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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미-중 대립 최전선 남중국해 ‘아시아의 발칸’ 되나

등록 2021-02-27 04:59수정 2021-02-27 09:20

[토요판] 커버스토리
위험수위 향하는 G2 기싸움

미 바이든 행정부 출범하자마자
항행 자유 작전, 항모 동시 투입
‘트럼프보다 무르지 않다’ 경고
대만문제 겹쳐 긴장 파고 고조

군함 통항의 자유 이견이 본질
미국은 해군 활동 자유에 사활
중국은 ‘바다의 만리장성’ 구축
해군력 격차는 갈수록 좁혀져
미국 해군의 시어도어 루스벨트호와 니미츠호 항모강습단이 9일 남중국해에서 합동훈련을 하고 있다. 미국 해군 제공
미국 해군의 시어도어 루스벨트호와 니미츠호 항모강습단이 9일 남중국해에서 합동훈련을 하고 있다. 미국 해군 제공

▶ 50년 전인 1971년 7월9일 파키스탄 방문 중 종적을 감춘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마술사라도 된 듯 돌연 중국 베이징에 나타났다. 양국은 공동의 적 소련에 맞서 의기투합했다. 20세기 외교사의 중대 사변인 미-중 데탕트의 막이 올랐다. 중국은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급성장했지만, 미국은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중국은 자신들이 기대한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금 최저점으로 떨어진 미-중 관계는 패권 다툼에 여념이 없다. 막 닻을 올린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남중국해 문제에서 고삐를 더욱 죌 태세다. 중국은 1인치도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선다. 미국은 남중국해도 ‘항행의 자유’ 원칙의 예외로 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중국은 이곳을 완충지대로 본다. 21세기의 평화는 무엇보다 이 바다의 운명에 달렸다.

“내 사촌 프랑수아와 난 완벽히 일치해. 그는 밀라노를 원하고, 나도 그래.”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와 네차례나 전쟁한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말이다. 둘이 언제나 이탈리아라는 똑같은 목표를 노리니 싸움이 그칠 리 있겠냐는 뜻이다. 두 나라가 하나의 대상을 놓고 절대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으면 충돌 가능성은 높아진다.

지금 세계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을 불안한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다. 미-중은 500년 전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이탈리아처럼 남중국해라는 하나의 물리적 영역을 놓고 밀리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남중국해는 1차 세계대전 직전 발칸반도에 비유되기도 한다. 유럽 동남쪽 구석의 발칸반도는 주변국들의 영토 주장, 배후 제국들의 장악 시도, 뜨거운 민족주의가 맞부딪치면서 큰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그와 엇비슷한 처지의 뜨거운 바다 남중국해는 충돌의 발화점이 될 것인가.

요란한 무력시위 재개

이달 17일 미국 해군 구축함 러셀호가 남중국해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에서 중국이 점유한 섬의 12해리 안으로 항해하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했다. 미국 해군 제7함대는 “중국, 베트남, 대만의 무해통항(해당국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고 지나갈 권리)에 대한 불법적 제한에 맞섬으로써 국제법에 근거한 해양에 대한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항행의 자유 작전은 지난달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고 두번째였다. 앞서 이달 5일 구축함 존 매케인호가 파라셀제도(중국명 시사군도) 해역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했다.

두차례 항행의 자유 작전과 그 전후 상황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양쪽의 의지를 다시 과시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3일 시어도어 루스벨트호 항모강습단이 남중국해로 진입한 게 신호탄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 과정에서 중국 폭격기가 루스벨트호에 미사일을 쏘는 시뮬레이션 훈련을 했다고 정보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9일 남중국해에서 미국 해군 항모 니미츠호와 합동훈련에 나선 시어도어 루스벨트호 갑판에서 F/A-18E 슈퍼호넷 전투기가 발진하고 있다. 미국 해군 제공
9일 남중국해에서 미국 해군 항모 니미츠호와 합동훈련에 나선 시어도어 루스벨트호 갑판에서 F/A-18E 슈퍼호넷 전투기가 발진하고 있다. 미국 해군 제공

매케인호는 이런 상황에서 4일 중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대만해협을 통과해 남중국해 파라셀제도로 향했다. 9일에는 먼저 도착한 루스벨트호에 니미츠호 항모강습단이 합류해 두 척의 항공모함이 남중국해에서 함께 훈련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미군이 지난해 7월에 이어 다시 항모 두 척을 투입하자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스>는 자국 ‘항모 킬러’ 둥펑-26 미사일은 남중국해 전역을 겨냥할 수 있다며 “전쟁이 나면 미국 항모는 중국 미사일 사정권 밖에 머물러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군 기관지 <성조지>는 제임스 커크 니미츠호 항모강습단 사령관이 곧장 “우리는 다른 나라 군대의 능력을 유념하고 있다”, “걱정할 일은 없다”고 응수했다고 전했다.

