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최우성의 동화경제사 ⑥ <엄마 찾아 삼만리>(사랑의 학교)
데아미치스의 <쿠오레>에 실린 단편
1880년대 이탈리아 이민가정사 그려
통일 뒤 애국주의 열풍 최고조 반영
무솔리니 정권이 ‘교재’로 적극 활용
노동력 부족했던 아르헨티나와
일자리 없던 이탈리아의 이해 맞아
1880~1914년 200만명 대규모 이주
원주민 터전 사라지는 원인 되기도
데아미치스의 <쿠오레>에 실린 단편
1880년대 이탈리아 이민가정사 그려
통일 뒤 애국주의 열풍 최고조 반영
무솔리니 정권이 ‘교재’로 적극 활용
노동력 부족했던 아르헨티나와
일자리 없던 이탈리아의 이해 맞아
1880~1914년 200만명 대규모 이주
원주민 터전 사라지는 원인 되기도
1913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에 첫 지하철 노선이 개통됐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물론이고 남반구 전체를 따져도 최초다. 심지어 식민 모국인 스페인의 마드리드(1919년)보다도 6년 앞섰다. 영국 런던에 세계 최초로 지하철이 등장(1863년)한 지 정확히 50년 뒤의 일이다. 그해 아르헨티나 경제는 최정점으로 치달았다. 실질임금은 산업화의 선두주자 영국의 95% 수준까지 따라잡았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위상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는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같은 해, 이탈리아. ‘유럽의 후진국’ ‘유럽의 변방’이라 자조하던 이탈리아의 일상은 이미 오래전의 기억이 됐다. 강력한 후발 산업화의 엔진을 장착한 이탈리아 경제는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올라섰다. 근 10년 새 성장률은 평균 7%를 너끈히 유지했다.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북동부 일부와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통일 왕국을 세운 1861년에 견주면, 1인당 국민소득은 70%나 늘었다.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겉으로 드러난 성적표만 놓고 본다면, 남·북반구로 나뉘어 멀리 떨어진 두 나라는 풍요와 번영이라는 같은 길을 나란히 걷고 있는 듯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아주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두 나라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사람이 문제였다. 한쪽(아르헨티나)은 마치 거대한 블랙홀처럼 세계 곳곳으로부터 이주노동력을 거침없이 빨아들인 반면, 다른 쪽(이탈리아)에선 이민 행렬이 각 대륙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쪽이 몰려드는 이주노동력 덕에 빠르게 성장했다면, 다른 쪽은 정작 성장은 했으나 사람들이 줄지어 떠났다고 해야 할까. 이탈리아 몇몇 항구도시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한달 남짓 걸리는 항해에 나선 증기선엔 일자리를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언제나 가득했다. 11살짜리 제노바 소년 마르코의 엄마처럼.
1886년 출간된 소설 <쿠오레> 속 단편
이탈리아 북서부 항구도시 제노바. 마르코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엄마가 항구를 떠나는 커다란 배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꿈이었다. 불행히도 악몽은 그날 새벽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 엄마는 아빠에게 조심스레 이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먹고살기 힘든 형편인데 빚만 자꾸 늘어가네요. 떠도는 소문을 듣자 하니 아르헨티나에 가면 여기에서보다 몇 갑절 돈을 더 벌 수 있대요. 4, 5년만 열심히 일한다면….” 부두 막일로 가족의 생계를 꾸리던 마르코의 아빠는 사기와 교통사고를 연달아 당해 오래전부터 벌이 없이 몸져누운 터였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지낸 지 몇 달. 어느 날 드디어 엄마한테서 첫번째 편지가 날아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무사히 도착해 그곳에 사는 아빠의 사촌동생 소개로 인근 부잣집에 가정부 일자리를 얻었다고 했다. 다음 편지엔 꽤나 많은 돈도 함께 부쳐왔다. 하지만 1년쯤 더 지났을까. 몸이 아파 누워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엄마 소식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제노바에 남은 가족들이 애태우며 아무리 수소문을 해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도 이제 열세살이야. 내가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가겠어.”
국내 독자들도 너무 잘 알고 있는 동화 <엄마 찾아 삼만리>의 앞부분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는 1886년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아미치스가 펴낸 소설 속에 포함된 한 단편으로, 원래 제목은 <아펜니노에서 안데스까지>가 맞다. 이탈리아의 등뼈에 해당하는 아펜니노산맥과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상징인 안데스산맥을 나란히 맞세운 제목이다. 데아미치스의 원작 소설은 이탈리아말로 ‘사랑’ ‘심장’ ‘애정’ 등의 뜻을 지닌 <쿠오레>란 제목으로 출간됐는데, <엄마 찾아 삼만리> 이외에도 여러 단편이 ‘이달의 이야기’ 형식으로 담겨 있다. 토리노에 사는 엔리코란 이름의 9살짜리 소년의 교실을 주된 배경으로 삼은 터라, 20세기 초 중국에 <사랑의 학교>란 제목으로 번역·소개된 이후 국내 독자들도 이 제목에 익숙하다.
