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고 김순악 할머니. 인디플러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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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셀 수 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렸던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순악 할머니로 알려져 있는 이. 그는 1928년 음력 4월,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나 2010년에 여든 두 해의 곡절 많은 삶을 마감했다.
그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했다. 원래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김순옥이었지만,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하러 갔을 때 면서기가 ‘옥’(玉) 자를 못 쓰게 했다. “양반집 딸한테나 쓰는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옥이는 ‘순악(岳)이’가 되었다. 열여섯 되던 해, 동네 아저씨를 따라 대구의 실 뽑는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일제의 ‘처녀공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공장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위한 인신매매소였다. 취업 사기에 속아 결국 ‘처녀공출’을 당하고 만 것이다.
경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하얼빈으로, 치치하얼로, 북경으로, 장자커우로. 까마득히 먼 길을 끌려 다녔다.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로 이름이 네 번 바뀌는 사이 전쟁이 끝났다. ‘해방된 조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표현 그대로 말하자면, “이미 베린 몸뚱아리”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김순악님은 유곽에서 기생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미군 기지촌에서 ‘색시장사’를 하는 ‘마마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공식 석상에서 이 시절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전 생애를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특히 귀향 후 성 산업에 종사했던 피해자들의 경우라면, 한국 사회가 그 사연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동안 가지고 있었던 질문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대중문화는 위안부 여성의 모습을 ‘순수한 피해자-소녀’ 아니면 ‘세계 평화운동을 이끌어온 노년의 활동가-할머니’ 두 개의 모습으로만 그려왔다. 그러면서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중장년의 시간들은 대중서사에서 싹 지워진다. 소녀가 어떻게 할머니가 되었는지, 그 시간 동안 한국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지, 한국 사회는 궁금해하지 않았고, 대중문화는 상상하려 하지 않았다. 이 비통의 시간들은 <아이 캔 스피크>(2017) 속 나옥분(나문희)이 어머니 산소 앞에서 읊조리는 하소연처럼, 할머니가 된 그들의 회한 속에서나 그림자처럼 부유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20∼50대를 상상하는 일이 늘 금기시되었던 건 아니다. 1970년대와 80년대까지 일본군 위안소와 관련된 서사와 이미지가 소설과 영화 등에서 자극적으로 그려진 경우가 있었고, 김학순님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1992년, 화제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주인공 윤여옥(채시라)은 ‘성애화된 성인 여성’으로 등장했었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을들의 당나귀 귀2>(후마니타스, 근간)에서 국문학자 허윤은 대중문화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형상이 소녀-할머니의 이분법으로 고착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4년에 나왔던 모바일 화보였다고 짚는다. 한 유명 배우가 위안부 콘셉트로 모바일 화보를 찍으면서 크게 비판받았다. 그간의 한국 위안부 운동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의도하지 못했던 효과도 만들어졌다. 피해자들의 특정 생애주기가 대중문화의 상상력 속에서 봉인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도 온당하지 않지만, 한국의 가부장제에 대한 내적 성찰을 어렵게 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정치적인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가부장제가 규정한 ‘피해자다움’을 벗어난 삶은 지워졌다. ‘조국’으로 돌아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생존자들 중 일부는 김순악님처럼 기생이 되기도 했고, 기지촌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연을 공식적으로 풀어내면 “자발적 성매매” 운운하는 주장들에 근거를 대는 일이 될까 봐 숨겨야만 했다. ‘피해자다움’이 있다는 신화는 한국 위안부 운동의 족쇄가 되었고, 위안부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에게 또 다른 수치심을 강요했다. 이름에 ‘옥’ 자 하나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가난한 집 딸들이 일본군에게 팔려갔던 것에서부터 고초를 겪고 돌아와서도 편안한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한국 가부장제 사이의 끈끈하고도 질긴 공모가 있었다.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는 김순악님이 남긴 구술과 다양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그의 전 생애를 스크린 위에 되살려내고, 김순악님의 그 모든 이름들을 하나하나 ‘보드랍게’ 도닥인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대중담론과 외교정치의 장이 외면했던 시간들을 정면으로 마주하자고 요청한다.
박문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상이라는 건 딱 떨어지게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한국 사회는 우리가 지워버렸던 모습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인 만큼이나,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를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이다.
이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김순악님이 어떤 삶을 살았건, 그것이 피해사실을 전혀 왜곡하지 않는 풍부한 담론의 장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보드랍게>는 한국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위안부 대중서사의 역사를 바탕으로 용기 있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결국 김순악님이 남긴 유산 위에서,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세계를 한 뼘 확장시킬 수 있었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