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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라미란, 흔한 아줌마에게도 독립적 서사가 있다

등록 2016-05-06 19:29수정 2016-05-07 09:30

배우 라미란의 부단한 노력이 빛을 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라미란은 2013년 티브이엔(tvN)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에서 밉상이 되어버린 워킹맘을 연기했고, 같은 방송사의 <응답하라 1988>(2015)에선 자신만의 욕망과 콤플렉스를 모두 지닌 ‘쌍문동 치타 여사’를 연기했다.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라미란의 부단한 노력이 빛을 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라미란은 2013년 티브이엔(tvN)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에서 밉상이 되어버린 워킹맘을 연기했고, 같은 방송사의 <응답하라 1988>(2015)에선 자신만의 욕망과 콤플렉스를 모두 지닌 ‘쌍문동 치타 여사’를 연기했다.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이름도 없는 배역부터 시작했으려니 하는 편견을 비웃듯, 의외로 그는 스크린 데뷔작에서 제법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다. 교도소의 폭군인 마녀(고수희)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금자(이영애)의 도움으로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어낼 수 있었던 여자, 출소 후 지금은 남자의 목을 베어 든 여자 동상을 만들어 파는 금속세공사. 극중 그의 이름은 ‘여자 1’이나 ‘감방 친구 1’이 아니라 성까지 번듯하게 갖춘 ‘오수희’였고, 대사는 몇 줄 안 됐지만 임팩트가 강했던 덕에 모두의 주목을 샀다. “그 새낀 찾았어? 죽였어?” 무심하게 ‘바빠서 아직 못 죽였다’는 금자에게 수희는 묻는다. “맛있는 걸수록 뒀다 먹는, 그런 마음?” 나이 서른하나에 처음으로 맡은 배역이 <올드보이> (2003)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박찬욱 감독이 이영애와 함께 찍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 (2005) 속 주인공 친구라니, 썩 괜찮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거기까지였다. 남자 배우에 비하면 여자 배우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적었고, ‘주연급’ 미모가 아닌 30대 여배우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더더욱 적었으므로. 필모그래피가 쌓일수록 점점 이름 대신 ‘부인 1’, ‘맞선녀 2’, ‘중년 여선생’ 등으로만 표기되는 배역들이 쌓여 갔다. 그가 다시 성과 이름 모두 갖춘 배역을 맡기까지는 5년이 더 필요했다.

배역 이름이야 어찌 됐든, 모든 배우가 그렇듯 그도 작은 배역이라고 허투루 연기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같은 ‘아줌마’라도 다들 다른 ‘아줌마’라는 거죠. 그들은 너무나 다른 상황에 처해 있으니까.”(2012년 <이슈 데일리> 인터뷰 중) 배우에게 소중하지 않은 배역이 어디 있고 공들이지 않은 영화가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쉽게 기억해내지 못했고, 그나마 기억하는 이들은 종종 그에게 늘 비슷한 이미지의 역만 맡는다는 지적을 했다. 그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아줌마’는 이름으로 호명되기보단 ‘○○네’, ‘○○댁’, ‘아무개 엄마’로 호명되는 이들이고, 너무 쉽게 무성·무개성의 존재 취급을 당하는 이들이니까. 실제 삶에서도 소외된 이들이 환상을 파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돋보이는 모습으로 묘사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평범한 우리들과 닮은 얼굴을 지닌 탓에, 그는 그렇게 이름도 없고 개성도 없는 배역들을 떠안아야 했다. 아무리 혼자 대본엔 없는 배경을 설정해보고 고민해가며 차별화를 주려 노력해도 기껏해야 주인공 친구 정도의 배역을 가지고 매번 차별화를 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쌍문동 치타여사 라미란
처음엔 이영애 친구 오수희였으나
이후 부인1, 맞선녀2, 중년 여선생…
묶어서 ‘아줌마’

마흔두 살의 이 아줌마에게
무엇을 소망하는지
진지하게 물어봐준 이가 있었을까

라미란이 뜨는 데 걸린 22년
어쩌면 라미란만의 것은 아니다

평범한 아줌마들의 개별적 삶에
세상이 관심을 표하는 데
걸린 시간의 일부이기도 하니

배우란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직업인지라 캐릭터 변신을 하려면 “새로운 걸 도전해보고 싶은 용기 있는 감독님들의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배역이 작다고 서러워 본 적은 없지만, 자신 같은 이가 “멜로를 욕심내면 웃음부터 터져나오는 분위기”는 “좀 서글”펐다.(이상 2015년 <일간스포츠> 인터뷰 중) 평범한 배경,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나이 먹어 간 아줌마에게도 자신만의 독립적인 서사가 있고 욕망이 있다는 걸 쉽게 수긍해주는 관객은 흔치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던 주연작 <댄스타운>(2010)은 그리 많은 관객과 만나진 못했고, <소원>(2013)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받은 이후에도 문화방송 <라디오스타>에는 이름보단 ‘거지, 몸종, 내시, 그리고 변태’로 먼저 기억되곤 하는 감초 배우 특집에 출연했다. 엠시들은 그가 맡았던 배역들의 이름을 딱히 궁금해하진 않았고, 그는 “분량이 많이 나온 작품들은 잘 안되지 않았냐”는 짓궂은 농담에 “저희 같은 사람들은 좀 많이 나오면 (관객들이)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요. 잠깐 잠깐 치고 빠져야지”라고 답해야 했다. 연극무대부터 헤아려 배우 인생 20년을 꽉 채우던 해에 출연한 토크쇼였다.