특히 이 가운데 <엄마 찾아 삼만리>가 큰 인기를 끌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제목이 주는 효과도 톡톡히 봤다. <아펜니노에서 안데스까지>가 <엄마 찾아 삼만리>로 바뀐 건 1976년 일본에서 이 이야기를 소재로 52회짜리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다. 제노바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의 뱃길 1만2000㎞를 암시하는 이 제목은, 엄마를 찾아 나선 마르코의 눈물겨운 장거리 여정의 애잔함을 극대화시킨다. 1999년 애니메이션 영화로 다시 만들어질 때는 유명 팝가수 시나 이스턴이 주제곡 ‘캐리 어 드림’(Carry a Dream)을 부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아르헨티나로 돈 벌러 떠난 이탈리아 가족 이야기가 줄거리의 뼈대를 이루는 건 당시 시대상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다. 데아미치스의 소설이 세상에 나올 무렵,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두 나라는 저마다 낙후된 경제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과제와 맞닥뜨린 상태였다. 먼저 아르헨티나부터 살펴보자.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토 대국이다. 하지만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정복자들은 페루나 멕시코에 비해 이 땅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노다지 금은 광물이 없었던 탓이다. 이런 연유로 19세기 초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에도 상당 기간 영토의 3분의 1 이상은 ‘버려진 땅’으로 남았다. 본격적인 도약의 시동이 걸린 건 1880년대. 때마침 유럽과 미국에서 넘쳐나던 돈이 이 땅을 새로운 ‘출구’로 여기면서 자본유입이 급격하게 늘어난 덕도 봤다. 전통적 틀에 얽매여 있던 농업과 축산업은 산업 논리와 자본이라는 외투로 갈아입었다.
문제는 땅과 돈은 넘치는데 ‘사람’이 크게 부족했다는 사실. 외국에 이민 문호를 활짝 열어젖힌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임금은 뛸 수밖에 없었고, 고임금의 매력은 이 나라로 향하는 이민 행렬을 더욱 부채질했다. 1895년 400만명이던 인구가 1914년 790만명으로, 채 20년도 안 돼 갑절 가까이로 급증한 배경이다. 아르헨티나는 당시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이민자를 받은 나라였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이민 노동력에 힘입어 아르헨티나 경제는 축산업과 양모 수출 등을 중심으로 날개 단 듯 비약했다. 1880년 기준으로 미국의 35%에 그쳤던 1인당 소득은 1905년 이미 80%를 웃돌았다.
‘끌어당기는 힘’과 ‘내모는 힘’의 균형
아르헨티나와는 정반대로, 이탈리아에선 기회에 비해 사람이 넘쳐났다. 후발 산업화의 물결이 거셌으나 그 온기는 주로 북부 공업지대의 조직노동자만 누렸다. 북부(대기업)와 중부(중소·가족기업), 남부(농업)의 지역적 편차도 너무 컸다. 이렇다 보니 1880년대 들어 본격적인 이민 행렬의 물꼬가 터졌다. 특히 남부에선 가족 중 ‘선발대’가 먼저 떠나 돈을 부쳐오면 그 돈으로 남은 가족들이 떠나는, 전형적인 형태의 빈곤형 이민이 많았다. 이민대행업이 극성을 부렸고, 급기야 정부는 1888년엔 이민대행업자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법률을, 1901년엔 아예 담당 정부조직까지 만들 정도였다. 1860~1914년 사이 이탈리아를 떠난 인구는 모두 900만명. 역사상 가장 많은 ‘자발적 이민’ 사례로 꼽힌다. 이민 행렬은 대륙과 나라를 가리지 않았으나,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는 대표적인 ‘목적지’였다. 문화와 언어상의 친근함뿐 아니라, 당시 아르헨티나가 주는 매력이 너무 컸던 까닭이다. 1880년에서 1914년 사이 이탈리아를 떠나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인구는 무려 200만명에 이른다.
묘하게도 두 나라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과 ‘내모는 힘’이 절묘한 균형을 이뤘다고는 해도,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맞닥뜨린 삶은 녹록지 않았다. 변변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에겐 도시의 일자리라고 해봤자 하층 계층이 담당하는 단순노동이 고작이었다. 내륙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 토지를 일구며 새 터전을 마련한다 해도 성공이 반드시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제노바 항구를 떠난 지 27일째. 천신만고 끝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발을 디딘 뒤에도 꿈에도 그리던 엄마를 만나기까지 마르코가 겪어야 했던 숱한 역경이 많은 걸 웅변한다. 엄마의 편지에 적힌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갔으나 엄마는 주인네 식구와 함께 이미 다른 도시로 옮긴 뒤였다. 로사리오와 코르도바, 다시 투쿠만…. 이름도 낯선 땅의 내륙 깊숙이 족히 1000㎞ 이상은 더 찾아 들어가야 했다. 도중에 차례로 만난 선원, 농부 등 ‘반가운 이탈리아인’들은 저마다 씩씩하고 활기 넘쳤으나, 고된 노동과 향수의 흔적을 감출 순 없었다. 때론 돛단배를 타고, 때론 짐을 운반하는 일꾼들의 짐수레를 얻어타고 잡일을 해가면서도, 마르코는 속으로 백번도 더 되뇌었다. ‘엄마, 내가 꼭 찾아갈게요. 이탈리아로 돌아가요. 가난해도 좋아요.’ 그 무렵 마르코의 엄마는 병나 누워 있었다. 가족을 두고 멀리 떠나온 마음의 병이 더 문제였다. 걷다가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걷기를 또 몇날 며칠. 마침내 마르코가 엄마가 누워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마지막 의식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반쯤 감긴 엄마의 눈앞엔 한 소년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 어린것이 머나먼 3만리 길을 혼자 찾아오다니….”
