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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설교도 간섭도 없이, 가만 지켜보는 할아버지와 여름밤

등록 2020-08-21 19:47수정 2020-08-22 02:32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남매의 여름밤>

네 귀퉁이 벽에 다는 옛 모기장
마당엔 방울토마토·고추 열리는
할아버지 이층집에서 여름방학

중학생 누나와 초등학생 남동생
또다른 남매 아빠·고모도 함께
상처·흉터 드러나도 안전한 밤
할아버지의 공간(이층집)이 영화의 배경이지만, 그의 대사는 “너 좋을 대로 해” “응, 조금만” 두 마디 정도다. 조용히 지켜보는 시선이 유지하는 거리에 연민, 그리움, 죄송함, 애틋함 등 수많은 감정이 깃든다. 오누필름 제공
할아버지의 공간(이층집)이 영화의 배경이지만, 그의 대사는 “너 좋을 대로 해” “응, 조금만” 두 마디 정도다. 조용히 지켜보는 시선이 유지하는 거리에 연민, 그리움, 죄송함, 애틋함 등 수많은 감정이 깃든다. 오누필름 제공

<남매의 여름밤>이라는 하절기 시즌 합치적인 제목에 ①여름방학 ②아빠와 함께 할아버지 댁에서 방학을 보내게 될 ③중학생 누나와 초등학생 남동생, 그리고 그곳에서 오랜만에 만나 함께 지내게 된 ④친구 같은 고모, 게다가 ⑤잔디 깔린 집 앞마당 ⑥그 마당의 텃밭에서 딴 싱싱한 토마토·고추 같은 채소 ⑦그 재료들을 넣은 콩국수·수박·비빔국수 등등의 여름 제철음식들, 그리고 이 모두를 품고 있는 ⑧옛날식 2층 단독주택 등등의 키워드들까지 한데 모이면 거의 자동으로 다음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겠다. ‘스마트폰과 게임에 찌들고 경쟁과 학원 돌리기에 지쳐 체력도 정서도 너덜너덜해진 아이들과, 그 아이들과 씨름하며 매일 킥복싱 24라운드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어른들을 위한 방학특집 힐링 고향집 무비’.

_______________
가족, 질긴 섬유질 같은 감정들

비록 <집으로…>풍의 깊은 산속 오두막이나 <리틀 포레스트> 같은 시골집까지는 아니지만, 과연 중학생 ‘옥주’(최정운)와 초등학생 ‘동주’(박승준)가 방학 동안 머물러 간 할아버지 댁은 충분히 그런 여름방학 무비를 위한 조건을 갖춘 듯하다. 할아버지 혼자 지내고 계신 이 2층 양옥집이 있는 동네는 아파트 장벽이 산맥을 이루는 그런 카인드 오브 동네가 아니라 한적한 앞길, 엇비슷한 높이의 이웃집들, 동네 슈퍼, 그리고 그 너머로 야산과 넓은 하늘을 모두 갖춘 주택가다. 그 집엔 앞마당과 텃밭이 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문 위에는(이 대문에는 초인종은 물론 ‘찡-’ 하는 전기음을 내며 열리는 문고리가 달려 있다) 멀쩡한 포도가 열리는 포도덩굴까지 자라고 있다.

집 안의 정경은 한층 더 추억스러워서 시간이 족히 20년은 멈춘 듯하다. 1층 거실(보다는 ‘마루’라고 불렸던) 한쪽 벽에 쌓여 있는 컴포넌트 오디오와 노래방 기계는 선풍기 바람처럼 뽕짝 메들리를 계속해서 흘리고 있고, 빨랫줄이 가로지르고 있는 널찍한 2층 베란다에서는 동네 풍경과 그 위의 하늘이 훤히 보인다. 남매가 자는 방에는 네 귀퉁이를 벽에 매다는 옛날식 모기장(혹 뭔지 모르시면 <이웃집 토토로> 참조)이 쳐지고, 그 공간을 두고 남매가 쟁탈전을 벌이는 등등 <남매의 여름밤>의 공간은 이젠 전국 어디에서든 멸종돼가는 추세인지라 시골집보다도 더 희귀하고도 추억스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핵심 캐릭터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마침표를 찍듯 ‘막내의 재롱과 매력’이라는 필수 아이템까지도 착실히 얹어지고 있다. 동주 역의 박승준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도 그렇거니와, 특히나 그가 선보이는 ‘반바지 뒤집어쓰고 개다리춤’은 단연 올해의 몸개그 상에서 메달 색깔만이 문제일 장면이었다 하겠는데, 아무튼 작금의 8, 90년대에 대한 추억지향적 분위기로 볼 때, <남매의 여름밤>은 21세기의 <집으로…>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듯 보인다.

오누필름 제공
오누필름 제공

하지만 <남매의 여름밤>은 그 안전선 안에 머무는 대신, 현실의 묵은 먼지와 찌든 얼룩 그리고 생채기들과 흉터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방향을 취한다. 굳이 말하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걸어도 걸어도>나 <태풍이 지나가고> 등의 작품에서 취했던 바로 그 방향 말이다. 하지만 <남매의 여름밤>에는 자신만의 길과 도착점이 있다.

일단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하면서도 핵심적인 포인트는 영화 속 남매가 중학생 옥주와 ‘초딩’ 동주 남매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남매에는 두 아이의 아빠 ‘병기’(양흥주)와 그의 동생=아이들의 고모 ‘미정’(박현영) 남매도 있다. 이 성년 남매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렇듯 각자의 문제를 잔뜩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 영화는 그것을 표백하고 걸러내는 대신, 오히려 메인 메뉴로 내놓는다.