남중국해 신경전에는 대만 문제까지 겹쳐지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대만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해온 중국 군용기들은 최근 남중국해 최북단에서 대만이 실효지배하는 프라타스제도(대만명 둥사군도) 상공에서 잇따라 훈련하고 있다.

중국이 해양경비대에 무기 사용을 명시적으로 허용한 것도 반중국 진영을 긴장시키고 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지난달 22일 “주권과 관할권을 침해하는 외국 기관과 개인에 무기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해경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주요 상대인 필리핀은 “사고가 발생하면 항의 이상의 것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다. 미국 국무부는 중국이 무력을 사용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다.

바이든의 기선 제압

미군이 10여일 사이에 두차례 항행의 자유 작전과 2개 항모강습단 합동훈련을 진행한 것은 이례적으로 강도가 높은 행동이다. 갓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가 ‘우리를 무르게 보지 말라’며 허니문은 없다고 중국에 경고한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강한 구두 경고도 내놨다. 이달 4일 국무부에서 한 연설에서 미국의 번영, 안보, 민주주의 가치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가장 심각한 경쟁자 중국”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또 “중국의 커지는 야망”과 “전제주의의 성장”에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7일 방영된 <시비에스>(CBS) 인터뷰에서는 중국과의 “극단적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10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취임 후 첫 통화에서도 “중국의 강압적이고 불공정한 경제적 행태, 홍콩 인권탄압, 신장에서의 인권침해, 대만을 비롯한 지역 문제에서의 갈수록 공격적인 행동”에 문제 제기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유지”에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입장도 밝혔다고 한다.

이런 메시지와 행동은 바이든 행정부가 대중국 강경책만큼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한테 물려받겠다는 의지를 과시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지난달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트럼프가 중국에 강한 태도를 보인 것은 옳았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12월 내놓은 ‘국가안보전략’(NSS)에서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했다. 중국을 러시아와 함께 미국 주도의 질서를 허물려는, 즉 현상을 타파하려는 ‘수정주의’ 국가로 칭한 것도 대중국 전략의 전환점으로 평가받았다.

중국도 초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태도다. 외교 사령탑인 양제츠 정치국원은 이달 2일 ‘미-중 관계 전미위원회’ 행사 화상연설에서 트럼프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는 “전략적 오판”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새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를 답습하지 말라는 요구다. 중국 해군은 지난달 27~30일 남중국해 통킹만에서 훈련했다. 대만 방공식별구역에 군용기를 빈번히 투입하는 것도 대만과 미국 양쪽을 겨냥한 무력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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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만리장성

미국의 중국 견제의 핵심 주제는 홍콩과 신장 등에 관한 인권 문제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으로 표현하는 남중국해 문제로 나뉠 수 있다. 전자는 가치의 문제이고 후자는 전략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남중국해 통과 무역량이 연간 5조3천억달러(약 5885조원)어치로 전체 세계 무역액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남중국해는 동아시아의 주요 에너지 공급 통로로,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세계 물동량의 30~40%가 지나는 곳이다. 멕시코 매장량과 비슷한 110억배럴의 원유가 매장돼 있고, 천연가스 매장량도 막대하다. 중국·대만·베트남·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브루나이는 저마다 해양주권 기준과 실효지배 지형물, 역사적 소유권을 근거로 각축하고 있다.

