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현지시각) 열린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레드카펫을 밟은 배우 윤여정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련성 떨어지는 남성과의 관계를 앞세워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낚시질’도 성차별 보도 아닐까요?
독자들은 윤여정 단독 주연의 ‘오스카 드라마’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느끼는데 말이죠.
‘미나리’ 스타 윤여정, 오스카에서 브래드 핏을 만나다 (‘Minari’ Star Yuh-Jung Youn on Meeting Brad Pitt at the Oscars) (어느 미국 언론의 유튜브 영상 제목)
조영남 “윤여정의 통쾌한 복수…딴 남자 안 사귄 것 고맙다” (어느 한국 언론의 온라인 기사 제목)
미국 언론이나 한국 언론이나 여성 배우를 대하는 무례한 태도는 비슷했습니다. 여성 배우가 연기 경력의 정점을 찍는 순간에도, 남성을 엮어서 ‘원톱 주인공’에 머무는 순간을 방해한 겁니다.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각)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나온 보도를 보며 언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시상식 직후 현지 언론과 진행한 백스테이지 인터뷰에선 브래드 핏과 관련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브래드 핏은 ‘시상자로 등장한다’는 소식이 시상식 이전부터 기사화될 정도로 유명한 배우입니다. 그는 영화 <미나리> 제작사 대표이고, 윤여정이 수상 소감에서 먼저 그를 언급했기에 “브래드 핏과 (따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는 질문은 충분히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튜브와 트위터 등 에스엔에스(SNS)에 기사를 배포하면서 제목·발문을 통해 윤여정이 아니라 브래드 핏을 앞세우는 ‘바이럴’ 행태는 눈살을 찌푸릴 만했습니다.
한 언론은 배우 윤여정과 브래드 핏의 만남을 “소녀팬(fangirl)의 순간”이라고 표현해 빈축을 샀다. 유튜브 갈무리
한 매체는 백스테이지 인터뷰에서 친밀한 사이에서나 할 법한 “(유명인인) 그 사람 (실제로 보니) 어땠어?”(What did he smell like?)라는 질문을 던져 빈축을 샀습니다. 브래드 핏을 ‘셀럽’으로 놓으면서 윤여정을 동등한 배우로 대우하지 않는 효과를 낳았죠. 이 매체는 대놓고 윤여정을 브래드 핏의 “소녀팬”(fangirl)으로 묘사했습니다. 해당 영상 아래에는 “무례한”(disrespect) 태도라는 비판 댓글이 줄줄이 달렸습니다. 젠더와 인종 차별이 교차하는 보도 행태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들이었죠.
윤여정의 전 남편인 조영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발언을 기사화하고, 그 기사를 베껴 쓴 한국 언론들의 행태에 대해선 ‘할말하않’하겠습니다. 음악인 이석원이 이미 제대로 비판했거든요.
▶관련 기사 보러 가기
한 언론은 트위터에 브래드 핏 관련 질문과 답변 영상만 따로 올리는 ‘바이럴’을 해서 이목을 끌었다. 에스엔에스 갈무리
사실 여성 배우를 대하는 미디어의 성차별적 태도는 흔하고 해묵은 문제입니다. 배우 스칼릿 조핸슨이 성차별적 질문에 대응하는 모습은 이미 여러 차례 화제가 됐습니다. 그는 마블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에 ‘블랙 위도우’ 역으로 참여했습니다. 2012년 기자간담회에서 한 기자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먼저 질문하며) 강한 자아를 지닌 ‘토니 스타크’ 역할에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접근했으며, 영화를 찍으며 무엇을 배웠나? 그리고 스칼릿, 블랙 위도우의 몸매를 위해 특별한 다이어트를 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조핸슨은 옆에 앉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바라보며 “당신은 그럴듯한 질문을 받는데, 왜 나는 토끼나 먹는 음식에 대한 질문을 받나?”라고 말한 뒤, 식단에 대해 답변했습니다. 조핸슨은 또 ‘영화 속 달라붙는 의상 안에 어떤 속옷을 입는지’를 집요하게 물은 진행자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언제부터 사람들이 인터뷰에서 속옷 얘길 했느냐”며 “그냥 상상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미투(#metoo) 운동 등 성차별·성폭력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높아진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할리퀸’으로 유명한 배우 마고 로비는 2019년 한 인터뷰에서 “아기를 언제 가질 것인지?”를 첫 번째로 묻는 언론이 많았다고 비판했습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올해 초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MBC)에 출연한 배우 문소리는 진행자의 ‘애교’ 요구를 받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국와이더블유시에이(YWCA)가 2020년 성차별적 기사로 꼽은 것 중 하나는 포털 제목을 ‘송지효 “올해 마흔, 결혼은…”’으로 단 스포츠 연예 매체 보도입니다. 해당 기사는 배우 송지효와 영화 <침입자>에 대한 인터뷰를 한 내용이었는데도, 영화나 연기에 대한 이야기 대신 결혼관을 제목으로 내건 겁니다.
성차별의 역사는 유구하지만, 기사 조회수가 곧 돈으로 이어지는 디지털 시대에 ‘성차별 바이럴’로 재탄생된 모양새입니다. 이런 행태는 여성 배우, 여성 연예인에게 유독 가혹하게 나타납니다. 한국와이더블유시에이가 낸 ‘2020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성차별적 사례는 스포츠 연예 전문 매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됐습니다. 보고서는 “(스포츠 연예 매체들이) 여성의 얼굴과 신체를 전시하여 클릭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왔다”면서, 모니터링 과정에서 “네이버 뉴스 스탠드에 제시된 제목과 클릭 후 나타나는 기사의 실제 제목이 다른 경우도 다수 발견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윤여정 보도에서 볼 수 있듯이 ‘세월 못 이긴 충격 비주얼’ ‘속살’ ‘볼륨’ ‘개미허리’ 같은 외모를 강조하는 단어만 성차별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성이 이룬 성취에 집중하기보다, 관련성 떨어지는 남성과의 관계를 앞세워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낚시질’도 성차별 보도 아닐까요? 독자들은 윤여정 단독 주연의 ‘오스카 드라마’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느끼는데 말이죠.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