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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다 큰 여자’의 욕망을 솔직하게 노래하고 싶었어요”

등록 2015-11-22 20:43

정새난슬. 사진 디템포 제공
정새난슬. 사진 디템포 제공
디지털 미니 음반 낸 가수 정새난슬
21살, 영국 런던 첼시아트디자인칼리지로 가서 조각을 공부했다. 이십대 중반, 한국에 돌아와서 적성검사라도 하듯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일러스트레이터가 됐다. 26살, 처음으로 허리에 문신을 새겼다. “되바라진 암컷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28살, 처음 기타를 배운 날부터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뮤지션인 부모님에 비하면 자신의 재능은 너무 보잘것없어 보여서 ‘나는 절대 음악을 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지었다. 한때는 익명으로 섹스 칼럼을 쓰기도 했다. 32살, 펑크록 밴드 ‘럭스’의 보컬 원종희와 결혼했다. 라이브 공연 같은 결혼식에다 침대에서 찍은 파격적인 웨딩 화보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33살에 딸을 낳았는데 35살에 이혼을 했다.

영국유학·결혼과 출산·이혼 경험
일기 쓰듯 만들어온 노래들 모아
아버지 정태춘과 편곡·표지 작업

“되바라진 암컷으로 살아가고파”
다짐이 필요할 때마다 몸에 문신
내년초 에세이와 정규1집 계획도

삶은 여러 번 방향을 바꾸며 아무것도 다짐했던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가끔 새로운 길을 열기도 한다. 이달 초 디지털 미니 음반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을 발표한 정새난슬(35·왼쪽 사진) 이야기다. 정태춘·박은옥의 딸인 그가 아버지·어머니에 이어 가수가 됐다.

“모두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래들이에요. 저한테 일어났던 일들이 워낙 흥미로워서 상상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어요.” 영국에서 느꼈던 이방인의 외로움을 노래한 타이틀곡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결혼 생활에 대한 스케치 같은 ‘엄지 검지로’,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남녀를 묘사한 ‘아기가 되었다’ 등 이번에 발표한 5곡은 모두 그가 일기를 쓰듯 만들어온 노래들이다. 엄마가 아기에게 “네가 자야 나도 자죠”라고 애원하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자장가 ‘쉿’도 있다. 모아놓고 보니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다시 혼자가 된 이야기를 독백처럼 읊조린 음반이다.

정새난슬이 속삭이는 소리는 곱고 곡의 스펙트럼은 넓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춘 1인 아카펠라부터 현악 사중주, 타악기에 옛날 레코드에서 들릴 법한 지직거리는 잡음까지 다양한 사운드를 이용한 곡들은 아버지와 함께 편곡한 것이다. 아버지는 문신한 팔을 훤히 드러낸 채 아기처럼 잠든 딸을 사진으로 찍었고, 그 사진은 이번 앨범의 표지가 됐다.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사진 디템포 제공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사진 디템포 제공
다짐이 필요할 때마다 문신을 했더니 어느새 정새난슬의 팔엔 그림이 가득하다. “양쪽 어깨에 있는 것은 견장 같은 거예요. ‘인생은 각개전투’라는 뜻으로 제가 밑그림을 직접 그렸어요. 결정적인 것은 허벅지에 한 뱀 문신인데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나려고 그랬어요. 이런 거 싫어하는 사람은 가까이 오지 말라는 바리케이드이기도 하고요. 뱀 문신한 여자를 며느리로 맞을 시댁은 한국 사회에 없을 테니까 이대로 결혼하고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각오였죠. 이십대 때는 지금보다 더 뾰족하고 삐딱했어요.”

문신한 여자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회에 맞서 견장까지 두르고 홀로 전투를 치러왔는데 원종희를 만났다. “럭스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를 들으면 제 안에 있는 난폭함과 분노를 누가 대신해서 터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게다가 전남편이 무대 위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펼칠 때 거기서 아버지의 모습까지 발견했던 것 같아요. 저는 늘 무대 위의 남자를 보며 자라왔잖아요.” 그러나 “아버지 같을 줄 알고 결혼했는데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나 그의 성향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진흙탕 싸움 와중에 밴드 멤버들이 아버지의 정치적 지향까지 공격하면서 사태는 악화됐다.

21살 때부터 독립해서 ‘민중가수’인 부모와는 전혀 다른 계급성과 시야를 펼치며 살아왔는데 결혼하면서 “어머니, 아버지와 이어진 수직적 정체성에 눈뜨게 된”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지난여름 이혼한 그는 19개월 딸에다 6살 고양이까지 데리고 부모님 옆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같이 절망했고, 같이 수렁에 빠졌고, 다같이 걸어나왔죠. 저 혼자였으면 익사했을 거예요. 물론 부모님이 저를 전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아니에요. 아빠는 제 문신을 두고 ‘자기 학대같아서 보기 싫다’고 한 적도 있고 클럽 다닌다고 ‘너는 사회의 기생충처럼 살 거냐’며 화를 낸 적도 있죠. 그런데 우리집은 토론과 대화가 과잉된 집이라서 납득될 때까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요. 그러다 설득당하기도 하고.” 어릴 땐 서정적이면서도 엄정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 애썼던 딸은 지금은 “내가 아버지 인생의 가장 큰 모순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음반에 실리지 않은 노래들 중엔 버림받고도 주인을 기다리는 유기견 같은 여자를 노래한 ‘개같은 년’이나 “썸타던 남자와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섹스도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는 제목 미정의 노래도 있다. 정새난슬은 “계속해서 ‘다 큰 여자’의 욕망을 솔직하게 노래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게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하는 표지가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정말로 달리 살아가는 방법을 몰라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실은 처세술 책을 열심히 보거든요. 현명하고 정신적인 균형을 갖춘 여성들을 따라하려고 노력하는데 안되는 거예요. 지금은 이런 저를 그냥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기교를 갈고닦아 예술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본래 지닌 태도가 예술이 되기도 한다. 노래하며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정새난슬은 내년 3월 에세이 <다 큰 여자>와 정규 1집을 낼 예정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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