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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쓸모없는 공부’가 더 필요합니다”

등록 2019-04-14 10:01수정 2019-04-14 17:32

[토요판] 오은·요조의 요즘은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20년 기자 생활 접고 9년 전 퇴사
인문학 공부 단체 ‘대안연’ 만들어
철학, 어학, 그림 등 60여개 모임
다양한 직업 사람들 참여해 ‘열공’

“공부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 찾는 것
나이 들수록 공부해야…멈춰 서 있으면
젊은 사람 만드는 세상에 저항하게 돼”

“쉰에 시작한 내 인생 2막 기준 단순
즐거움과 보람이 우선, 돈은 그다음
청소, 복사 등 ‘대안연 잡부’로 살며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생활에 만족해”

2011년 ‘대안연구공동체’를 만들어 9년째 운영하고 있는 김종락 대표가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대안연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1년 ‘대안연구공동체’를 만들어 9년째 운영하고 있는 김종락 대표가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대안연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인생 2막’이나 ‘제2의 인생’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지만, 실제 삶에서 두번째 국면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자리에 있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 자리가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단거리 육상선수가 하루아침에 장거리로 주 종목을 바꿀 수는 없다. 꽃을 키우던 사람이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몸은 기억하는 대로 반응하고 마음은 으레 기울던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비단 용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 수입 규모, 출퇴근하는 패턴 등 삶의 많은 부분이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이가 있다면 그의 양해를 구해야 함은 물론이다. 삶의 반환점을 돌았는데도 익숙한 원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곳으로 향해야 한다. 처음에는, 아니 처음이니까 인생 2막은 말 그대로 막막할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온 것처럼, 비틀거리며 다시 거기까지 가야 한다.

대안연구공동체(대안연) 김종락(58) 대표는 삶의 첫번째와 두번째 국면이 크게 달라 보인다. 20여년 신문기자를 하던 사람이 인문학 강연과 연구를 하는 단체를 만들어 10년 가까이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은 아니다. 인생 2막을 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왔을까?

그를 만나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자리 잡은 대안연을 찾았다. 상가지역 도로변, 1층에 철물점과 김치 도매상이 있는 건물의 2층에서, 간판도 없이 운영되는 대안연 공간은 홍대의 화려한 분위기와는 달랐다. 70평 정도의 공간에 방이 여덟개 있다. 각각 큰방, 작은방, 더작은방, 골목방, 문간방, 다산실, 퇴계실, 화담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귀퉁이에는 창고를 개조한 김 대표 사무실이 있다.

‘파리8대학’ 꿈꾸며 시작한 인문학 공동체

―코너 제목이 ‘요즘은’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스스로를 ‘대안연 잡부’라고 부릅니다. 청소, 설거지, 복사부터 시작해 형광등 갈기, 난로·에어컨 고치기 등 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빔 프로젝터도 제가 설치했고 벽에 걸린 선반과 지금 앉아 있는 이 책상도 제가 만들었어요. 물론 강의를 기획하고 알리거나,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흥미 있는 주제는 강좌나 스터디에 참여해 공부하기도 합니다.”

―대안연은 어떤 곳인가요?

“대안연은 말 그대로 ‘대안’과 ‘연구’와 ‘공동체’가 한데 어우러지는 공간을 목표로 삼는 곳입니다. 대안은 제도권에서 안 하거나 못 하는 것을 한다는 의미로 새겨도 될 듯싶습니다. 대학 등 제도권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못 가르치는 것을 가르치거나 여건상 불가능한 것을 해보는 것이지요. 대학은 한 학기가 16주로 고정돼 있고, 특히 교양 강좌는 일정 이상의 인원이 차지 않으면 폐강됩니다. 그러니 몇년이 걸리는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모두 강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걸 합니다. 학자의 지적인 관심사를 강의나 세미나로 개설하고 이를 저술로 연결하는 일도 이곳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이것들을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낫다는 믿음에서 공동체를 기획한 거죠.”

