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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행당동 30년 노점상, 귀정이 엄마

등록 2021-12-04 11:41수정 2021-12-04 11:46

[한겨레S] 강유가람의 처음 만난 다큐
왕십리 김종분
영화 <왕십리 김종분>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왕십리 김종분>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제공

팔순이 넘은 김종분씨는 서울 왕십리 행당시장 앞 한자리에서 30년 넘게 노점을 해왔다. 그의 가게는 동네의 작은 사랑방 같다. 푸근한 인상과 정이 넘치는 그의 성격 덕에 길을 오가다 방문하는 단골이 꽤 많다. 오랜 세월 인근에서 함께 장사를 해온 노년 여성들이 모이기도 한다. 그들은 김종분씨의 장사를 돕기도 하고, 커피나 밥을 나눠 먹기도 한다.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이 노점을 운영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김종분씨는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지난달 1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왕십리 김종분>(김진열, 2021)은 평범해 보이는 한 할머니의 삶을 통해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를 드러내는 동시에 한 여성의 노동의 역사를 그린다.

영화 &lt;왕십리 김종분&gt;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왕십리 김종분>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제공

왕십리 달동네에 살며 1남2녀를 키워온 김종분씨는 처음엔 장사란 걸 할 줄도 몰랐다. 하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억척스럽게 장사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중 1991년 5월25일, 그의 둘째 딸인 김귀정씨가 노태우 정권하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그 이후 그의 삶은 큰 변화를 겪는다. 자신이 지지했던 노태우가 자기 딸의 목숨을 앗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희생된 열사들의 유가족 모임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만나고, 딸이 다녔던 대학을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김귀정씨의 예전 일기를 통해 생전 그의 행적을 돌아본다. 그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과외를 뛰며 힘들게 등록금을 마련하면서도, 빈민들의 나태함을 탓하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분노하며 행동했던 학생이었다. 어머니로서 김종분씨는 이런 딸의 모습을 따르겠다고 투사처럼 여러 연대의 자리에 선다. 그의 발자취는 그의 딸이 살아낼 미래이기도 했으며, 딸의 일기를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하다. 30여년간 진행된 추모식에 딸을 기억하러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김종분씨는 밥을 해왔다. 이를 통해 김귀정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새롭게 김종분씨를 기억하게 되었다.

영화 &lt;왕십리 김종분&gt;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왕십리 김종분>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제공

감독은 김종분씨가 열사의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한명의 여성 노동자로서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에 주목한다. 딸을 잃었어도 삶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김종분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할 짓은 다 했다’고 말한다. 식모살이도 했고, 곗돈을 잃기도 하고, 땅을 사기도 했지만 뺏기기도 했다. 일을 참 많이도 했다는 그의 말 속에서, 산다는 것의 고단함과 위대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늘 주변에 정을 나누고, 긍정적인 기운을 전파하는 그의 성정은 30년 만에 빚을 갚으려 우연히 나타난 사람을 통해서도, 속 깊은 손녀를 통해서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김종분씨의 손녀인 수영 국가대표 정유인 선수는 이모를 기억하기 위해 할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관객은 영화의 마지막 즈음 하루를 단단하고 옹골차게 마무리하고 귀가하는 김종분씨의 뒷모습과 딸의 무덤가에서 홀로 오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 인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이렇게나 깊고 넓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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