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걸(오른쪽), 미류 활동가가 ‘평등길’ 여정 도중 지난해 11월1일 청주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쉬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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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평등한 영화 제작 문화를 만들기 위한 워크숍에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성별, 장애, 사회적 신분, 학력, 출신 지역, 결혼 여부 등으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떤 참가자가 자신의 경험상 아이를 낳고, 키워봐야 어른이 되는 것 같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의미인가는 여기서 논외로 하겠다. 일단 그의 논리 안에서 어른은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인간이었다.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혹은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사람은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인간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곧바로 그의 의견에 반박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아 있다. 아마 그 참가자는 자신의 발언이 누군가에게는 차별적일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저런 언설이 워낙 많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평등길 1110>의 출연자 김명임씨가 “차별은 어느 한순간 작정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못 느끼고 지나가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한 것처럼.
<평등길 1110>(2021)은 6명의 감독(김정근, 장은우, 김설해, 정종민, 장민경, 김일란)이 함께한 4편의 옴니버스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다. 2021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청원이 10만명의 동의를 획득했음에도 국회가 관련 법안 심사기한을 11월10일로 연기하자, 미류와 종걸 두 활동가는 연내 제정을 촉구하며 도보행진에 나선다. 부산에서 국회까지 평등을 촉구하는 이 길에 함께한 카메라는 부산, 대구, 청주, 안산 지역에서 행진에 참여하고, 지지하는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았다. 영화는 그 기간 중에 함께 연대하러 오는 사람들의 얼굴들, 그들이 일궈내는 연대의 장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집중해서 보여준다. 도보 행진 중 대구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은 특히 인상적이다. 이슬람 사원 증축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무슬림 학생에 대한 무차별적인 혐오 발언에 대응하여 장애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연대 발언을 한다. 이 회견에서 성소수자 활동가는 평등권은 각 집단 간에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확장될수록 더 보장되는 권리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비정규직이어도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현석씨는 ‘성소수자라고 커밍아웃해도 해고되지 않을 권리’를, 아이잔씨는 ‘외국인 노동자도 병원 진료를 동등하게 받을 권리’를, 박명애씨는 ‘장애인이어도 식당에서 밥 먹을 권리’, 진효정씨는 ‘한부모 가정이라고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출연자들이 원하는 권리는 특권이 아닌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기본권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제목으로 ‘1110’을 넣었을 만큼 간절했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가 2024년까지 법안 심사를 연기해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력 대선 후보조차 인권의 영역을 제로섬 게임처럼 생각하고 이주민 혐오를 서슴없이 드러내는 상황은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현실은 혐오 발언을 제지할 수 있는 법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누구도 차별받지 않을 수 있을 때, 우리 모두가 안전해진다.
강유가람 영화감독 _ <모래>(2011)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쓴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