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프라인>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업계 ‘꾼들’이 금품을 훔치려 모의하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을 그린 하이스트(Heist 강도·강탈) 필름은, 애초 누아르 영화의 하위 장르에서 시작해 이젠 갱스터·범죄물의 핵심 ‘구역’까지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케이퍼 무비(Caper Movie)로도 불리는 이 장르는 조지 로이 힐 감독의 <스팅>(1978)부터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오션스 일레븐>(2001),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2012)까지 매력적이고 유쾌한 범죄자 캐릭터들을 낳았다. 희대의 거악에게 통쾌한 복수를 안기며 한몫 거머쥔 주인공들을 통해, 영화는 현실에선 이뤄지지 않는 권선징악과 인생역전의 대리만족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유하 감독의 <파이프라인>은 도유꾼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바탕으로 하이스트 장르를 남다르게 버무린 범죄오락영화다. 조선소에서 용접일을 하다 때려치운 일명 ‘핀돌이’(서인국)는 탁월한 천공기술로 도유업계 최고의 기술자로 불린다. 지하에 묻혀 있는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석유를 빼돌리는 도유는 유증기 질식과 폭발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고난도의 작업. 수천억 리터의 기름을 빼돌린 뒤 천문학적인 시세차익을 얻으려는 정유업체 대표 건우(이수혁)는 핀돌이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핀돌이는 이를 수락한다.
작업장은 전라도와 경상도로 향하는 송유관이 합류하는 지점 부근의 관광호텔 지하. 건우는 핀돌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4명의 팀원을 작업장에 배치한다. 핀돌이 행세하다 들통난 전력의 용접공 ‘접새’(음문석), 순진한 얼굴의 인간 굴착기 ‘큰삽’(태항호), 땅속 파이프라인 위치를 꿰고 있는 전직 공무원 ‘나과장’(유승목), 외부 상황을 알려주는 ‘카운터’(배다빈)가 그들. 각자 사연을 지닌 채 막장에 온 그들은, 비밀유지를 위해 휴대폰이 압수되고 외부 출입도 차단당한 채 송유관이 있는 곳까지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영화 <파이프라인>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한편, 잇따른 도유범죄에 핀돌이가 연루돼 있음을 직감한 전 지능범죄수사팀 경찰 만식(배유람)은 후배와 함께 수사망을 좁혀온다. 여기에 예상치 못한 석회질 암반이 발견되면서 붕괴 우려로 작업 속도가 더뎌지자, 팀원들 사이의 갈등은 폭발하고 접새는 몰래 호텔을 빠져나가려다 발각된다. 이를 알게 된 정유회사 대표 건우는 핀돌이와 팀원들을 위협하며 땅굴작업을 채근한다. 악조건 속에서 작업을 이어가던 핀돌이와 팀원들은 거대한 음모와 마주하게 되면서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서게 된다.
<파이프라인>은 케이퍼 무비의 관습을 따르고 있지만, 반목하던 팀원들이 고난을 겪으며 하나 돼 더 큰 악을 징치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팀플레이를 보여준다. ‘루저들의 카니발’을 보여주고 싶었다던 감독의 말처럼 영화에는 패배자들의 캐릭터가 생동한다. 돈밖에 모르던 핀돌이가 팀원들에게 연민을 품고, 경상도 사투리를 차지게 구사하며 뺀질거리던 접새는 막장에서 같이 사는 법을 배운다. 욕설과 댓거리가 난무하는 소동극 뒤로 감독의 데뷔작인 <말죽거리 잔혹사>(2004)의 단역들도 등장하면서 극의 버팀목이 돼준다.
영화 <파이프라인>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성장영화의 틀로 병영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한 <말죽거리 잔혹사>와 강남개발의 어두운 이면을 누아르 형식으로 풀어낸 <강남, 1970>(2014)을 통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가로 평가받은 유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름을 가리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영화일 것”이라며 “색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현장에 나갈 때 늘 두려웠는데, 이번 영화에선 배우들과 함께 웃고 즐기고 힐링됐어요. 제 우울증도 이 영화를 통해 많이 치료됐어요.”
도유범죄는 한국영화에선 처음 다뤄지는 소재지만, 실제 현실에서 줄곧 벌어지고 있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적발된 도유범죄는 255건으로, 2018년에 검거된 도유범도 80명에 이른다. 도유범죄는 경제적 손실과 함께 폭발 등 대형사고로 번질 위험성도 크다. 지난 2018년 1월 전북 완주군에서 도유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15m 높이의 불길이 치솟는 등 피해가 난 바 있다. 대한송유관공사가 관리하는 전국 송유관의 총 길이는 1104㎞에 달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