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배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지난여름 시청자들을 화면 앞에 붙잡아 놓았다. 세계랭킹 상위권 나라들을 하나씩 격파하며 차례차례 승리를 쌓아 올린 한국 국가대표 여자배구팀은 4위의 영예를 얻었다. 선수들이 화면에 꽉 차게 등장해 배구공을 주고받으며 열렬하게 싸웠다. 그야말로 뜨거운 여름이었다. 작열하는 햇볕은 여전히 뜨거운 가을 초입, 다시 한 번 여자들이 티브이 화면 가득히 등장해 치고받으며 멋지게 싸우는 장면을 볼 수 있게 됐다. 지난여름 ‘배구’가 있었다면, 이번 가을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스우파)가 있다.
지난달 24일 첫 방송을 한 <엠넷>의 댄스 크루 경연 프로그램 ‘스우파’발 열기가 심상치 않다. 한국 최고의 여성 댄스 크루를 경연을 거쳐 가리는 게 이 프로그램의 주된 구조다. 방송 프로그램이지만, 댄스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틀’(싸움)의 요소를 접목했다.
참가 크루는 ‘라치카’‘와이지엑스(YGX)’‘웨이비’‘원트’‘코카N버터’‘프라우드먼’‘홀리뱅’‘훅’ 이렇게 8팀이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여성 댄스 크루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크루에 속한 몇몇 댄서들은 이미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대중에게 여성 댄스 크루라는 존재는 낯설다. 대중이 댄서를 접하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경로인 음악방송에서 댄서들의 존재감은 아이돌의 후광에 가려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스우파는 그 후광을 걷어내고 미친 듯이 강렬한 존재감과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댄스 실력을 갖춘 여성 댄서들의 ‘제자리’를 찾아준다. 스우파 연출가인 최정남 피디는 “케이팝이 글로벌하게 인기가 있는 상황에서 케이팝 아티스트가 주목받는데, 춤을 만든 분들이 조명이 안 되는 게 안타까웠고 여성 댄서들을 유심히 보게 됐다. 케이팝 아티스트에게 팬이 있는 것처럼 댄서들에게도 팬이 생기는 계기와 방향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엠넷 <스트리트우먼파이터> 참가 여성 댄스 크루. 사진 왼쪽 위부터 ‘라치카’‘와이지엑스(YGX)’‘웨이비’‘원트’‘훅’‘홀리뱅’‘프라우드먼’‘코카N버터’. 사진 엠넷
‘댄서분들에게도 팬덤이 생기길 바란다’는 스우파의 기획 의도는 현실화하고 있다. 방송 뒤 출연 댄서들을 주목하는 시청자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첫 방송을 시작한 8월 4주(8월 23일~8월 29일) 콘텐츠영향력지수(CPI)를 보면, 스우파가 312.8점으로 종합과 예능 부문의 1위를 차지했다. 콘텐츠영향력지수는 포털과 에스엔에스 등 온라인상에 많이 언급되는 내용을 집계해 젊은층의 관심도를 반영하는 지수다. 엠넷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스우파 콘텐츠의 조회수는 9월10일 오후 3시 9973만회 이상을 기록하며 조회수 1억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여성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트위터 등 에스엔에스에서 연일 스우파와 출연진이 화제가 되자, 출연 댄서들은 트위터 계정 등을 새로 만들어가면서 팬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고 소통하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스우파의 열성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거침없음’을 스우파의 최고 매력으로 꼽는다. 회사원인 주아무개(27)씨는 “경연 프로그램이 이제까지 여럿 있었지만 이렇게나 다양한 신체의 움직임과 함께 웃음기 없이 이기고 싶은 마음을 거칠 것 없이 보여주는 출연진들은 드물었다. 예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춤을 보여주고 그 춤으로 제대로 붙어 싸우는 걸 방송 내내 볼 수 있어 짜릿하다.”고 했다.
스우파 열기는 최근 여성 출연자가 중심이 된 방송 프로그램 약진에 이은 현상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방송계는 남성 중심성이 공고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한겨레>가 지난 3월 시청자의 관심이 높은 12개의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진 성비을 살펴봤더니, 주요 출연자나 진행자 가운데 여성 출연자가 없는 프로그램이 4개나 됐다. 이런 방송 환경에서도 여성 출연자가 중심이 된 방송 프로그램이 하나 둘씩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방송을 시작한 여성 스포츠 선수 출연 예능 <노는 언니>(이채널)는 최근 시즌2를 시작했다. 여성 방송인들의 축구 경기를 주제로 한 <골 때리는 그녀들>(에스비에스)도 꾸준히 화제를 불러 모은 프로그램이었다.
이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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