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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궁금하다. 세상의 악의를 몰랐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드라마 〈안녕하세요, 하느님〉의 답은 ‘사랑만 있다면’이다. 지난 28일 유쾌한 왈츠장면으로 막을 내린 이 드라마는 아이큐 70에서 아이큐 180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책 〈앨저넌에게 꽃을(Flowers for Algernon)〉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갑자기 천재가 된 주인공은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그러나 사실은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자아는 분열되고, 세계는 조각난 채로 내 앞에 널려 있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머리가 좋아진 그가 만나는 세상에 주목한다. 원작에서 모티브만 빌려왔을 뿐, 주인공들의 관계와 상황은 모두 드라마를 위해 새롭게 창작했다고 한다. 전일적인 정신을 향해 분투했던 책의 주인공은 사라졌다. 머리가 좋아져서 만난 ‘나쁜’ 세상과 천진하고 행복했던 세상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주인공이 있을 뿐이었다. 21세기 소설에서 소재를 빌려왔지만, 주제의식은 계몽주의적이다.
내용과 주제의식으로만 보자면, 이 드라마는 같은 원작을 두고 만들어진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와 더 닮아 있다. 드라마에서는 바람개비가, 뮤지컬에서는 나비가 중요한 상징물로 나온다. 바보라고 놀림 당하지만 천진하고 행복한 주인공의 세계를 표현할 뚜렷한 장치가 필요했던 때문이다. 개벽한 세상에서 바람개비나 나비처럼 그를 지켜주는 유일한 존재는 사랑하는 여자다. 그래서 문제는 다시 멜로다. 멜로 구조를 취하는 한, 자아는 사랑하거나 죽거나이다. 게다가 그가 그 천재적인 지능으로 처음 접한 세상이 하필 사랑하고 증오하고 엇갈리는 연인들의 세계라니. 그렇다고 〈안녕하세요, 하느님〉이 멜로라는 틀을 맹종했던 드라마는 결코 아니다. 전통적인 삼각관계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흔적과, 선과 악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노력도 보였다. 그러기에 이만큼의 성의를 가지고서도 한국 드라마의 멜로 정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지금 드라마 제작사들은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해 경쟁적으로 원작을 선점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다모〉 〈풀하우스〉 〈해신〉 〈불멸의 이순신〉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최근의 〈안녕하세요, 하느님〉 〈궁〉까지 원작을 빌려온 드라마가 이어진다. 아예 드라마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소설과 만화의 판권을 사재기하는 제작사들도 나오고 있다. 이러다가는 향후 몇년 동안 만들어질 드라마 경향도 뻔해질 듯하다. 몇년 묵히려면 트렌드도 스타일도 상관없이 ‘보편적인’ 주제만 간직해야 하니까. 방송사는 좋은 소재를 가진 원작을 가져다가 가장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드라마로 내보내는 통조림 공장처럼 보인다. 같은 내용물을 담지 않기 위해서는 주제의식과 어법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한다. 둘 중 하나다. 드라마에 와서 원작의 상상력과 의미를 새롭게 녹여내거나, 드라마만이 할 수 있는 어법으로 원작을 새로 말하는 데 성공하거나.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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