아줌마들에게도 독립적인 서사가 있고 욕망이 있다는 걸 관객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이 빛을 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13년 티브이엔(tvN)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에 합류한 그는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남느라 밉상이 되어 버린 워킹맘을 연기했고, 같은 방송사의 메가히트작 <응답하라 1988>(2015)에선 자신만의 욕망과 콤플렉스를 모두 지닌 ‘쌍문동 치타 여사’를 연기했다. 찢어질 듯한 가난에서 복권 한 방으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 치타 여사는 화려한 호피무늬 옷으로 돈자랑도 하고 싶고,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는 스파게티도 “이게 요즘 유행한다는 미국 국수”라며 챙겨 먹는다. 남편 성균(김성균)이 가난하던 시절의 흔적을 못 벗고 목 늘어난 러닝셔츠를 입고 있는 꼴이 싫고, 추위에 떨었던 과거의 한 때문에 트럭 한가득 연탄을 사서 광에 쟁여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렵던 시절 손 내밀어 줬던 같은 골목 이웃들이 기죽는 건 또 싫어서 큰돈도 성큼 빌려주고는 천천히 갚으라 말한다. 꼴불견 속물 벼락부자인 동시에 속정 깊은 이웃. 흔한 아줌마에게도 단순하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과 역사, 특징이 있다는 걸 보여준 쌍문동 치타 여사는 단순한 주인공의 엄마 역이 아닌 당당한 극의 한 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모두가 폭소했다고 손꼽았던 장면인 <전국노래자랑> 에피소드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웃기는 장면이라 생각하고 연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미 5년 전에 한 차례 <전국노래자랑>에 도전했다가 긴장을 풀기 위해 마신 술기운이 올라 도전도 못 해보고 실패한 경험이 있는 상황, 치타 여사에겐 이번 기회가 절실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순간 반주 테이프가 바뀌었다. 그렇다고 다시 포기할 순 없다. 언제 다시 기회가 돌아올 줄 알고. 치타 여사는 입으로 반주를 넣어가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동료 배우들조차 그 상황을 보고 폭소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맡은 배역의 간절한 욕망을 읽어내고 그것이 “웃기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평범한 이들의 복잡한 욕망을 풀어 설명할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통해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쌍문동 치타 여사의 본명이자 자기 자신의 것이기도 한 그 이름, 라. 미. 란.

최근 그가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멤버들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느냐’고 묻는 것에서 출발하는 한국방송 예능 <언니들의 슬램덩크>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데뷔한 지 22년째인데 뜨는 데 22년 걸렸다”고 너스레를 떨던 라미란은 “마흔두 살에 꾸는 꿈이란 어떤 것이냐”를 묻는 제작진의 질문 앞에서 당황해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생각지도 않은 고민거리…?” 자신이 맡은 배역의 다채로운 욕망을 그려내려 노력해온 사람의 대답치고는 맥 빠지는 답,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마흔두 살의 아줌마에게 무엇을 소망하는지 진지하게 물어봐준 적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라미란이 뜨는 데 걸린 세월은 어쩌면 라미란만의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 22년은 세상이 평범한 아줌마들의 개별적인 삶에 최소한의 관심을 표하고 그 욕망을 묻기 시작하는 데 걸린 시간의 일부이기도 하니 말이다. 주연급 미모를 가져서도 아니고 나이보다 동안이어서도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존중받아야 하기에 받는 최소한의 존중. 누구의 엄마나 댁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받는 관심.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라미란은 고민 끝에 제작진에게 조심스레 가수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을 고백했고, 놀라는 멤버들에게 “잠깐 덧없는 생각을 했었다”며 굳이 꿈의 크기를 줄이고 줄여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일단 마이크를 잡자, 그는 문화방송 <우리들의 일밤> ‘복면가왕’에서 선보였던 실력 그대로의 가창력을 뽐내며 비엠케이(BMK)의 노래를 완창해 냈다. 소리 내어 꿈을 말한 적 없기에 그 시작은 수줍고 어색했을지라도 한번 제 꿈을 고백하고 긍정하기 시작하니 이제 누구도 그 꿈을 비웃지 않는다. 그리고 그 변화는, 라미란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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