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양은 천재가 아니라 장인에 가깝다. 그에겐 세간의 평가보다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배역인지가 우선이다. 티브이엔 <배우학교>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티브이엔(tvN) 예능 <배우학교>는 신기한 프로그램이다. <잉여공주>(2014)나 <미생물>(2015) 같은 경쾌한 드라마를 만들던 백승룡 피디가 작정하고 선보인 작품이 웃음기를 쫙 뺀 본격 연기 교실 프로그램이란 사실도 신기하고, 케이블치고도 그리 높지 않은 시청률인데 이상하게 세간의 관심이 계속 주목되는 것도 흥미로우며, 학생들의 연기가 회를 거듭할수록 놀랄 만한 속도로 나아지는 게 눈에 보이는 것도 경이롭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건 연기 선생 박신양의 존재다. 학생의 연기에서 조금이라도 겉치레나 자기 보호를 하는 듯한 모습을 읽는 순간 끈질기게 질문과 비평을 던져 상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상대가 껍데기를 벗는 순간을 포착해 정확한 자리에 칭찬을 떨구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도 기묘한 안도감을 준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그 앎을 기반으로 말하는 사람의 견해를 예능에서 접한 게 얼마 만인지. 어설픈 위로나 이현령비현령 격의 조언으로 대충 얼버무리던 일군의 ‘멘토’들이 지난 몇 년간 쌓아 올린 체증이 단숨에 내려갔다.
물론 실제 커리큘럼을 눈으로 접했으니 새로워 보이는 것이지만, 사실 밥을 먹으면서도 다음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동 중에도 끊임없이 발성 연습을 시키며 핵심과 본질에 매달리는 박신양의 집념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다.
박신양은 자신이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일들엔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다. 그는 와인에 취미를 붙이면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와인을 만들어 팔아볼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자신의 입맛과 기준에 맞는 빵을 찾기 위해 전국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자신이 운영하던 카페의 가구를 죄다 직접 만들어 놓고선 겸손하게 ‘가구 만드는 게 취미’라 말하는 모습을 보면, <배우학교>에서의 모습 또한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취미 삼아 하는 일이 저 정도인데, 평생을 업 삼아 하는 일에서는 얼마나 완벽을 기하고 싶을까. 그가 젊은 시절 자신의 연기 갈증을 채워줄 스승을 찾아 러시아로 유학을 갔었던 건 유명한 일화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드라마 촬영장에 전담 연기 스태프를 대동하고 다닌 것도 얼추 10년이 되었다. 연기자 지망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제공하고 연기 공부를 함께 하는 장학회 사업을 시작한 게 올해로 벌써 8년이다. <배우학교>에서의 강의는, 알고 보면 지난 8년간 박신양이 계속해왔던 일의 연장선상인 셈이다.
뻔한 멘토는 할 수 없는 연기지도와
검사·노숙인·변호사 오가는 곡예연기 촬영장에 연기 전담 스태프 대동하고
연기자 지망생 선발해 8년째 장학금
좋아하는 데 몰두하는 무서운 집중력 연기 변신보다 추구하는 가치 중요한
한 우물 포기 않고 파는 완벽주의자 예술에 대해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을 논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겐 다소 맥이 빠질 이야기겠지만, 박신양은 천재가 아니라 장인에 가깝다. 수험생 시절 충동적인 결정으로 연기의 길에 뛰어든 박신양은 지독한 낯가림의 소유자였고, 자신을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라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런 겹겹의 껍질을 깬 건 ‘합일의 경지에 이른 노력’이었다. 등산을 하면서,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하다못해 혼자 노래방에 가서라도 매일같이 발성 연습을 해온 세월이 25년이고, 박수무당을 연기한 코미디 영화 <박수건달>(2013)을 준비할 때는 실제 박수무당들을 찾아가 굿판까지 동행했다. 에스비에스(SBS) <싸인>(2011)을 촬영할 당시엔 장항준 감독에게 A4용지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 장문의 문자를 하루에도 몇 통씩 보내며 배역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것은 물론, 수차례 실제 부검에 참관하고 부검의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인터뷰를 해 A4용지 160여장의 자료를 정리했다. 그는 한번 파겠다고 마음먹은 우물은 끝까지 파 내려가는 외골수 기질의 소유자다. 흥미롭게도 박신양이 분한 캐릭터 중 대중의 기억 속에 깊게 자리한 인물들 또한 어딘가 박신양의 이런 기질을 닮아 있다. 