전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쟁 초기 노예제도 찬성(연방 탈퇴) 편에 선 남군으로 참전한 마크 트웨인은 곧 환멸을 느껴 광산노동자와 저널리스트를 거쳐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미주리가 지닌 이런 ‘경계적’ 속성은 노예제도를 바라보는 작가의 혼재된 인식의 뿌리라 할 만하다.
통나무로 엮은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떠돌던 허크와 짐은 어느새 서로를 이해하고 진한 우정을 나누게 됐다. 위키피디아
미국사의 큰 분수령인 남북전쟁 ‘이전’을 배경으로 ‘이후’에 쓰인 작품이다 보니, ‘<허클베리 핀의 모험> 읽기’의 표준은 노예제도를 바라보는 남북전쟁 승자의 시각에서 대체로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주인공 백인 소년 허크를 우정과 양심의 구현체로, 허크의 모험담을 도덕과 인간애의 승리의 여정으로 단순화시키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이미 남북전쟁 이전에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색채를 띠고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해리엇 비처 스토의 대표작 <엉클 톰스 캐빈>(1852년)의 연장선에서 받아들여진 것도 이런 사정과 크게 무관치 않다.
흑인 노예를 대출담보 잡은 제이피모건
도덕적 잣대에 기댄 노예제도 반대 운동의 뿌리는 꽤 깊다. 19세기 초반부터 버지니아주의 백인들이 주도하는 미국시민협회(ACS)는 노예제도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며 노예 주인에게 정부가 보상금을 줘 노예를 풀어주자는 제안을 펼쳤다. 1840년대 ‘자유토지론’으로 이어진 이 운동의 밑바탕엔 흑인 노예를 미국 땅 바깥(카리브해와 아프리카)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특히 새로 개척한 서부를 백인만의 땅으로 만들려는 속내도 깔려 있었다. 양심과 정의에 호소하는 목소리가 끔찍한 노예제도를 없애자는 대중적 공감대를 넓힌 점만은 분명하나, 노예제도에 얽힌 다층적 구조를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뚜렷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9세기 미국 경제 전체를 지탱한 물적 토대였다. 남북전쟁 직전인 1860년을 기준으로 흑인 노예 400만명의 경제적 가치는 30억달러(지금 돈으로 약 900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인구 절반이 노예였던 남부 7개 주에서 흑인 노예들이 목화 농장에서 만들어낸 부가가치를 환산하면 전체 백인 소득의 30%를 웃돌았다. 도망 노예 짐이 주인이 자기를 내다팔려던 일을 상기시키며 “이 몸뚱어리는 내 건데, 족히 800달러는 받는다잖아”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노예는 백인 농장주의 핵심 자산이었다.(※도망 노예 짐에게 걸린 현상금은 300달러였다.)
그렇다고 남부만 노예제도의 혜택을 누린 건 결코 아니다. 북부 경제 역시 남부의 노예제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제공동체’였다. 목화는 당시 미국 전체 수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미국 경제의 버팀목 노릇을 했다. 특히 북부 면직물 산업의 성패는 원재료인 목화 가격을 얼마나 낮추느냐에 달려 있었고, 따라서 노예노동의 착취는 북부에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뿐 아니다. 북부 금융자본은 변변한 은행조차 없던 남부를 상대로 한 대출로 엄청난 재미를 봤고, 북부 거대 상인들은 삼각무역을 통해 유럽에서 들여온 럼주를 남부에 마구 들이밀었다. 남부에서 재배된 목화는 북부 뉴잉글랜드 지역 항구를 통해서만 전세계로 수출됐다.
마크 트웨인은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증기선 수로안내인으로 일하던 중 남북전쟁에 참전했으나, 곧 환멸을 느껴 광산노동자와 저널리스트를 거쳐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마크트웨인하우스 누리집
북부 금융자본의 상징인 제이피(JP)모건이 숨기고픈 역사는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이피모건이 합병한 한 은행의 남북전쟁 이전 시기 대출 ‘담보물’ 목록엔 흑인 노예 1만3천명도 포함됐고, ‘노예담보대출’(!) 파산으로 은행은 노예 1250명을 통상의 물건(동산·부동산)처럼 압류했다.(※2007년 금융위기로 파산한 글로벌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역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남부 앨라배마에서 목화 재배와 노예 거래로 떼돈을 벌어들인 빛나는 ‘원시적 축적 과정’을 거쳤다.) 이쯤 되면 당대 노예제도는 단지 도덕의 잣대나 선악의 구도로만 축소 해석될 수 없는 복합체였음을 알 수 있다. 북부에서 노예 폐지 여론이 거세지고 결국 남북이 전쟁까지 치르게 된 데는, 산업화의 진전으로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북부 신흥 산업자본의 요구에 기존 노예제도가 부합하지 않은 측면이 강했다고 봐야 한다.