2011년 3월2일 문을 연 대안연은 △철학·문화학교 △일반 인문학 강좌 △세미나(박사급 전문가가 지도) △자율공부모임(누구나 만들 수 있는 스터디) 등 네가지 모임 형태가 있다. 강좌는 회당 2만원, 세미나는 월 3만~5만원, 스터디는 월 2만원 정도의 참여비를 낸다. 대안연의 소식을 전하는 네이버 카페(https://cafe.naver.com/paideia21)에서 4월 강좌·세미나 목록을 보니 ‘희랍어 성서 읽기’ ‘영어 고급문형 익히기’ ‘철학학교 혜윰’ ‘한문원전강독―<근사록>’ ‘프랑스어 강독―<이방인>’ ‘우드카빙―숟가락, 접시 등 깎기’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 ‘근대철학고전 강독’ ‘글쓰기 공작소’ 등 전문적인 분야부터 취미·실용 분야까지 다양하다. 현재 대안연에 개설된 각종 모임이 60~70개, 참여하는 인원은 300~400명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공부하는 인문학은 어떤 것입니까?

“전통적으로 인문학 공부는 문학·역사·철학과 예술비평을 중심으로 한, 고전 텍스트의 공부를 가리켰지요. 이를 통해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사고력과 표현력, 창조력을 기르는 것, 그러면서 우리의 삶과 삶터를 분석하고 성찰하며 다른 세상을 꿈꾸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벽에 붙은 시간표를 보니 일반적으로 ‘취미’나 ‘실용’으로 분류되는 수업도 있더라고요.

“좁은 의미의 인문학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인문학 공부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들이 전통 인문학뿐 아니라 수학, 물리학, 화학, 사회학 같은 학문과 그림, 음악, 연극, 건축 등에서도 가능하다고 봤으니까요.”

―어떻게 대안연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회사를 그만둔 뒤 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철학자 이정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존경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계시더군요. 이분이 원하는 강의를 마음껏 하면서 학문 생산도 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때마침 다언어 외국어학교 개설을 생각하던 불문학자 이상빈 선생님도 만났습니다. 철학과 외국어를 중심으로 한 학교를 한번 만들어보자, 시작은 미약하지만 잘만 하면 68혁명 뒤 탄생한 파리8대학처럼 멋진 대학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요.(웃음) 두 선생님과 (전 직장 동료였던) 성일권 현 르몽드코리아 대표와 저, 이렇게 네명이서 보증금과 운영비를 모아 사무실을 얻었지요.”

―처음에는 상황이 어땠습니까?

“사무실 하나를 임대해 방을 만들고 마흔개 안팎의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그런데 강좌에 찾은 사람이 50명 안팎에 불과했죠. 첫달 적자가 700만~800만원이나 됐어요. 처음부터 위기였습니다.”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셨나요?

“우리보다 앞서 출발한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를 흉내냈습니다. 한달 회비 2만원, 3만원짜리 세미나를 여러개 만들어 우선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데 주력했어요. 사진학교, 불교시민강원, 건축·목공 강좌 등을 개설한 것도 인문학의 폭을 확장한다는 목표 못지않게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도 강사분들에게 사례비를 하나도 못 드리는 ‘착취’ 구조가 한동안 계속됐지요. 초기 멤버들이 모았던 운영비도 모두 사라졌고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김 대표는 “처음에는 그냥 강의실 한쪽에서 일을 했는데 너무 불편해서 원래 창고였던 공간에 사무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김 대표는 “처음에는 그냥 강의실 한쪽에서 일을 했는데 너무 불편해서 원래 창고였던 공간에 사무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날짜 없는 사표 써놓고 몇년 버텼지만

―그전에는 신문기자 일을 하셨다면서요?

“네, 그땐 ‘기레기’란 말이 없었으니 그냥 ‘삼류기자’였지요. 입사(1989년)하고 초기엔 쉽지 않았지만 기사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면서 재미가 붙었습니다. 생태 문제에 관심이 많아 제법 열심히 기사를 썼고 반응도 꽤 좋았습니다. 오랫동안 서평란을 담당하며 책도 마음껏 읽었습니다. ‘좋은 사람 실컷 만나며 책 읽고 독후감 쓰니 월급이 나오네’ 하며 희희낙락했지요.”

―그런데 왜 퇴사를 하셨나요?

