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슬을 머금은 희뿌연 안개가 몸을 감싼다. 짙푸른 숲이 내뿜는 날숨이 코로 훅 들어온다. 언덕을 오르는 사이 몸 안 세포들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아침 해를 맞을 채비를 한다.
“잠에서 깨어난 새벽 언덕에/ 나 홀로 올라가 아침 해를 기다려/ 외롭게 달려온 고단한 여행에서/ 무얼 찾았는지 또 무얼 잃었는지”.
가수 장필순이 지난 11일 발표한 11번째 앨범 <페트리코>의 문을 여는 곡 ‘안개오름’을 들으면, 노래 속 신비로운 장소로 순간이동을 하는 것만 같다.
“앨범을 통해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 동화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음악으로 숲과 자연을 느끼고 위로와 치유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갈월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만난 장필순이 말했다.
장필순 11집 <페트리코> 표지. 도이키뮤직 제공
장필순이 신곡을 담은 음반을 내놓은 건 2018년 발표한 8집 <수니 에이트: 소길화> 이후 3년 만. 그렇다면 이번 음반은 9집이 아닌가? 그는 “정규 앨범이니 특별 앨범이니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예전 노래들을 다시 편곡하고 녹음해 발표한 <수니 리워크>(2020)가 9집, 정신적 지주인 포크 거장 조동진(1947~2017)을 기리며 그의 노래를 다시 불러 지난 1월 발표한 <장필순 리마인즈 조동진>이 10집이니, 이번 앨범은 11집인 셈이다.
장필순은 이번 앨범을 1년 전부터 준비했다. 16년 전 번잡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와 살면서 느낀 숲과 자연의 기운을 음악에 담고 싶었단다. 앨범을 구상하던 중 삶과 음악의 동반자이자 남편인 조동익이 그에게 말했다. “글이 스스로 술술 풀려서 나오는 게 아니라면 굳이 ‘싱어송라이터’라는 틀에 얽매여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어. 혼자 골머리 앓지 않아도 네 목소리를 통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
고개를 끄덕인 장필순은 가수 조동희에게 노랫말을 부탁했다. 자신의 히트곡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의 작사가이자, 시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제주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가장 잘 아는 작사가”라고 장필순은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조동희가 쓴 노랫말들은 판타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한편의 시다.
작사의 부담을 덜어낸 대신 주로 조동익이 맡아온 작곡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이 또한 조동익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 시골집 방에 차린 작업실에 나란히 앉아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었다. 실제 악기 연주 대신 신비로운 느낌의 갖은 전자음을 찾아내 활용했다.
“우리가 곡에 사용하기 위해 구하려는 소리 가격이 적게는 20만원대부터 많게는 몇백만원까지 해요. 여러 소리들이 쌓이면 가격 부담이 상당하기 때문에 매번 살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죠. 그래도 꼭 그 소리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아낌없이 투자했어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절대 포기 못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예컨대 타이틀곡 ‘페트리코’에 내내 나오는, 청명하게 통통 튀는 소리가 그렇다. 페트리코는 비올 때 마른 흙이 젖으면서 나는 비 냄새를 뜻하는 말이다. 피아노와 실로폰을 섞은 ‘요정의 악기’에서 나온 듯한,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소리는 “촉촉한 비 내음 톡톡 창을 두드리면/ 꿈꾸는 아이는 멀리 여행을 떠난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울리는 실로폰/ 칠흑의 하늘가에는 어느새 무지개”라는 노랫말에 빗물처럼 스며든다.
수록곡 중 ‘개똥이’는 유일하게 직접 가사를 쓴 곡이다. 개똥이는 12년을 같이 살고 지난해 말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 이름이다. “개똥이는 (동익이) 오빠가 특히 예뻐했어요. 내가 공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동안 개똥이가 죽었는데, 그때 옆을 지키던 오빠가 펑펑 울었다고 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안 울던 사람인데 말이죠. 그래서 오빠의 마음을 담아 제가 가사를 썼어요.”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너와 한번만 다시 바다를 걷고 싶다”.
장필순이 반려견 개똥이(오른쪽)·달래와 함께 있는 모습. 지금은 둘 다 세상에 없다. 장필순 제공
유기견을 돕는 일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온 그는, 새 앨범 발매 공연을 제주에서만 하고 그 수익금을 제주 유기견을 돕는 데 기증하기로 했다. 다음달 중순부터 제주시 조천읍 김택화미술관에서 여러 작가들이 기증한 그림으로 2주간 전시회를 하고, 마지막 날인 31일 장필순의 무대로 전시회를 마무리한다. 그림 판매 수익 또한 유기견 돕기에 기부한다.
장필순은 사회적 의미를 나누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그가 새 앨범 발매 하루 전인 10일,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로 악명 높았던 민주인권기념관을 찾은 건, 박종철기념사업회가 주최한 ‘더 좋은 민주주의 콘서트’ 무대에 서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비꽃’을 부르다 “(이곳에서 고문을 받고 숨진) 내 ‘또래’ 박종철 열사가 생각나서 눈물이 날 뻔했다”고 했다. “몇년 전부터 6월마다 여기서 노래했어요. 그걸 두고 (정치적이라고) 욕하는 분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해야죠.” 바람처럼 물처럼 흐르는 유연함 속에 꼿꼿한 심지가 엿보였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