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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는 사고로 중추신경이 손상되었다.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불편하고, 왼손도 거의 쓸 수 없는 상태다. 누가 봐도 중증 장애인이라 같은 병실을 사용하는 봉수는 “너는 그냥 1급”이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결과는 황당하게도 5급이다. 장애 판정 당시 몇 걸음을 겨우 걷고 통증 속에서도 팔을 들어 올렸던 것이 문제였다. 등급제에서 5급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장애인 콜택시나 활동보조 서비스는 물론이거니와 무료 지팡이 하나조차 지원받지 못한다. “5급이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절규하는 재기에게 누나 은주는 말한다.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나 방법은 없다.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 생계를 해결하고 싶지만 취직도 어렵다. 경증 장애인을 원하는 회사에선 재기의 실체적인 중증 장애가 문제가 되고, 1~3급의 중증 장애인을 채용하는 회사에선 5급이라는 서류상의 등급이 문제가 된다. 신체와 서류, 현실과 행정 사이에 끼인 재기의 삶은 끊임없이 표류한다. 이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정소송을 통해 등급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등급 영구 판정을 받은 재기가 행정소송에서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상황이 뭐 이렇게 극단적인가 싶겠지만 이는 정재익 감독 본인의 경험담이기도 하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재기는 좌절한다. 재기가 무리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장애인 인권 단체에서 전동휠체어를 지원받은 날, 재기는 은주의 일터 앞으로 찾아가 집까지 바래다준다. 휠체어를 밀어야 하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함께 천천히 걷는 행위. 이는 늘 자신을 돌봐주었던 누나에게 그가 베풀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절이기도 했을 것이다. 재기가 원했던 건 어쩌면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의 복지 시스템은 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해줄 만큼 해줬다’고 뻐긴다.
반복되는 부당한 상황에서 폭발하고 마는 재기 앞에 병호가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휠체어 사용자인 그는 곤란한 상황에 빠진 재기를 다독이며 접근해 온다. 재기에게 ‘장콜’(장애인 콜택시)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장애인 커뮤니티를 소개해준다. 무엇보다 행정소송을 진행할 수 있도록 변호사와 연결해주면서 대출받는 법도 알려준다. 시스템은 후천적 장애인인 재기를 무지의 암흑 속에 내버려두었지만, 병호는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며 재기를 길들인다. 재기는 병호를 따르게 되고, 그렇게 의지할수록 점점 더 병호에게 휘둘린다. 병호는 머리 좋고 눈치 빠른 사람이다. 그는 장애인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주위 사람들을 조종하고 이익을 편취한다. 병호의 실체를 알게 된 재기는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다.
<복지식당>의 이야기 진행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는 평가도 있다. 장애인 제도와 휠체어 사용자의 삶에 무지한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서사를 구성하는 장면 장면이 알지 못했던 디테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히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제이티비시>(JTBC)에서 진행했던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의 토론을 떠올렸다. 방송사는 호기롭게 생방송을 기획했지만 토론 무대는 휠체어가 안전하게 움직일 수 없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두 토론자의 눈높이조차 맞지 않았다.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테이블은 토론 시간 내내 박경석 대표 앞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었다.
토론을 준비하면서 제작진도 나름대로 ‘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컨대 무대에 오르는 경사로를 준비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판단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경험하지 못했다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토론회는 왜 장애인 당사자의 관점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지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조언을 구할 생각을 했다면, 아니 제작진에 휠체어 사용자가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대를 만들어 왔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시청자인 나조차 모욕을 느끼는 그 자리에 박경석 대표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나섰다. 위대한 용기였다.
물론 그 용기는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토론회 다음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전국 곳곳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함께 토론회를 보는 사진 수십 장이 올라왔다. 박경석의 용기는 그들과 함께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제이티비시>는 이 방송에 수어통역도 자막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은 방송을 켰어도 토론의 내용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청각손상이 반드시 청각장애로 이어지진 않는다. 수어 등 다른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제이티비시>가 청각손상을 청각장애로 만들어버렸다) 무책임하게 열려 있는 유튜브 실시간 채팅창에서 보고 듣고 두드리는 온라인 트롤들이 마음껏 혐오발언을 쏟아내며 설치고 있을 때, 어떤 당사자들은 토론 내용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안단 말인가.
영화는 생각지 못했던 디테일을 품고서 러닝타임 내내 삐걱거린다. 장면 하나하나가 울퉁불퉁하다. 온갖 턱으로 만들어져 있는 세계를 살아내야 하는 휠체어 사용자의 일상생활 자체가 매끈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면은 종종 기둥이나 벽, 문틀과 같은 다양한 선들로 분할되어 재기와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고, 재기가 활용할 수 있는 온스크린의 공간을 제한한다. 부당한 구조 속의 재기가 그 안에서 덜그럭덜그럭 자신으로 살기 위해 애를 쓴다.
2019년 7월, 장애등급제는 완화되고 활동지원 서비스는 확대되었다. 그러나 예산 증축 없는 지원 확대는 또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영화가 해피엔딩을 쉬이 얘기할 수 없는 이유다. 영화의 끝, 재기는 여전히 접근할 수 없는 좁고, 어둡고, 높은 계단 앞에 앉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단 끝엔 재기의 집이 있다. 계단을 오를 수 없으므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그곳이 바로 한국 사회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