뭔가 한 가지에 꽂혀서 온몸과 마음을 다해 몰두하는 종류의 인물 말이다. 데뷔작 <유리>(1996)에서 그는 구도를 위해 온갖 기행과 파계를 서슴지 않으며 발버둥치는 수도승 유리였고, 그를 명실공히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출세작 <약속>(1998)에선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바보 같은 이벤트를 벌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조직폭력배 상두였다. <범죄의 재구성>(2004) 속 고서적 수집가이자 소설가인 최창호와 일평생 사기 일로에 매진해온 쌍둥이 동생 최창혁, 제 앞에서 죽어버린 동생 해철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그가 남긴 흔적을 쫓다가 마침내 동생 해철의 삶을 살게 되어버린 <킬리만자로>(2000)의 강력계 형사 해식, <싸인>속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천재 법의학자 윤지훈…. 박신양이 맡은 인물들은 본인이 고민 끝에 결심한 것에 있어선 좀처럼 뒤로 물러서지 못한다. 어쩌면 박신양의 연기가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달리 배우의 ‘연기 변신’에 무게를 두고 얼마나 광폭의 배역을 소화하느냐로 배우의 자질을 가늠하곤 하는 풍토 속에서라면, 소름 끼치는 악인이나 선 굵은 인물을 연기하는 식의 도전을 좀처럼 하지 않는 박신양 같은 배우는 박한 평가를 피하기 어려우니까 말이다. 게다가 맡는 배역이 모두 어딘가 배우 자신을 닮아 있는 인물들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박신양은 대단한 연기 변신 같은 걸 꾀하지 않는다. 악인을 연기하는 모습은 볼 수 없겠느냐는 질문에 “필요하면 하겠지요. 그런데 필요 자체가 잘 안 생겨나요. 배우는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역할, 저 역할 하는 건데 그 이야기가 악의 무리가 지구를 지배하는 이야기인 경우는 별로 없잖”(2016년 3월 <보그>한국판 인터뷰)으냐고 반문하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아름답고, 기분 좋고, 재미있는 느낌”(2013년 1월 <엘르>한국판 인터뷰)이라 말하는 그에게 연기 변신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배역인지가 우선일 뿐, 세간의 평은 그 이후의 문제다. 한국방송(KBS) 월화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또한 이러한 박신양의 이미지에 많은 것을 기댄 작품이다. 박신양이 연기하는 변호사 조들호는 불우한 환경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고 검사가 된 인물이다. 성공을 위해 상부에서 시키는 일의 뒤치다꺼리도 마다하지 않으며 질주하던 그는 모종의 사건으로 검사직에서 물러나는데, 한 가지만 바라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조들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생을 내려놓는다. 과거의 직장 동료가 구해준 방도 마다하고 폐인이 되어 노숙자로 살던 그는, 자신이 검사 시절 권력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눈감았던 사건의 용의자로 무고한 사람이 검거되었다는 뉴스를 본 순간 벌떡 일어난다. ‘저 사람이 누명을 쓴 것은 내가 불의에 눈감았기 때문’이라 생각한 조들호는 진실을 밝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변호사 배지를 달고 다시 법조계로 뛰어든다. 이 급격한 두 차례의 기어 전환은 모두 첫 회에 이루어졌는데, 70분 동안 검사-노숙자-변호사를 오가는 곡예에 가까운 캐릭터 변화를 납득하게 만든 건 온전히 박신양의 힘이다. 한번 걷기로 마음먹은 길에 무섭게 몰두하는 인물을 그려내온,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
방영 전, 드라마에 대해 설명하며 박신양은 주인공 조들호가 “저랑 닮았다고들 하는데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본 이들이라면 이제 알 것이다. 동네 건달들의 대부업 사무실을 빌려 간신히 개업한 주제에 거대 재벌과 검찰과 맞서 진실을 밝히겠다며 달려드는 이 무모한 인물을 믿고 싶어지는 건, 그를 연기하는 배우가 박신양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그를 비판하는 이들 말처럼 박신양의 연기 폭은 그리 넓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엔 끝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도 뒤로 물러서거나 타협할 줄 모르며 걸어온 완고한 장인만이 그려 보일 수 있는 경지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검사·노숙인·변호사 오가는 곡예연기 촬영장에 연기 전담 스태프 대동하고
연기자 지망생 선발해 8년째 장학금
좋아하는 데 몰두하는 무서운 집중력 연기 변신보다 추구하는 가치 중요한