이런 노력들 중 주변국들 반발을 크게 사는 게 중국의 구단선이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가기 전인 1947년에 역사적 근거가 있다며 내세운 구단선은 9개 점선으로 연결한 해상 경계선이다. 이를 이어받은 중국 공산당 정부는 2009년 “남중국해 섬들과 인접 해역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주권”을 구현하는 구단선을 경계로 하는 지도를 유엔에 제출했다. 중국 정부는 그해에 대만, 티베트, 신장이라는 ‘핵심 이익’ 목록에 남중국해를 추가했다. 중국이 구단선 안의 전부에 주권을 주장하는지, 아니면 자국 점유 지형물들과 주변 해역만을 뜻하는지는 모호하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중국이 구단선 안의 모든 수역을 내수나 영해라고 주장한다는 말은 순전한 사실무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1974년 파라셀제도에서 남베트남군을 몰아내고, 2012년부터는 스카버러암초 수역에서 필리핀의 접근을 차단하고, 주변국 어선이나 시추선 활동을 방해하는 것을 보면 가능한 한 넓은 면적을 장악하려는 의지는 뚜렷해 보인다.

17일 남중국해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하는 미국 해군 유도미사일 구축함 러셀호 함상에서 한 장교가 쌍안경으로 해상을 관찰하고 있다. 미국 해군 제공
17일 남중국해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하는 미국 해군 유도미사일 구축함 러셀호 함상에서 한 장교가 쌍안경으로 해상을 관찰하고 있다. 미국 해군 제공

특히 2015년 전후로 진행된 남중국해 군사화는 미국의 큰 반발을 불렀다. 중국은 스프래틀리제도와 파라셀제도의 섬, 암초, 모래톱에 활주로, 격납고, 미사일기지, 레이더 등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가라앉지 않는 항모’를 만든 것이다. 미국은 이를 위해 간척사업으로 지형물을 키우고 인공섬을 만든 것도 도발적 행동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2015년 9월 백악관을 방문한 시진핑 주석이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항의에 “(스프래틀리의) 군사화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약속을 깼다고 비난한다. 미국은 시 주석이 그 전해에 베이징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에게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 양쪽의 성장을 수용할 만큼 넓다”고 한 것을 야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시 주석은 2018년 6월 남중국해 군사화 문제를 거론한 제임스 매티스 당시 미국 국방장관에게 “조상들이 물려준 영토는 단 1인치도 잃을 수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구단선은 필리핀이 유엔해양법협약을 근거로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에서 2016년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판정으로 큰 구멍이 났지만, 중국은 판정 결과를 수용하지 않았다.

해리 해리스 전 주한 미국대사는 태평양사령관 시절인 2015년 간척사업을 통한 중국의 남중국해 군사화를 “모래의 만리장성”이라고 표현했다. 북방 유목민족 저지가 중국 전통 왕조들의 최우선적 안보 관심사였다면 지금 중국은 해양세력 차단에 주력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군사화와 정주 정책이 함께 진행되는 것도 남중국해와 만리장성의 비유를 그럴싸하게 만든다. 중국 정부는 2012년 파라셀제도의 우디섬(중국명 융싱다오)을 관청 소재지로 싼사시를 설치해 남중국해의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했다. 중국 해군은 지난해 1천여명이 사는 이 우디섬에서 채소를 수확해 식량 자급자족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발표했다. 과거 만리장성 등 변방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도록 둔전을 설치한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경작 활동은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애초 사람들이 살며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프래틀리제도의 중국 지형물들에 배타적경제수역 설정 근거가 없다고 한 것을 의식한 조처이기도 하다.

더 멀리, 더 가까이

미국 해군 제독 출신으로 <해군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1890)을 쓴 앨프리드 머핸은 “파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다. 남중국해의 미-중 대립은 본질적으로 군사전략적 맥락이 핵심이다. 어차피 미국에는 영유권을 주장할 단서도 없다. 미국은 최근 들어 영유권 분쟁에서 동남아 국가들 편을 들려고 하지만 요점은 항행의 자유다. 중국도 항행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서로 다른 자유를 말한다는 점이다. 미국에게 항행의 자유란 군함과 군용기가 다닐 수 있는 자유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미국은 유엔해양법협약이 타국의 12해리(1해리=1.852㎞) 안 영해에서도 군함 무해통항권을 보장한다고 본다. 그래서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섬, 암초, 인공섬의 12해리 안으로 진입하는 게 항행의 자유 작전의 한 방식이다. 무해통항은 훈련이나 정찰을 하지 않고 단시간에 통과하는 것이므로, 미군 함정은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섬으로부터 12해리 안에서는 직선으로 지나간다.

