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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문화재 디지털 판독 시대, 마침표는 사람의 몫

등록 2020-01-02 18:35수정 2020-12-27 18:31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역사학자-공학자 연계 작업으로
신라 노역·감독 체제 등 밝혀내
분석 작업 한계 보이는 첨단기술
전문가 안목·데이터로 뒤받쳐야
지난달 18일 한국기술교육대에서 열린 무술오작비 디지털 판독회의 모습. 참석한 학자들이 연단에 몰려나와 대형 모니터에 뜬 비석 명문 글자의 디지털 이미지들을 살펴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지난달 18일 한국기술교육대에서 열린 무술오작비 디지털 판독회의 모습. 참석한 학자들이 연단에 몰려나와 대형 모니터에 뜬 비석 명문 글자의 디지털 이미지들을 살펴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어어, 새 글자 보인다! 화면 더 세게, 세게 돌려주세요….”

“이거 ‘공척’(工尺)이란 글자네요. 야, 전혀 몰랐는데, 이 글자였구나!”

칠판처럼 큰 디지털 모니터 화면 앞으로 고문서 학자들이 달려왔다. 월척을 잡은 듯 ‘공척’이란 단어를 외치기 시작했다. 화면엔 1500년 전 고신라 비석의 새김글자 가득한 표면이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떠 있다. 그렇게 드러난 화상의 표면 한가운데 ‘工尺’ 자가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1500~1400년 전 영남 지역 한 저수지를 만드는 공사에 동원된 신라 노역 집단의 이름과 실체가 디지털 기술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흥분한 학자들이 대기 중인 연구진에게 글자를 여러 각도로 확대해 볼 수 있는 이미지를 주문했다. 곧장 공척 글자만 크게 확대된 이미지가 나타났다. 연구진이 내보인 디지털 모니터와 화상 기기들은 요술상자 같았다. 글자의 크기뿐 아니라 특정 부위의 조명, 굴곡을 여러 각도로 조정할 수 있는 기능까지 있었다.

지난달 18일 한국 기술교육대에서 열린 무술오작비 디지털 판독회의 모습. 참석한 학자들이 연단에 몰려나와 대형 모니터에 뜬 비석 명문 글자의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를 뜯어보고 있다.
지난달 18일 한국 기술교육대에서 열린 무술오작비 디지털 판독회의 모습. 참석한 학자들이 연단에 몰려나와 대형 모니터에 뜬 비석 명문 글자의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를 뜯어보고 있다.
지난달 18일 오후 충남 천안 한국기술교육대 도서관 강의실에서는 문화재 동네에도 디지털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옛 비석 판독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한자로 우리말 토씨를 표기하는 이두 사용 흔적이 나타나는 초기 사례인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의 가려졌던 부분이 디지털 판독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무술오작비는 해방 직후 대구에서 발견된 6~7세기께 고신라시대 주요 비석이다. 578년 혹은 638년 무술년에 영남 지역 영동리촌에 ‘차지’(且只)란 저수지 둑을 조성할 당시 공사 현황과 참여자를 적은 유물이다. 고대 불경과 비석 금석문을 연구해온 정재영 교양학부 교수와 최강선 전기전자통신공학부 교수는 지난 2년간 3디(D) 스캔 방식으로 비석 명문의 이미지를 모은 뒤 9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해 보여줬다. 이 화상 자료들이 판독회에 등장한 분석 대상이었다. 이날 학자들이 디지털 판독으로 확인한 노역집단 직책 이름인 ‘공척’과 공사 관리를 맡은 비구니 승려 혜장의 호칭을 뜻하는 ‘아니’(阿尼)를 확인한 것은 새로운 의미가 있다. 당대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의 큰 공사를 진행할 때 어떤 식의 인력 동원과 감독 체제를 활용했는지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하일식 연세대 교수 등의 연구를 토대로 비석 내용의 상당 부분이 이미 밝혀졌지만, 디지털 판독 기법과 연구자들의 눈썰미를 통해 고민하던 글자 몇개를 확인하면서 비석의 역사적 의미를 좀더 온전하게 찾은 셈이다.

지난달 18일 열린 무술오작비 디지털 판독회에서 3D 스캔 방식으로 비문의 데이터 수집 작업을 벌인 최강선 교수(컴퓨터공학)가 디지털 화상을 통해 작업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달 18일 열린 무술오작비 디지털 판독회에서 3D 스캔 방식으로 비문의 데이터 수집 작업을 벌인 최강선 교수(컴퓨터공학)가 디지털 화상을 통해 작업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무술오작비처럼 최근 문화재 학계에서는 고문서 학자들이 이공계 공학자들과 디지털을 활용한 공동 판독 작업을 시작했다. 옛 비석 등의 금석문을 정밀 스캔해 이미지화한 뒤 디지털 화상을 보면서 잘 보이지 않는 글자를 판독하는 것이 새 흐름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11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고대사학회가 공동주최한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도 디지털 판독을 활용한 논쟁적인 발표가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고광의 연구위원과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의 조영훈 부교수 연구팀이 디지털 촬영 및 투사기법을 활용해 공동작업한 끝에 충주비의 보이지 않던 제액(비석의 제목을 새긴 부분)의 일부 글자 부분을 ‘영락(永樂) 7년(397년)’이란 광개토왕 연호로 판별하고, 이를 근거로 충주비가 4세기 말 광개토왕 대 세운 비라는 설을 내놓은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 충주비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나 증손자 문자명왕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대개 비정해왔다. 이날 발표는 통설을 깨는 내용일 뿐 아니라 중국 만주의 옛 고구려 도읍지 지안에 있는 5세기 초 광개토왕비보다도 먼저 광개토왕이 건립한 비라는 추론을 담고있어 눈길을 끌었다. 비석의 발견 40주년을 앞두고 역사학자와 이공계 학자가 첨단 디지털 촬영 기법과 조명을 되쏘는 아르티아이(RTI) 기법 등의 첨단 기술을 이용한 연계 작업으로 글자 실상을 규명한 결과물이었다. 아쉽게도, 비석의 마멸이 심한 까닭에 고 연구위원이 해석한 내용은 폭넓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공동 판독한 역사학계의 학자들 대부분은 광개토왕을 입증하는 영락 연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상반된 견해를 내놓았다. 분석 작업에 한계를 보여 기대만큼 성과를 공인받지는 못한 셈이다.

동북아역사재단과 공주대 연구팀이 충주 고구려비를 최신형 디지털카메라 여러 대와 조명 장비를 써서 정밀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동북아역사재단과 공주대 연구팀이 충주 고구려비를 최신형 디지털카메라 여러 대와 조명 장비를 써서 정밀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첨단 디지털 기술과 옛 비석 같은 고색창연한 문화유산의 색다른 만남은 학계 관계자와 문화재 애호가를 매혹시킨다. 하지만, 기존 금석문 자료 판독처럼 디지털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이다. 안목 있는 전문가의 눈썰미와 축적된 사료 분석 역량이 있어야 빛을 볼 수 있다. 무술오작비를 분석한 최강선 교수는 “기존 3D 스캔 기법은 비석의 암질, 명문의 굴곡과 파인 홈의 세부 분석 등에서 판독의 영역을 확장할 가능성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데이터베이스의 검색과 학제 간 연구를 좀더 심화시켜 연구자들이 관련 정보를 폭넓게 공유하고 논의를 더 활성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조언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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