한 우물 포기 않고 파는 완벽주의자 예술에 대해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을 논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겐 다소 맥이 빠질 이야기겠지만, 박신양은 천재가 아니라 장인에 가깝다. 수험생 시절 충동적인 결정으로 연기의 길에 뛰어든 박신양은 지독한 낯가림의 소유자였고, 자신을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라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런 겹겹의 껍질을 깬 건 ‘합일의 경지에 이른 노력’이었다. 등산을 하면서,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하다못해 혼자 노래방에 가서라도 매일같이 발성 연습을 해온 세월이 25년이고, 박수무당을 연기한 코미디 영화 <박수건달>(2013)을 준비할 때는 실제 박수무당들을 찾아가 굿판까지 동행했다. 에스비에스(SBS) <싸인>(2011)을 촬영할 당시엔 장항준 감독에게 A4용지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 장문의 문자를 하루에도 몇 통씩 보내며 배역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것은 물론, 수차례 실제 부검에 참관하고 부검의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인터뷰를 해 A4용지 160여장의 자료를 정리했다. 그는 한번 파겠다고 마음먹은 우물은 끝까지 파 내려가는 외골수 기질의 소유자다. 흥미롭게도 박신양이 분한 캐릭터 중 대중의 기억 속에 깊게 자리한 인물들 또한 어딘가 박신양의 이런 기질을 닮아 있다. 뭔가 한 가지에 꽂혀서 온몸과 마음을 다해 몰두하는 종류의 인물 말이다. 데뷔작 <유리>(1996)에서 그는 구도를 위해 온갖 기행과 파계를 서슴지 않으며 발버둥치는 수도승 유리였고, 그를 명실공히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출세작 <약속>(1998)에선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바보 같은 이벤트를 벌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조직폭력배 상두였다. <범죄의 재구성>(2004) 속 고서적 수집가이자 소설가인 최창호와 일평생 사기 일로에 매진해온 쌍둥이 동생 최창혁, 제 앞에서 죽어버린 동생 해철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그가 남긴 흔적을 쫓다가 마침내 동생 해철의 삶을 살게 되어버린 <킬리만자로>(2000)의 강력계 형사 해식, <싸인>속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천재 법의학자 윤지훈…. 박신양이 맡은 인물들은 본인이 고민 끝에 결심한 것에 있어선 좀처럼 뒤로 물러서지 못한다. 어쩌면 박신양의 연기가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달리 배우의 ‘연기 변신’에 무게를 두고 얼마나 광폭의 배역을 소화하느냐로 배우의 자질을 가늠하곤 하는 풍토 속에서라면, 소름 끼치는 악인이나 선 굵은 인물을 연기하는 식의 도전을 좀처럼 하지 않는 박신양 같은 배우는 박한 평가를 피하기 어려우니까 말이다. 게다가 맡는 배역이 모두 어딘가 배우 자신을 닮아 있는 인물들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박신양은 대단한 연기 변신 같은 걸 꾀하지 않는다. 악인을 연기하는 모습은 볼 수 없겠느냐는 질문에 “필요하면 하겠지요. 그런데 필요 자체가 잘 안 생겨나요. 배우는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역할, 저 역할 하는 건데 그 이야기가 악의 무리가 지구를 지배하는 이야기인 경우는 별로 없잖”(2016년 3월 <보그>한국판 인터뷰)으냐고 반문하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아름답고, 기분 좋고, 재미있는 느낌”(2013년 1월 <엘르>한국판 인터뷰)이라 말하는 그에게 연기 변신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배역인지가 우선일 뿐, 세간의 평은 그 이후의 문제다. 한국방송(KBS) 월화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또한 이러한 박신양의 이미지에 많은 것을 기댄 작품이다. 박신양이 연기하는 변호사 조들호는 불우한 환경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고 검사가 된 인물이다. 성공을 위해 상부에서 시키는 일의 뒤치다꺼리도 마다하지 않으며 질주하던 그는 모종의 사건으로 검사직에서 물러나는데, 한 가지만 바라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조들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생을 내려놓는다. 과거의 직장 동료가 구해준 방도 마다하고 폐인이 되어 노숙자로 살던 그는, 자신이 검사 시절 권력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눈감았던 사건의 용의자로 무고한 사람이 검거되었다는 뉴스를 본 순간 벌떡 일어난다. ‘저 사람이 누명을 쓴 것은 내가 불의에 눈감았기 때문’이라 생각한 조들호는 진실을 밝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변호사 배지를 달고 다시 법조계로 뛰어든다. 이 급격한 두 차례의 기어 전환은 모두 첫 회에 이루어졌는데, 70분 동안 검사-노숙자-변호사를 오가는 곡예에 가까운 캐릭터 변화를 납득하게 만든 건 온전히 박신양의 힘이다. 한번 걷기로 마음먹은 길에 무섭게 몰두하는 인물을 그려내온,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