“2000년대 중반, 발행인이 바뀌면서 신문의 논조가 바뀌었습니다. 갈수록 쓰고 싶은 기사를 쓸 수 없게 되더군요.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며 꾸역꾸역 회사를 다녔지요. 날짜만 비어 있는 사표를 써서 서랍에 넣어두었지요.”

―2010년에 퇴사를 하셨으니 몇년을 더 버틴 셈이네요.

“실은, 그사이에도 몇번 사표를 냈어요. 사표를 낼 때마다 선후배, 동료들이 돌아오라며 집으로 찾아왔는데, 아내가 이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겁니다. 회사로 돌아가라는 무언의 시위로 보였지요. 결국 부장이 됐는데 그 뒤엔 더 힘들어졌어요. 전에는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됐는데, 이젠 제가 원치 않는 것들을 후배들에게 강요해야 했어요. 부장 된 지 석달 만에 새벽 회의를 하다 사표를 던진 뒤 집으로 갔어요. 마침 출근 준비하던 아내가 자기 회사에 전화를 걸어 휴가를 내고는 말하더군요. ‘사람들이 찾아올 테니 아예 여행을 떠나자.’”

―사표를 낸 뒤 무엇을 하며 살지는 생각하고 계셨어요?

“귀농을 꿈꿨어요. 시골 출신이어서 농사일이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그러나 충만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2001년에 강원도 화천의 산골에 싼 땅을 샀습니다. 회사 다니면서 주말마다 내려가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허름한 오두막도 하나 지었고요.”

―그런데 왜 퇴사 뒤 귀농하지 않으셨나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귀농을 함께해야 하는데 아이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요. 적어도 아이가 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돈을 벌자고 했어요. 제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전엔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거친 일을 해도 거뜬했는데, 사표를 낸 뒤 밭에서 무리하다 허리를 다쳤어요. 기자 생활 막판에 술이나 마시며 지내다 농사지을 몸을 만들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잠깐 다녔는데, 역시 사표를 내고 대안연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귀농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화천에는 자주 내려갑니다.”

―퇴사를 한 뒤 수입이 많이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대안연을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시나요?

“대안연에 내 월급이 200만원으로 책정돼 있지만, 이를 가져갈 수 있는 달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외부에서 비상근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내 용돈은 벌어서 쓰고 있습니다. 연봉으로 치면 한 1천만~2천만원 정도 될까요? 솔직히 아내가 직장을 다니니까 가능했지 안 그러면 이렇게 살고 있지 못했겠지요. 물론 전체 가계소득으로 보면 반토막이 난 셈이지만요.”

―저도 2016년에 퇴사를 했습니다. 모아둔 돈이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게 느껴지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모아둔 돈이 없었어요. 퇴직금까지 주택담보대출 남은 것을 갚고 나니, 남는 게 없더군요. 그래도 빚은 거의 없이 인생 2막을 시작한 셈이죠.”

―소득이 줄어들어서 불편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으셨나요?

“적게 벌어서 적게 씁니다. 예전에는 술값도 많이 냈지만 이제는 눈치 보면서 냅니다. 한동안은 아주 안 냈더니 사람들이 나랑 술을 안 먹으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이 학비 말고는 돈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노후 준비는 두 사람의 국민연금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싶고요. 농사지으면 먹거리도 해결되고요.”

―요새 퇴사 관련 책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퇴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저는 나이 쉰이 될 때까지 회사에 다녔어요. 그래서 쉰이 되기 전에 이직하는 분들께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쉰이 된 분들은 제 이야기를 참고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회사를 그만둔 뒤 인생 2막에 대한 단순한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즐거움과 보람이 우선이고 돈은 그다음 문제라는 것이었지요. 돈이 충분하진 않지만, 불안한 대로 만족하며 살자, 욕심을 내봐야 한이 없고, 잘못하면 망신당하거나 완전히 망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준을 만들었나요?

