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2020년은 코로나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방송 역사에서 2020년은 트로트의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작년에 <미스 트롯>(티브이조선)이라는 프로그램이 첫 방송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트로트 열풍이 이렇게 거세게 불 거라고 예측한 방송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보다 트로트를 애정하고 또 여러 번 트로트 프로그램을 만들어본 필자조차도 그저 재미있는 시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스 트롯>은 원래부터 트로트를 좋아하던 팬들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구리다며 트로트를 외면했던 사람들의 귀까지 사로잡았다. 거기에 국민 엠시(MC) 유재석의 또 다른 페르소나 ‘유산슬’이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면서 트로트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다. 마침내 올해 <미스터 트롯>(티브이조선)은 국민 예능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 인기를 얻은 트로트 가수들은 국민 가수 대접을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나도 흐뭇하고 반가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해당 방송사인 <티브이(TV)조선>에 사실상의 전속 계약으로 묶이는 경우가 많다. 티브이조선에서 경영을 위임한 회사와 1년 6개월간의 계약을 맺는 것이 일반적이고, <미스터 트롯> ‘탑7’ 가수들도 김호중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랬다. 타 프로그램에서 이들을 섭외하려면 무척이나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고, 사실상 그 절차라는 것은 티브이조선 쪽의 아량을 구하는 과정이다. 나 역시 예전에 아무 문제 없이 출연시켰던 가수들을 섭외하려다 매니저로부터 어렵게 되었다며 미안해하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뭐 여기까지는 신대륙을 개척한 자들의 특권으로 인정하기로 하자.
문제는 그다음부터. 티브이조선에서는 탑7 가수들을 이용한 기획을 연달아 내놓고 있다. 결혼도 안 한 가수들을 <아내의 맛>에 출연시키는가 하면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사랑의 콜센타>를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임영웅, 이찬원, 영탁, 장민호 등을 ‘트롯맨 에프4’로 묶어 <뽕숭아학당>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에스비에스>(SBS) 쪽과 겹치기 출연, 동 시간 편성 논란으로 두 방송사가 얼굴 붉히는 일도 있었다.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을 연이어 기획하고 총괄한 서혜진 피디가 불과 몇 년 전까지 에스비에스 피디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참….
제2의 ‘미스-미스터 트롯’을 꿈꾸는 피디들은 줄 서 있고 이런 식의 과열 경쟁은 당분간 계속 방송계를 시끄럽게 할 것이다. <미스 트롯>의 우승자인 송가인은 이미 제안받은 예능 프로그램만 스무개라고 밝힌 바 있다. 다른 가수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트롯신> <아는 형님> <보이스 트롯> <뭉쳐야 찬다> <전국 트롯 체전> 등등 기존 프로그램과 신규 프로그램을 망라한다. 지상파와 종편 모두 트로트 열풍에 달려든 형국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만큼 너무 차갑게 식을까 봐 겁이 난다. 너도나도 트로트 프로그램을 쏟아내고 트로트 가수들을 출연시키다가, 어느 순간 시청자들이 지겹다고 외면해버릴까 봐 겁이 난다. 물론 가요계의 변방이자 행사용 음악 정도로 폄훼되던 트로트를 가요계의 중심으로 모셔준 제작진의 빛나는 기획과 노력에 감사하면서도, 좋은 시절이 좀 더 오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아직 과실을 먹지 못한 신인 가수들이나 오랫동안 어려운 처지에서 노래를 불러오고 있는 수많은 무명 가수들에게도 단비 같은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워낙 ‘미스-미스터 트롯’ 출신 가수들의 노래들이 방송을 점령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들과 상관없는 성인가요 플레이리스트를 여러분께 제안할까 한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다.
1. ‘정말로’ - 현숙
- 무려 1976년에 데뷔한 효녀가수 현숙이 1980년에 발표한 노래다. 트로트라기보다는 트위스트에 가까운데 이제 막 20대가 된 그의 앳된 음성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2. ‘허공’ – 조용필
- 가왕 조용필이 트로트를 부르면 이런 느낌이다. 무려 ‘그 겨울의 찻집’ ‘바람이 전하는 말’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이 수록된 명반 8집 음반의 타이틀을 차지한 곡.
3. ‘한방의 부르스’ – 전승희 + ‘너는 내 남자’ – 한혜진 + ‘빠이빠이야’ – 소명
-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2000년대 초반에도 트로트 인기가 대단했다. 장윤정에서 화룡점정을 찍었던 트로트 전성시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세 곡. 이어서 들어보자. 노래방에 가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구쳐 오른다는 부작용은 조심할 것.
4. ‘해운대 연가’ – 전철 + ‘위스키 온 더 록’ - 최성수
- 촉촉함을 느껴 느끼함으로 이어지는 아재 감성을 느껴볼 차례다. 코를 찌르는 아픔을 극복하고 나면 홍어의 참맛을 느낄 수 있듯, 최성수의 느끼함을 참아낼 수 있다면 성인가요의 신세계를 맛볼 수 있다.
5. ‘천태만상’ – 윤수현 + ‘얼쑤’ – 윙크
- 역시 트로트는 신나야 제맛. 엔딩곡은 필자의 원픽 트로트 가수 윤수현의 명곡, 그리고 앙코르곡은 2008년에 데뷔한 쌍둥이 자매 윙크의 노래로 마무리해본다. 노래방은 조금만 참았다가 코로나가 진정되면 갑시다.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정치쇼>,<뮤직쇼>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