무해통항이 아닌 항행의 자유 작전도 한다. 하나는 중국이 여러 섬 외곽을 연결한 선을 영해 기점으로 삼은 곳이다.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행위는 지나치게 넓은 수역을 영해로 삼기에 해양법협약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섬들 사이로 군함을 투입해 각 섬의 12해리 밖에서 지그재그로 항해하거나 훈련과 정찰을 한다. 12해리 밖이면 ‘유해통항’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5일 매케인호가 파라셀제도에서 그렇게 했다. 또 하나는 밀물 때 물에 잠기는 간출지처럼 12해리 영해 주장이 부당하다고 보는 지형물이다. 이런 곳에서도 미군은 지그재그 항해와 훈련으로 중국의 영해 주장에 도전한다. 중국군은 항행의 자유 작전을 하는 미군 함정이나 군용기를 발견하면 무선통신으로 ‘너희는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 당장 떠나라’고 경고한다. 지형물 상황에 따라 지능적이고 다양한 시나리오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하는 미군과 이를 쫓는 중국군의 숨바꼭질이 이어지는 것이다.

미국과 달리 중국은 해양법협약이 상선과 군함에 똑같은 무해통항권을 부여했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외국 군함이 자국 영해를 통과하려면 사전 통고와 허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대만이나 베트남도 마찬가지 주장을 한다. 17일 스프래틀리제도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한 미군이 베트남과 대만까지 거론한 것은 두 나라도 이곳 영유권을 주장하며 같은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영해 너머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에 대한 입장 차이도 확연하다. 미국은 배타적경제수역은 경제적 권리 말고는 그 밖에 있는 공해와 별 차이가 없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배타적경제수역에서 외국 해군 활동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본다. 반면 중국은 외국 군함은 배타적경제수역에서 무해통항 기준을 지켜야 하고, 허가 없이 훈련이나 정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미국은 자국 주장이 다수설이라지만, 브라질과 인도 등 일부 국가들은 중국과 같은 입장이다.

국제법 해석 차이가 바탕에 깔렸지만, 결국 무력시위와 신경전의 요체는 평소 상대에게 얼마나 가까이 비수를 들이댈 수 있느냐, 또는 상대를 얼마나 멀리 떨어뜨려놓느냐의 문제다. 배타적경제수역에서 제3국의 군사활동 통제권은 중국에게는 본토 방어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반면 해양의 자유가 세계 전략의 주요 수단인 미국으로서는 중국 주장을 수용한다면 해군력 우위의 이점이 줄어든다. 상대의 가까운 바다에서 항해할 수 없다면 훈련과 정찰이 어렵고, 유사시 화력 사용이나 상륙작전에 차질이 있기 때문이다. 남중국해의 중국 군사시설도 이 해역과 중국 본토에 대한 접근에 장애가 된다.

미국은 군함 항행의 자유를 비롯한 해양의 자유를 전쟁 명분으로 내걸 정도로 중시해왔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8년 “절대적 해양의 자유”를 위해 1차대전에 뛰어들었다고 밝혔다. 2차대전을 이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해양의 자유 정책 유지”가 미군의 임무라고 했다. 그래서 미국은 남중국해를 비롯한 서태평양에서 100년 넘게 누린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지난해 나온 미국 의회조사국 보고서는 지중해와 페르시아만 등 전세계에서 미국 해군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미국의 관점에서 배타적경제수역 논란은 영해 논란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8년 4월 남중국해에서 군함 48척과 장병 1만여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 해상 열병식에서 함대를 사열하고 있다. 시 주석은 “강력한 해군 건설의 임무가 오늘날처럼 긴요했던 적이 없다”고 연설했다. 신화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8년 4월 남중국해에서 군함 48척과 장병 1만여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 해상 열병식에서 함대를 사열하고 있다. 시 주석은 “강력한 해군 건설의 임무가 오늘날처럼 긴요했던 적이 없다”고 연설했다. 신화 연합뉴스

바다의 동물

1942년 8월 대독일 공동전선을 논의하려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영국은 바다의 동물, 러시아는 육지의 동물”이라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해군장관 출신인 자신과 영국은 해전에는 이골이 났으니 소련(러시아)은 지상전에 신경쓰라는 얘기였다. 처칠의 인식에서 엿보이듯 영국이나 미국을 해양세력, 러시아나 중국을 대륙세력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지난해 9월 미국 국방부의 ‘2020 중국 관련 군사·안보 동향’ 보고서에는 통념을 깨는 내용이 들어갔다. 중국 해군 전함이 350척으로 미국(293척)을 앞섰다며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이는 해군력은 총톤수로 비교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장된 평가이기는 하다. 미국 해군 전함 총톤수는 460만톤, 중국 해군은 200만톤가량이라는 추산이 있다. 미국은 항모를 11척 보유하고 있고, 중국은 세번째 항모를 만들고 있다.

