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협옹주묘 출토 화장품의 성분을 바탕으로 현대 제품으로 제작한 청화백자 용기의 화장품들. 2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 모습이다.
22일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정용재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화협옹주묘 출토 화장품을 바탕으로 새로 개발한 화장품을 진열해놓고 신제품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땅속에서 나무로 만든 말이 나왔습니다.”
2015년 8월13일 경기도 남양주시청 문화관광과에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제보한 이는 남양주시 삼패동에 살던 농민 김정희씨. 집 주변 파밭을 일구다 옻칠 된 목제 말 조각들이 든 돌함을 발견한 그는 망설이다 밭을 지나던 경찰관의 권고를 듣고 바로 신고를 한 참이었다.
현장을 긴급 발굴한 고려문화재연구원은 유물을 수습하고, 다른 돌함과 작은 백자호와 칠기그릇 등의 명기와 벼루 등도 찾아냈다. 왕족 무덤의 자취였다. 하지만 발굴 비용을 조달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1년을 기다려 문화재청 지원 아래 재조사에 착수한 연구원 쪽은 ‘대박’을 터뜨렸다. 유적은 18세기 조선 영조 임금의 셋째 딸이자 뒤주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1735~1762)의 친누나 화협옹주(1733~1752)가 이장되기 전 첫 무덤(초장지)이었다. 옹주는 10살 때 영의정 신만의 아들 신광수와 혼인한 뒤 9년 만에 홍역을 앓다 숨진 비운의 여인이었다. 무덤 안에서는 부친 영조가 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을 새긴 지석(誌石: 망자의 인적 사항과 정보를 기록해 묻은 편편한 돌)과 청화백자합 등 당대 왕실 여성의 화장품 세트 10점, 일본산 청동거울 등이 무더기로 나왔다.
2016년 화협옹주묘 발굴 직후 수습한 18세기 화장품 용기들. 삭은 보자기 안에 들어 있었다.
김아관 당시 실장을 비롯한 발굴단은 회곽으로 봉한 무덤 속 세번째 석함 안에서 삭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청화백자 화장품 용기들이 우르르 나오자 잔뜩 흥분했다. 김 실장은 햇빛에 노출되면 바로 훼손될 것이란 직감이 들어 곧장 복식사 연구기관인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으로 연락했다. 바로 달려온 박물관 연구자들과 1시간여 만에 신속하게 수습해 항온·항습 장치에 넣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인계할 수 있었다.
다시 1년이 흘러 2017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이 공개한 화장품 용기 10점의 분석 결과는 엽기적일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손바닥 크기의 청화백자 팔각항아리에 든 액체를 확대해보니 황개미 유체 수백 마리가 검출됐다. 왜 황개미를 썼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얼굴에 팩 하는 효과를 내는 고운 흙, 밀랍과 유기물을 섞은 크림, 립스틱처럼 바르는 진사 가루, 탄산납과 활석을 섞은 파운데이션 재료 등도 확인됐다. 특히 용기 속 재료 상당수는 얼굴을 하얗게 하는 미백효과를 지녔으나 독성 때문에 쓰지 않는 납과 수은 성분을 함유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기생뿐 아니라 최상층 왕실 사대부 여성들도 중금속 광물질과 식물 재료, 개미까지 활용해 얼굴 미용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는 사실이 다양한 실물로 처음 실증된 것이다.
화협옹주의 무덤 출토 화장품 단지 내용물에서 나온 황개미의 머리 부분.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 모습이다. 황개미를 화장품이나 미용 재료로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4년간 숱한 곡절을 거치면서 실체가 드러난 화협옹주의 화장품이 21세기 현대 제품으로 부활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2일 오전 강당에서 한국전통문화대, 화장품 제조업체 코스맥스㈜와 손잡고 개발한 ‘프린세스 화협’이란 상호의 신제품을 공개했다. 옹주묘 출토 화장품 성분을 분석했던 정용재 한국전통문화대 교수팀은 코스맥스 기술진과 함께 인체 적용 실험을 거쳐 제작한 백색크림과 전통 재료 성분을 포함한 파운데이션, 보습용 손크림, 입술보호제(립밤)를 선보였다. 정 교수는 “전통 미용 문화재의 가치를 담은 이른바 ‘케이(K) 뷰티’의 새 전형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추진한 문화유산 재활용 사업의 결과물”이라며 “밀랍, 홍화 꽃잎 등의 옹주묘 출토 화장품 성분이 함유됐고, 내용물도 원래 묘의 화장품 용기를 단순화한 현대 청화백자 용기에 넣어 브랜드의 내력과 이미지를 강조했다”고 밝혔다. 옹주묘 출토 화장품에서 색감을 내는 주성분은 연백 등의 독성 강한 중금속들이다. 이런 성분을 배제하고 자연재료 대체물을 넣어 만든 새 화장품들은 향이나 색감보다는 깔끔한 청화백자 용기의 디자인이 더욱 돋보였다. 출토된 화장품 성분들만으로는 중금속 중독 우려가 있고, 발색력이 떨어지며 쉬 부패하는 등의 단점이 있어 현대 재료를 섞어 대체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는 게 정 교수의 말이다. 실제로 이날 나온 건 시제품이고, 본격적인 판매는 보완 과정을 거쳐 연말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보면, 화협옹주는 생전 자태가 아름다웠고 침착하며 효심도 깊었으나, 사도세자처럼 영조에게 냉대를 받아 동병상련의 정이 각별했다고 한다. 이날 함께 나온 캐릭터 이미지는 이런 옹주의 자태를 상상해 구현한 것이기도 하다. 70년대 이장한 뒤 잊혔던 그의 초장지에서 우연히 발굴된 화장품 유물이 출토 4년여 만에 현대식 제품으로 개발되고 캐릭터까지 나왔으니, 스무살 되기 전 숨진 옹주의 기구한 삶과 얽혀 ‘새옹지마’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고궁박물관·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