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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K드라마’ 자극적, 더 자극적…매운맛 마라탕만 먹나요?

등록 2023-06-03 11:00수정 2023-06-03 23:18

[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오티티와 힐링 드라마
수급 불균형에 자극적 콘텐츠만 판쳐
‘박하경 여행기’, 콘텐츠 다양성에 숨길

<박하경 여행기> 화면 갈무리
<박하경 여행기>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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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인 성공 이후부터였을까.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이하 오티티) 콘텐츠는 규모와 자극의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최근 성공했던 오티티 콘텐츠들을 돌아보면 <피지컬: 100>(넷플릭스)이나 <피의 게임>(웨이브)처럼 날것의 육체와 욕망이 맞부딪치는 자극을 제공하거나, <카지노>(디즈니플러스)나 <더 글로리>(넷플릭스), <나는 신이다>(넷플릭스), <국가수사본부>(웨이브)처럼 지상파·케이블 등의 레거시 미디어에선 다룰 수 없었던 수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엔에이)와 같이 따스한 힐링물이 성공한 사례도 있지 않냐 반문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 작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아니라 이엔에이의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례니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따스한 힐링물로 따지자면, 투병하는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이야기를 다룬 한석규·김서형 주연의 수작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왓챠)가 평단의 압도적인 호평을 받고도 크게 화제를 모으지 못한 사례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오티티 콘텐츠 경쟁은 이제 ‘한국인의 매운맛’ 경쟁이 되어버렸다.

경쟁에서 밀리는 ‘작고 소소한 이야기’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앞다퉈 콘텐츠를 선보이는 채널이 많아질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지니 오티티마다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극의 정도를 올리는 것도 일견 자연스럽다. 그러나 처음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했을 때 사람들이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는 채널’이 늘어날 것이라 기대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매운맛 일변도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은 여러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 방송사는 경기 악화를 이유로 드라마 편성을 줄이고 있다. ‘채널이 증가해 경쟁이 치열해졌으니 편성이 줄어들면 경쟁도 함께 줄어들어 나은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일간스포츠> 보도를 보면, “방송계에선 80여편의 드라마가 편성을 못 잡고 표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략) 팬데믹 기간 중 넘쳐났던 자금들이 케이드라마에 쏠렸고, 굳이 방송사가 아니더라도 오티티 등 플랫폼이 다양해졌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드라마가 사전제작 된” 상황이다.(‘[위기의 K콘텐츠] 편성 못 잡은 드라마 80편, 미개봉 영화 57편, K팝 성장세도 뚝↓’, 2023년 5월12일)

이미 콘텐츠 경쟁이 규모와 자극 싸움의 성격으로 재편된 이후에 창구마저 줄어들면, 작고 소소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은 선택받기 더 어려워진다. 콘텐츠를 공급하는 제작사 입장에서는 채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라도 경쟁에 유리한 ‘확실한 한 방’이 있는 작품을 우선 고려하게 된다. 채널 입장도 마찬가지다. 국내 주요 오티티들이 전부 천문학적인 영업 적자 폭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니, 작품 선택 또한 더 보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공개된 웨이브의 신작 미드폼(30분 안팎의 길이를 지닌 콘텐츠. 10분 안쪽의 콘텐츠는 ‘쇼트폼’, 1시간 안팎의 콘텐츠는 ‘롱폼’이라 한다)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는 오티티 생태계의 다양성을 조심스레 긍정해볼 수 있게 한다. 지난달 24일과 31일 두 차례에 걸쳐 전체 8부작을 공개한 이 드라마는, 편당 25분 남짓한 러닝타임으로 보나,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주인공 박하경(이나영)이 토요일 하루를 할애해 당일치기 국내 여행을 한다는 내용으로 보나, 어딜 봐도 자극과 규모의 싸움을 할 생각이 없는 작품이다.

&lt;박하경 여행기&gt; 화면 갈무리
<박하경 여행기> 화면 갈무리

오티티 다양성 부활할까?

심지어 이 작품은 이름난 관광지를 충실하게 보여주겠다는 의지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 따지자면 여행지의 풍경이 아니라 여행자의 내면 풍경에 더 집중한다고 할까. 드라마는 하경이 여행 중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느낀 감흥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어정쩡한 재능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제자 연주(한예리)의 전시회를 찾아 군산에 간 2화에서, 카메라는 군산의 명소를 담는 대신 연주의 개인전이 열리는 카페 안에 머무른다.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제주도나 경주를 가도 마찬가지다. 빵을 사러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꼬마 아이(김민채)의 뒤를 졸졸 따라가게 되는 7화나, 고등학교 시절 절친했던 친구 진솔(심은경)과의 추억을 곱씹기 위해 경주를 찾아간 8화에서 중요한 건 여행지가 아니라 여행자의 마음이다. 어정쩡한 재능으로 세상을 헤쳐가는 제자가 모쪼록 잘 살기를 응원하는 마음, 혼자 빵을 사러 돌아다니는 꼬마 아이가 무탈하게 귀가하기를 바라는 마음, 서로 별일 없이도 만나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오래된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

이미 전작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등장인물들이 정서적 연대를 꾸리는 광경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낸 바 있는 이종필 감독과 손미 작가는, 하경의 여행지마다 그가 마음을 주고받을 만한 사람들을 하나둘 심어놓고 시청자들을 기다린다. 한예리·구교환·길해연·박인환·심은경·조현철 등의 화려한 캐스팅은, 이 작품이 노리는 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과 연대를 통한 정서의 묘사라는 걸 암시한다. 하경의 여행을 따라가면 갈수록 우리는 여행의 본질이 외부의 풍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 내면의 변화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입소문을 타며 조용히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는 <박하경 여행기>가 성공으로 기록된다면 어쩌면 매운맛 일변도로 재편돼 가던 오티티 콘텐츠 경쟁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화려한 컴퓨터그래픽과 압도적인 제작비가 투입되지 않아도, 인간의 욕망이 날것으로 전시되지 않아도, 다소 느리고 차분한 이야기로도 시청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면 창작자와 채널 모두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청자에게 ‘한국 미디어 산업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작품을 선택해야 할 의무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연일 쏟아지는 고자극의 콘텐츠에 지쳐 잠시 숨을 돌릴 만한 선택지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박하경 여행기>는 썩 훌륭한 선택지가 되어줄 것이다. 마침 토요일, 하경이 여행을 떠나는 요일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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