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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막장 드라마도 인권은 안답니다

등록 2020-09-18 20:28수정 2020-09-19 02:34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브라질 드라마 <오펀스 오브 어 네이션>
웨이브 제공
웨이브 제공

2015년, 시리아는 내전이 한창이다. 젊은 라일라(줄리아 달라비아)와 가족들은 전쟁의 그늘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막내 칼리드의 생일 파티가 있던 날, 갑작스러운 공습이 온 동네를 초토화한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라일라 가족은 친척이 사는 브라질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한달여의 고통스러운 행군 끝에 베이루트 난민촌에 도착한 라일라는 그곳에서 보스의 명령으로 일꾼을 찾으러 온 청년 자밀 자리프(헤나투 고이스)를 만난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운명을 느끼지만, 하필이면 자밀의 잔혹한 보스 아지즈 압둘라(에르송 카프리)가 라일라에게 혼인을 요구해온다.

브라질 드라마 <오펀스 오브 어 네이션>(원제 Órfãos da Terra)은 지난해 방영 당시 현지에서 뜨거운 호평과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다. 주로 중남미에서 제작되는 텔레노벨라는 흔히 복수, 음모, 배신, 치정 등 통속적인 소재를 다뤄 ‘서구의 막장 드라마’라 불리기도 하지만, <오펀스 오브 어 네이션>에는 이 같은 장르에 대한 편견을 깰 만한 요소들이 포진해 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제15회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도 최고상의 영예를 안으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브라질 드라마가 대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오펀스 오브 어 네이션>에서도 사랑과 배신, 복수의 드라마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가족을 위해 애정 없는 결혼을 결심한 라일라와 아들처럼 키워준 보스의 여자에게 반한 자밀의 로맨스는 텔레노벨라 장르의 주요 흥행 공식을 따라간다. 다만, 이 작품의 미덕은 그 전형적인 플롯 안에 난민, 여성 인권과 같은 동시대 글로벌 이슈를 녹여낸 문제의식에 있다. 라일라와 자밀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단순한 치정이 아니라 세상의 거대한 폭력이며, 두 청춘의 도피 행각은 그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뜻한다.

웨이브 제공
웨이브 제공

특히 여성 캐릭터의 현대적 묘사가 돋보인다. 여성 억압적 전통의 극단에 “남자가 가진 욕구는 여자들이 무조건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외치는 아지즈 압둘라의 가부장적 독재가 있다면, 반대편에는 그와 가장 밀접한 관계의 세 여성이 벌이는 투쟁이 있다. 주인공 라일라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아지즈와의 매매나 다름없는 결혼에 뛰어든 전통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상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라일라의 투쟁은 이 작품을 전쟁과 가부장적 문화의 두가지 폭력으로부터 동시에 벗어나려는 여성의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게 만든다. 라일라가 여성 억압의 상징인 부르카를 역이용해 시련을 극복하는 2회의 한 장면은 이러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라일라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떠올리는 아지즈의 첫 부인 소라이아와 아지즈의 잔혹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나 자기 의지가 강력한 딸 달릴라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라틴아메리카는 페미니스트가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혁명이다!”를 외치는 상파울루의 여성인권운동가 시벨리도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다.

여기저기서 ‘케이 콘텐츠’에 대한 상찬이 들려오는 때에, <오펀스 오브 어 네이션>은 세계 드라마의 다양성 안에서 한국 드라마의 현주소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현재 이 작품은 제15회 서울드라마어워즈 온라인 상영관으로 선정된 동영상 서비스 업체 웨이브에서 일부 에피소드를 감상할 수 있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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