앨릭스 헤일리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돼 커다란 화제를 모은 티브이 드라마 <뿌리>(1977년).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꾼에게 잡힌 흑인들이 쇠사슬에 묶여 노예시장으로 옮겨지고 있다. ABC 누리집
남북전쟁 이후의 수치가 많은 걸 설명해준다. 전후 재건기를 거치며 1870년대부터 미국 경제는 폭풍성장을 이어갔다. 1850년 기준으로 2300만명이던 인구는 1900년엔 7600만명으로 불어났고, 같은 기간 경제규모는 몸집을 13배나 키웠다. 그럼 자유를 찾은 해방노예의 운명은 어땠을까? 백인 농장주의 채찍과 쇠사슬이 사라진 건 틀림없다. 착취노동에 신음하던 400만 흑인 노예 가운데 백인 농장주의 토지를 빌려 쓰는 계약소작농으로 탈바꿈한 사례도 많다. 하지만 해방노예의 살림살이가 근본적으로 개선됐다고 보긴 힘들다. 남부의 공유지를 흑인들에게 불하해 자립의 기회를 주자는 취지로 남부홈스테드법이 1866년에 만들어졌으나, 최소한의 구매대금조차 손에 쥐지 못했던, 갓 해방된 ‘자유인’들에겐 빛 좋은 개살구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땅이 곧장 북부 투기꾼의 수중에 넘어간 건 뻔한 수순이었다. 북부의 여러 공장과 건설 현장은 불합리한 처우와 열악한 노동환경조차 마다않는 흑인과 백인계 이주노동자들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었다. 그나마 기회를 얻지 못한 흑인들은 부랑아로 도시 뒷골목을 오갔다.
1870년대 이후 약 20~30년간 미국 사회는 극소수 자본가들이 부를 독점하는 ‘도금시대’를 겪었다. 석유재벌 록펠러를 ‘산업황제’로 묘사한 1901년의 한 잡지 만화. 위키피디아
투자 실패로 돈 날리기도
극심한 불평등은 숙명처럼 찾아왔다. 전체 부의 3분의 2 이상이 상위 20%의 수중에 빨려들어갔다. 평범한 미국인들이 하루에 채 2달러도 손에 쥐지 못할 때 1초에 2달러를 벌어들였다는 석유재벌 존 D. 록펠러와 같은 인물이 바로 주인공들이다. 자유와 도덕의 승리라는 허울을 한꺼풀만 벗겨내면 겉은 화려해도 속은 썩어들어가던 이 시기를 <도금시대>(1873년)라는 작품으로 고발한 장본인이 바로 마크 트웨인이다.(※정작 <도금시대>에서 땅 투기로 부를 축적하려는 욕망을 꼬집었던 마크 트웨인 자신이 저술활동 등으로 모은 재산을 투자 실패로 허망하게 날린 건 ‘웃픈’ 이야기다.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마크 트웨인은 최초의 교류유도전동기를 만든 니콜라 테슬라와 각별한 사이였고, 신형 식자기계에 마음을 빼앗겨 투자에 나섰으나 쓴맛을 봤다. 분명 투자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담긴 ‘낭만’이라는 코드도 되짚어볼 만하다. 장로교도인 마크 트웨인은 주인공 허크를 조직사회의 굴레를 거부하고 자연에 한걸음 더 다가서려는 인물로 그려냈다. 물질문명의 향락에 집착하는 삶에서 해방·탈출을 꿈꾼다는 점에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1854년)의 맥을 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역사에서 낭만의 얼굴은 때론 양면적이었다. 문명과 낭만을, 인간과 자연을 맞세우는 의식의 뒤편엔 개척과 정복, 팽창과 확장이라는 역동적 자본주의의 무의식이 가려져 있었다. 낭만과 자유가 투사된 최고의 결정체가 바로 거친 땅, ‘서부’ 아니었던가. 흑인 노예 짐이 갈구했던 자유와 ‘야생’ 소년 허크를 가슴 뛰게 만든 자유. 노예노동을 임노동으로, 낭만과 자연을 개척과 팽창으로 밀어붙였던 저 ‘광란의 시대’에 둘은 과연 한 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