살던 반지하 집이 있는 동네 전체가 철거되면서 두 아이의 방학 동안 아버지(아이들의 할아버지)의 집으로 피신(또는 피난) 가게 된 아빠. 그는 이혼까지 한 마당에, 당장 먹고사는 것이 문제다. 아버지에게 “방학 동안만 여기서 지낼게요. 괜찮죠?”라고 속이 빤히 보이는 말을 하는 그는 거짓말에도 그다지 능하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아버지의 병환을 핑계로 집으로 슬그머니 밀고 들어온 고모 역시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와 지낼 곳이 딱히 마땅찮다. 이혼해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오빠와 함께 지내며 이혼을 고민한다. 그리하여 아빠는 미니밴으로 용달 일을 하는 중간중간에 유명 브랜드 운동화 박스들을 싣고 나가 목 좋은 곳에 좌판을 펼치고, 일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온 고모는 오빠와 함께 쌓인 짐을 뒤져 아버지의 묵은 술병을 찾아내 뚜껑을 딴다.

사춘기 소녀 옥주 역시 그 팍팍한 현실의 중력권에 있음은 물론이다. 옥주는 좋아하는 남자애의 생일선물로 아빠의 운동화 박스 하나를 슬쩍한다. 그리고 돈이 궁한 것이 뻔한 아빠에게 쌍꺼풀 수술을 조른다. 하지만 옥주는 “비굴”해지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떠난 엄마에게는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세상 걱정들이 다 피해간 듯 천진하고 명랑하며 솔직한, 한마디로 아이다운 ‘초딩’ 남동생은 누나의 자존심 지키기에 합류할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인다. 모기장 안 “내 구역”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는 누나를 팔짱 낀 채 내려다보며 “저런 걸 누나라고…”라고 뇌까리는 등 유사시에만 필요시에만 어른스러워지는, 하지만 엄마를 보고 싶고 엄마가 잔뜩 사주는 선물이 좋은 전형적 ‘초딩’일 뿐.

이렇게 각자의 인생을 끌어안고 있는 크고 작은 네 명의 인간들의 크고 작은 일상과 사건과 감정들이 ‘여름방학’이라는 시간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킨다. 독자 여러분의 즐거움을 망치지 않기 위해 그 사건 하나하나를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처럼 자제하겠다만, 어쨌든 그 안에는 가족의 유대감과 정, 이해와 화해 등의 소화하기 편한 감정뿐 아니라 뻔뻔함과 죄책감, 미움과 원망, 경계와 방어, 그리고 의뭉스러움 등 질긴 섬유질 같은 감정들도 그대로 살아 있다는 점은 이야기해야 하겠다. 아무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것들 전혀 없이, 유백색 생크림과 파스텔톤 마카롱 같은 감정만을 품고 사는 가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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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너 좋을 대로 하거라

오누필름 제공
오누필름 제공

그 모든 것을 2층 양옥집이라는 공간이 두르고 있다. 그 공간은 곧 옥주-동주의 할아버지(김상동)다. 영화를 통틀어 “너 좋을 대로 해”와 “응, 조금만” 두 마디 정도의 대사만 있을 뿐인 할아버지는 마치 집의 일부분처럼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있거나, 정원 텃밭에 물을 주거나, 손자와 방울토마토를 따거나, 여섯 자짜리 옻칠 자개장이 철 지난 자존심의 마지막 증명처럼 한쪽 벽을 꽉 채우고 있는 안방에 그냥 누워 있다. 하지만 텅 비어 있는 듯한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네 사람=두 남매의 회전의 중심이다. 마치 도넛의 가운데 공백이 도넛에겐 중심이자 존재 근거인 것처럼.

하여 할아버지에게 극미량의 대사만을 할애하면서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 영화의 선택은 실로 적절하다. 그 시선이 유지하고 있는 거리 안에 우리는 연민, 그리움, 죄송함, 애틋함,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감정을 넣을 수 있다.

그 힘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아마도, 한밤중에 잠이 깬 옥주가 불 꺼진 1층 거실에서 홀로 소파에 앉아 옛 노래(신중현이 작사·작곡한 ‘미련’이다)를 듣는 할아버지를 몰래 지켜보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둘 사이에 일어나는 공진의 주파수는, 서로 말은 물론 시선이나 기척조차 나누지 않기에 순식간에 최대폭으로 증폭된다. 이것은 과연 여백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 할 만하다.

<남매의 여름밤>이 취하고 있는 ‘오컴의 면도날’(똑같은 결과를 얻는다면, 가장 간단한 답이 가장 옳은 해답이다)적인 태도는 단지 할아버지 캐릭터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장면들에서 움직임 없이 인물과 사물을 지켜보는 촬영, 컷을 최소화하면서도 넘치기 직전에 다음 장면으로 곧바로 넘기는 편집의 타이밍, 그리고 일상적이고 짤막한 말들에 최대한 많은 것을 담는 대사들(덕분에 아빠와 고모가 영화 후반, 동네 구멍가게 앞 평상에서 마침내 꺼내게 되는 “그 집 오빠 거 아니라는 건 알지…?” “알지…” 같은 대사에 실리는 하중은, 간단히 한계 하중 직전에까지 육박한다), 그리고 대사로 설명하기보다는 상황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드러내도록 하는 시나리오는, 이 영화가 윤단비 감독(각본·연출·제작)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특히나 놀랍다.

점점 많은 예술영역에서 점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식으로든 프로파간다가 되어가고 있고, 점점 더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이런 프로파간다 전성시대에서 이 영화의 시선, 삶을 간섭이나 설교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 귀 기울여주는 시선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이 시선이, 영화 속 텃밭의 방울토마토처럼 단단히 잘 여물어주기를 기대한다. 이런 기대를 품게 하는 것 또한 여백이 지닌 또 다른 힘이리라.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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