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일본에서 국내로 환수된 고려시대의 나전국화넝쿨무늬합.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공예품으로 평가받는다.
14년만의 귀환이다. 검게 옻칠한 은은한 표면에 소담하게 국화와 넝쿨 무늬를 짜서 넣은 800년전 당대 세계 최고의 공예품. 12세기 고려시대 송나라 외교사절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매우 정교하고 귀하다는 뜻의 ‘세밀가귀’란 표현으로 극찬했던 명불허전의 나전칠기 명품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2006년 9~10월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특별전 ‘나전칠기-천년을 이어 온 빛’에 출품돼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기억을 아로새겼던 일본 개인 소장품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이하 ’나전합‘)이 마침내 환수된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은 2일 고려시대 나전칠기 공예술을 대표하는 이 나전합을 지난해 12월 일본 컬렉터한테서 사들여 환수했다고 발표했다. 재단이 2013년 이래 환수해온 700건 넘는 문화재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희귀유물이자, 국내 문화재 환수의 역사에 획을 긋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낮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공개된 이 나전합은 하나의 큰 합(모합) 속에 들어가는 여러 개의 작은 합(자합)들 가운데 하나다. 이 나전합은 전세계에 단 3점만 온전한 모양으로 전해져 왔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품과 일본 교토의 사찰인 묘신사 게이슌인(桂春院) 소장품, 그리고 이번에 환수된 일본 컬렉터 소장품이다.
2일 낮 국립고궁박물관 대강당에서 취재진 앞에 공개된 고려시대의 나전국화넝쿨무늬합. 노형석 기자
“국외에 있는 고려 나전 명품은 대부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박물관 소장품이어서 일본 컬렉터 소장품이 유일하게 매입 가능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소유자가 이 작품을 매각할 의사가 있다는 정보를 고미술 업계 제보로 입수한 게 2018년 12월입니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된 그 나전합이 아닐까 짐작하기만 했는데, 지난해 9월 소장자를 만나 그 유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 흥분했지요. 이런 희귀유물의 환수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환수 실무를 맡은 김동현 재단 유통조사부장의 말처럼 유물 정보를 확인하고 환수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여러 곡절이 있었다. 재단 쪽은 2014년부터 환수 목표를 세우긴 했지만, 실제로 교섭이 진척된 것은 지난 1년간이었다. 2018년 12월 컬렉터가 매각 의사가 있다는 정보를 현지 고미술업계 관계자들을 통해 입수했지만, 일본 고미술계 특유의 폐쇄적인 소통 구조 탓에 처음 여섯달간은 지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의사를 전달했고, 지난해 6월부터 직접 만나 교섭을 진행한 끝에 매입을 성사시켰다. 2006년 박물관 전시 당시 담당 기획자로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과 협업하며 나전합의 존재를 국내에 처음 밝혔던 최응천 이사장과 소장자의 인연도 환수 성사에 큰 힘을 보탰다. 실제로 최 이사장은 지난해 12월 유물 매각에 합의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일본에서 소장자를 직접 만나 매매계약서를 쓸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한다.
세계 최고수준의 공예품인 고급 나전칠기 용기들을 생산했으나, 변변한 고려시대 나전 유물 전래품조차 없었던 실정에서 나전합 명품 환수는 더욱 뜻깊은 경사라고 할 만하다. ‘나전합’의 제원과 표현기법을 보면 그 가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유물은 길이 10㎝ 남짓에 무게도 50g밖에 나가지 않는미니 공예품이다. 그럼에도 이 작은 표현 공간에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와 온화한 색감의 대모(바다거북 등껍질),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 등 고려 나전칠기 특유의 격조 높은 미감이 골고루 깃들어 있고 보존상태도 매우 좋다는 점이 놀라움을 안겨준다.
뚜껑과 몸체에 되풀이되는 주요 무늬는 국화와 넝쿨무늬다. 손끝으로 집기 어려울 정도인 1mm 미만의 극소형으로 절개된 나전 조각들이 빈틈없이 붙여져 유려한 무늬들을 빚어냈다.뚜껑의 큰 꽃무늬와 국화의 꽃술 무늬에 고려 나전칠기를 대표하는 특징적 기법 중 하나로 은은하게 색감이 안쪽으로부터 스며들듯 나오는 효과를 보여주는 ‘대모복채법(玳瑁伏彩法)’이 쓰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뚜껑 테두리는 작은 원들이 잇따라 새김된 연주문으로 촘촘히 수놓아졌다. 금속선으로 넝쿨 줄기를 표현하고 두 줄을 꼬아 기물의 외곽선을 장식하는 등 다채로운 문양 요소가 품격 있게 어우러졌다. 최응천 이사장은 “대모를 깎아 붙여 안에서 바깥으로 색깔이 배어나오게 하고, 여기에 나전조각과 금속선을 같이 붙여 꽃넝쿨 문양을 만들었으니 당대 고려는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의 공예 기법이 다 동원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
나전칠기는 고려 중기인 1123년 송나라 사절 서긍이 고려국을 견문하고 지은 기행기인 <고려도경>
에 소개하면서 극히 정교하다는 뜻의 ‘극정교(極精巧)’, 솜씨가 세밀하여 가히 귀하다는 뜻의 ‘세밀가귀(細密可貴)’라는 찬사를 기록했다. 서긍의 기록 이래로 청자, 불화와 함께 고려 미의식을 대표하는 최고의 공예품으로 손꼽혀 왔다.
나전합의 뚜껑과 속이 들여다보이는 본체를 포개놓은 모습.
하지만, 현전하는 고려 나전칠기 유물은 극히 드물다. 전 세계에 불과 20여 점만이 남아있는데, 대부분 미국과 일본의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내 소장품은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단 2점만 있었다. 불교의례 용구인 나전대모칠국화넝쿨무늬 불자(拂子)와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회가 2014년 일본에서 상당부분 수리한 상태로 입수한 불교경전함이 전부였다. 이번에 환수된 ‘나전합’이 추가되면서 좀더 틀 잡힌 구색을 갖추게 됐다.
나전합의 뚜껑 윗부분만을 부각시켜 찍은 사진.
2일 낮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된 고려시대의 나전국화넝쿨무늬합. 문화재청 직원이 합의 크기를 견줘 드러내기 위해 유물 뒤편에서 두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 있다. 노형석 기자
환수된 나전합은 올해 1~3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비파괴분석을 벌인 결과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 제작기법과 재료가 쓰인 것으로 밝혀졌다.
나무로 모양을 잡은 뒤 천을 바르고 옻칠한 목심칠기(木心漆器)이고, 판재 안쪽 면에 일정 간격으로 칼집을 넣고 부드럽게 꺾어 곡선형 몸체를 만들었으며, 바닥판과 상판을 만든 뒤 측벽을 붙여 몸체를 만든 점 등이 확인됐다.
나전합은 곧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소장처가 옮겨진다. 올해 하반기 특별전 ‘고대의 빛깔, 옻칠’에서 일반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전시에 앞서 박물관 쪽에서 유물의 세부에 숨은 여러 요소들을 추가분석한다고 하니 어떤 성과가 나올지 궁금해진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