“스콧 니어링의 삶을 흉내 내고 싶었습니다. 니어링은 아동노동 반대, 전쟁 반대 등을 하다 대학 교수직에서 계속 쫓겨났어요. 쉰이 거의 다 된 나이에 그는 버몬트주 산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삶을 실험했지요. 그의 원칙 중 하나가 1년 이상 먹고살 것을 미리 저축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그는 또 자신의 소신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낮아지는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니어링의 삶을 본받고 싶었던 김종락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늘 화천에 있는 오두막을 생각한다고 한다. 힘든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그곳이 있다는 사실은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가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대안연 강의실에서 진행 중인 미술 드로잉 수업 수강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가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대안연 강의실에서 진행 중인 미술 드로잉 수업 수강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매월 텅 비는 통장…그래도 월세 한번도 안 밀려

―대안연 운영은 요즘 어떻습니까?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망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느낌이 왔지요. 들쭉날쭉하지만 요즘은 매주 찾는 사람이 300~400명 선입니다. 대안연 통장은 매월 세차례씩 텅 빕니다. 월말에 월세 내면서 한차례, 5일과 15일에 강의 사례비 입금하면서 또 한차례씩입니다. 그렇게 불안하게 이어오면서도 작년까지는 월세가 밀린 적이 없었어요.”

―대안연에 오는 사람들이 다양하다고 들었습니다.

“직업만 봐도 오는 분들이 각양각색입니다. 학생, 주부, 회사원, 자영업자, 공무원, 군인, 경찰, 작가, 시인, 번역가, 화가, 건축가, 목수, 대기업 시이오(CEO), 교수, 의사, 변호사, 기자, 피디, 목사, 스님, 농부… 정말 다양하죠? 50대 어머니와 20대 자녀가 한 반에서 희랍어 성서를 공부하기도 하고, 의사 부부와 유학 중 귀국한 아들이 함께 니체를 강독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 오는 것 같습니까?

“공부하는 동기도 오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해 보입니다. 학생들이야 학교 강의를 보충하거나 학위논문을 쓰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오죠. 그 밖의 분들은 모두가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그걸 보면서 혼자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공부보다 이들이 지금 여기서 자발적으로 즐기는 공부야말로 진정한 공부가 아닐까 하고요.”

―지난 8년간 대안연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쁜 순간은 언제였나요?

“돈 문제와 연결시켜 부끄럽지만, 내일모레 월세를 내야 하는데 통장에 잔고가 없는 거예요. 잠을 못 이루다 이튿날 통장을 보니 누군가 월세를 낼 만큼 충분한 돈을 입금해놓았더군요. 이런 일은 이후에도 몇차례 더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분이었지요. 어렵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그냥 어려운 게 느껴져서 보냈다는 거예요. 처음 얻었던 사무실 옆에 사무실을 하나 더 얻어 대안연을 확장할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바자회를 열어 돈을 모아 에어컨을 설치하고 한달 운영비까지 만들어줬어요. 대안연의 중요한 비품들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마련됐습니다.”

―진짜, ‘공동체’네요. 인문학은 보통 직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학문으로 간주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할까요?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사실 대안연에서 하는 인문학은 돈 버는 것과는 관계없는 ‘쓸모없는 공부’가 주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공부를 왜 할까? 제가 보기에는 지적인 호기심이랄까, 공부하면서 얻는 성취감이 가장 커 보입니다.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세상이 급박하게 변화하면서 편의와 효율을 따질수록 다른 한편에선 이를 근원적으로 성찰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은 욕망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요즘 인문학이란 단어가 여기저기서 쓰이면서 깊이가 아닌 너비를 키우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비판도 들립니다. “한때 ‘인문학 위기’ 담론이 있었고, 이어서 ‘인문학 열풍’이란 단어도 유행했죠. 대안연이 만들어질 때만 해도 비슷한 강의를 하는 곳이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다중지성의 정원 등 몇군데 정도였는데 지금은 수십개로 늘었습니다. 지자체나 도서관 등에서 하는 강좌도 많고요. 인문학 강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것이죠. 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더 깊어졌다고 봅니다. 우선 인문학 책이 점점 더 안 팔리고 있습니다. 또 하나 인문학이 살려면 대학 인문학과가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후속세대로 인문학이 이어지며 재생산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대학 인문학과는 통폐합되고 있고, 인문학 학위를 딴 학자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변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안연에 오는 사람들처럼, 직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강좌를 듣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사람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는 점점 늘고 있다고 봅니다. 대안연도 수강생이 크게 늘지는 않지만 꾸준히 유지는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매출액이 사상 최대였습니다. 비슷한 강좌를 여는 기관은 많아졌는데, 대안연 규모가 유지되는 것은 그만큼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배움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배우고 싶게, 어떤 것에 대해서 알고 싶게 만드는 것일까요?