성장세는 중국이 가파르다. 중국 전함 수는 2005년보다 1.5배 증가한 반면 미국은 2척이 추가됐을 뿐이다.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국이 총 6척의 항모를 가지려 한다는 추정이 나온다. 중국은 대외 개방으로 경제가 이륙을 본격화하던 1990년대부터 해군 현대화에 착수했다.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은 2012년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해양 주권과 이익 보호를 위한 ‘해양 강국’ 건설을 선언했다. 2019년 중국 국방백서는 중국 해군이 ‘근해 방어’에서 ‘원해 방어 작전’으로 임무를 전환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고 밝혔다. 남중국해 상황 등이 군비 경쟁을 자극하면서 미국도 해군력 증강에 의지를 보이고 있다. 2031~2033년 전함 수를 355척, 2045년에는 406척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미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 해군력이 아직 상당한 우위에 있으나 남중국해만 놓고 보면 사정이 다르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군 전력은 흩어져 있는 반면 중국은 근처에 해군력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보급과 병력 이동을 위한 병참선이 짧고, 육상 무기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홈그라운드 이점’도 있다.

어제의 동지들

미국은 혼자 중국을 상대하는 것에 갈수록 부담을 느끼고 있다. 유라시아대륙에서 패권국 출현을 막는 것을 대전략으로 보는 미국은 남중국해에서의 중국의 행동을 명백한 패권 추구 행위로 간주한다. 이를 방치하면 자국 지위와 영향력이 위협받을 뿐 아니라 이 지역 동맹이나 파트너 국가들이 멀어져 중요 이익이 침해될 것으로 우려한다. 그렇다면 해법은 짐을 나눌 친구들을 규합하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에 공동 대응하는 동맹과 파트너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트럼프 행정부 때 시작한 반중국 협의체 쿼드(4개국 모임이라는 뜻으로, 미국·일본·인도·오스트레일리아가 가담)가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지난달 말에는 쿼드 국가들과 캐나다가 괌에서 대잠훈련을 했다. 이달 18일에는 바이든 행정부 들어 처음으로 4개국 외무장관들이 화상으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등의 문제를 논의했다.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는 태평양 국가이자 미국의 동맹이다. 따라서 이들보다는 갈수록 적극적 태도를 보이는 인도가 눈에 띈다. 인도는 비동맹 노선을 견지해왔지만, 중국과의 관계 악화에 자극받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히말라야 접경지대에서 중국군과의 충돌로 인도군 20명이 숨졌다. 인도는 중국이 2017년 동아프리카 지부티에 최초의 해외 해군기지를 설치하고 자국의 이웃인 파키스탄이나 스리랑카에서 항구 개발에 뛰어든 점도 위협으로 여긴다. 인도는 중국의 인도양 진출에 맞서 쿼드 참여국 외에도 베트남·인도네시아·타이·미얀마·싱가포르와도 군사 협력에 착수하고 있다.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 랴오닝호가 2017년 7월 홍콩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 랴오닝호가 2017년 7월 홍콩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유럽도 남중국해에 발을 담그는 중이다. 2차대전 후 탈식민 시대에 아시아·태평양에서 멀어졌던 유럽 국가들은 미국처럼 ‘아시아로의 귀환’을 꾀한다. 이달 8일에는 프랑스 원자력잠수함이 남중국해를 항해했다.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장관은 “전략적 파트너인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일본과 함께 프랑스 해군이 장기간에 걸쳐 원거리에 파견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준 뚜렷한 증거”라며 “우리가 항해하는 어느 바다든 국제법만이 유효한 규칙이라는 점을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는 태평양과 인도양의 자국령 섬들에 프랑스인 180만명이 산다는 점을 내세운다.