데아미치스의 소설 <사랑의 학교(쿠오레)>가 세상에 나온 때가 통일국가 수립 뒤 이탈리아 사회 곳곳에 애국주의 열풍이 한창 불 때였다는 점은 중요하다. 당연히 <엄마 찾아 삼만리>에도 민족적 자긍심을 유독 강조하는 대목이 여럿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엄마를 찾아 다시 무작정 길을 나선 마르코를 위해, 허름한 술집에 모여 향수를 달래던 이민자들은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의 손으로 이 애를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기꺼이 돈을 모아 줬다. 엄마를 만나겠다는 희망이 매번 실망으로 변할 때마다 거듭 용기를 북돋워준 것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었다. “제노바 아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야.” ‘학교’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줄거리로 가득 찬 데아미치스의 원작 소설을 훗날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이 ‘교재’로 애용한 건 충분히 이해됨직하다. 데아미치스의 작품이 1950년대 갓 건국된 이스라엘에서 커다란 인기를 끈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물론 데아미치스의 소설엔 가난한 노동자계층 자녀의 학교생활 이야기가 풍부하게 곁들여져 있어 사회주의적 색채도 가미돼 있다. 데아미치스는 훗날 이탈리아사회당에 가입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냉전 시기 동구권에선 오히려 이런 점이 집중적으로 부각됐다.)
‘개척’의 역사 뒤엔 원주민의 상처가
그럼 아르헨티나라는 새로운 광활한 토양에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어떤 싹을 틔웠을까. 3만리 뱃길을 거쳐 새 터전을 일군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과 불편함이야 말로 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1914년 기준으로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대부분 농업과 비숙련 노동자였을 뿐, 전문직과 상업 종사자라고 해봤자 채 4%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엔 분명 경제적 기회가 활짝 열려 있었고, 이민자의 삶 역시 반드시 ‘가난에 찌든 눈물겨운’ 고난의 드라마로만 점철된 건 아니었다. 이민 행렬의 성격도 시기별, 지역별로 조금 달랐다. 통일국가 수립 직후부터 1900년 이전 시기엔 피에몬테(토리노), 베네토(베네치아), 롬바르디아(밀라노) 등 주로 상대적으로 여유 있던 북부 출신의 이민이 많았던 데 반해, 1900년대 들어선 남부의 가난한 농민 이주자가 주를 이뤘다. 북부 출신들 중엔 어느 정도 부를 일군 뒤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많았으나 남부 출신들은 주로 영구정착한 것도 대비되는 특징이다.
무엇보다 대규모 이민으로 엮인 이탈리아-아르헨티나의 관계는, 19~20세기 내내 펼쳐진 아시아·아프리카계 혹은 슬라브계의 미국·서유럽 이주와는 성격상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는 점을 되새길 만하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건너온 사람들은 엄연히 백인계 조상이 1차 이주·정복해 세운 나라로 2차 이주한 백인계 후손이다. 그들 앞엔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영토와 수많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의 상처는 정확히 그 뒤편에 가려진 얼굴이다. 중부의 드넓은 평원지대(팜파스)와 남부의 고원지대(파타고니아)가 근대화의 명분 아래 차례로 ‘개척’됐다. 이주노동자의 손길이 닿은 ‘버려진 땅’은 옥토로 거듭났다. 흔적 없이 사라진 수십의 원주민 종족의 터전을 대가로 치르고서.
1886년 출간된 <쿠오레> 표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엔 <사랑의 학교>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로 엄마를 찾아 떠나는 마르코의 이야기를 다룬 <엄마 찾아 삼만리>는 그 안에 담긴 한 단편이다. 위키피디아
<엄마 찾아 삼만리>를 지은 에드몬도 데아미치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적극 지지했고, 나중엔 이탈리아사회당에 가입해 적극 활동했다. 위키피디아
영토는 넓으나 노동력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로 경제적 기회를 찾아 몰려드는 이민 행렬이 이어지면서 1895~1914년 사이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갑절 가까이 늘어났다. 위키피디아
1860~1914년 사이 모두 900만명이 이탈리아를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역사상 가장 많은 ‘자발적 이민’ 사례로 기록돼 있다. 위키피디아
데아미치스의 소설 <쿠오레>는 <마르코>란 제목으로 여러차례 재출간됐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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