“저는 공부를 크게 세가지로 보는데요. 하나는 먹고살기 위해 배워야 하는 실용적 지식입니다. 다음으로는 지적 호기심과 즐거움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어우러져 살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신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 하는 공부입니다.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공부해야 합니다. 흔히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하잖아요. 배우기 힘드니까, 움직이기 싫으니까 기존 가치체계 안에 멈춰 있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이들은 왜 젊은 사람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세상에 분노하며 저항할까요? 공부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요?”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가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대안연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가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대안연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공부하는 사람들 늘고 있어

―대안연에서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지금 하고 있는 실험은 학자 한 사람이 학교가 되는 1인 학교입니다. 강의는 물론 학문지도까지 책임지는 시스템이지요. 이를테면 철학학교 ‘혜윰’에서는 이 학교 교장이자 상임교수인 허경 박사가 대학 철학과와 대학원 철학과에서 공부하는 모든 것들을 강의하고 지도합니다. 명법스님 불교학교에서는 명법스님이 불교의 교학과 실참 수행 등 불교의 모든 것을 가르칩니다. 홍준기 박사의 정신분석학교, 문병호 박사의 비판철학교실도 2년 과정의 1인 학교지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이만교 작가와 김나정 작가의 글쓰기학교도 1인 학교입니다.”

―대안연에서 ‘파레시아’란 이름의 출판사를 만들고, 작년 4월과 올해 4월에 나란히 책을 한권씩 냈더군요.

“지난해 4월에 첫 책 <비티에스(BTS) 예술혁명: 방탄소년단과 들뢰즈가 만나다>(이지영 지음)를 냈어요. 방탄소년단과 그들의 팬덤 아미(ARMY)가 이루어내고 있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발터 베냐민과 질 들뢰즈의 철학으로 풀어낸 책이죠. 이 책을 영문으로 번역한 이 다음주에 출간됩니다. 외국 독자를 겨냥해 국내는 물론 아마존 등 외국에서도 판매할 계획입니다.”

―며칠 전에 나온 책도 제목이 심상치 않습니다. <혁명을 꿈꾼다면 주식을 하라>(남궁혁 지음)인데, 제목이 자못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직장에 다니다 자영업을 하면서도, 인문학을 공부해 여기서 강의를 하기도 한 학자가 쓴 책입니다. 주식시장은 완전경쟁시장이 아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가 왜 취업이 안 되는가, 자영업이 왜 살아남기 힘든가 하는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은 다른 세상을 꿈꾼다면 지금 이 세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주장과도 통합니다.”

―대안연을 운영해온 지난 8년 동안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나요?

“돌이켜보건대, 사람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지 않았어요. 처음에 오던 사람들이 아직도 이곳을 찾거든요. 반면, 한동안 열심히 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발길을 끊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만약 내가 대안연을 그만둔다면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과 느닷없이 헤어지는 게 힘들어서일 거다.”

―아직 인생 2막이 한창이시지만, 다가올 인생 3막은 어떤 풍경이었으면 좋겠는지 말씀해주세요.

“대안연을 운영하면서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지만 실은 제가 이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3막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죠. 다만 3막에서 무엇을 하든 지키고 싶은 원칙은 있습니다. 재미있는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가. 그 일을 해도 부끄럽지 않은가.”

한번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적이 없었던 공동체를 떠올려본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그 공동체를 지속하려는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것이 단순히 관성은 아닐 것이다. 공간(空間)이 비어 있지 않도록 스스로 거기를 채우는 사람들의 온기가 있었다. 잘사는 일과 잘 사는 일은 다르다. 김종락 대표는 잘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더 낮은 곳에 임하고 싶어 한다. 그곳에 재미와 보람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바람이 분다. ‘잘’ 살아야겠다.

▶ 오은 시를 쓴다.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한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삶 대신 못하는 것을 채우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딴청을 부리고 딴생각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딴’에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낀다.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등을 냈다. 가수 요조와 번갈아 누군가의 ‘요즘은’ 어떤지 물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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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25년 감독 인생 처음으로 사랑 이야기 담았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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