영국은 과거 식민지이자 지금도 영연방 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말레이시아·싱가포르와 맺은 ‘5개국 방위협정’이 주요 명분이다. 역시 자국 식민지였던 홍콩에 대한 중국 중앙정부의 압박도 있다. 영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과 군사 교류를 확대하는 모습은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맺은 영일동맹을 떠올리게도 한다. 유럽 국가들의 이러한 아시아 행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 유럽 안보를 보장해온 미국이 그 반대급부로 기대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일사불란한 공동전선을 뜻하지는 않는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19일 뮌헨안보회의 화상연설에서 “미국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같은 행사에서 “우리(유럽과 미국)는 협력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며 “우리의 이해가 반드시 수렴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또 “중국은 전반적으로 경쟁자이긴 하지만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중국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달 4일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 포럼을 통해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했다. 쿼드가 주목받기는 하지만, 인도의 경우 일본-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프랑스, 타이-싱가포르와 각각 별도 협의체를 꾸리며 다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패권국-도전국 결전 불가피론
과거 제국들도 발 담그는 추세
선택 강요받는 약소국은 고통
“양국 협력해야 아시아 성공”

레드라인 넘을까

미-소 냉전을 거치며 ‘핵무장 국가끼리는 전쟁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생겨났다. 한편으로는 미-중 관계를 놓고 기존 패권국과 도전국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론이 유행어처럼 됐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로서는 중국의 행태가 불만이기는 하지만 미-중 틈바구니에서 새우 등 터질 가능성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지난해 <포린 어페어스>에 낸 ‘위험에 처한 아시아의 세기’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여러 강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은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그는 안보는 미국에 기대지만 경제에선 중국의 영향력이 커졌다며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평행선을 달리는 미-중이 가까운 장래에 타협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까지의 모습은 양쪽이 점점 위협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필립 데이비드슨 미군 인도태평양사령관은 2018년에 이미 “중국은 이제 미국과의 전쟁을 제외한 모든 시나리오에서 남중국해를 통제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양쪽에는 전쟁 외에 ‘도발’의 수위를 높일 방법들이 남아 있기는 하다. 중국은 가까운 섬들 사이의 수역을 외국 선박 통항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내수라고 선언하거나 배타적경제수역을 더 많이 설정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 작전을 강화하고 제재를 가할 수 있다. 2015년 한차례였던 항행의 자유 작전은 지난해 아홉차례까지 늘었다. 미국은 남중국해 군사기지화에 연루된 중국 기업들을 지난해 처음으로 제재 대상에 올렸다.

필리핀 시민들이 2019년 7월 수도 마닐라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그림이 들어간 중국 국기 오성홍기를 앞세우고 중국의 필리핀 배타적경제수역(EEZ) 침범에 항의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필리핀 시민들이 2019년 7월 수도 마닐라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그림이 들어간 중국 국기 오성홍기를 앞세우고 중국의 필리핀 배타적경제수역(EEZ) 침범에 항의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우발적 충돌이다. 2018년 9월 중국 군함이 미국 구축함에 41미터까지 접근하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있었다. 미군은 중국 함정이 미군 조종사의 시각을 빼앗을 수 있는 레이저 빔을 쐈다고 주장한 바도 있다. 중국이 구단선 안쪽과 필리핀의 배타적경제수역이 겹치는 스카버러암초마저 군사화하는 게 미국의 레드라인이라는 관측도 있다.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은 “남중국해를 포함한 태평양에서 필리핀 군, 공공 선박, 비행기에 대한 공격”에 적용될 것이라고 중국에 경고했다.

협의 기구나 변변한 대화 노력이 없는 것도 불길한 점이다. 유럽에서는 1970년대 이래 소련과 동구권까지 포괄하는 유럽안보협력기구가 국경 통제나 분쟁 예방을 논의해왔다. 그러나 남중국해를 놓고는 미-중 갈등, 영유권 당사국 간 분쟁, 역외 미국 동맹국들의 간여 등이 난마처럼 얽혀 있을 뿐이다.

리셴룽 총리는 앞의 글에서 “‘아시아의 세기’의 성공과 가능성은 미-중이 차이를 극복하고, 신뢰를 쌓고,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국제 질서를 옹호하기 위해 건설적으로 일할 수 있느냐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했다.

글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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