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필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 <놉>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예술이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영화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영화.
17일 개봉한 조던 필 감독의 신작 <놉>은 어떤 영화인지, 혹은 어떤 장르의 영화인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한 영화다. 언뜻 보기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의 공격에 맞서 목장을 운영하는 카우보이 남매가 사투를 벌이는 에스에프(SF) 호러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이후에도 질문은 계속된다. 그 장면은 대체 왜 등장했던 거지?
헤이우드 목장을 운영하는 오티스(케이스 데이비드)와 그의 아들 오제이(대니얼 컬루야), 딸 에메랄드(케케 파머)는 말을 키우며 영화 촬영 현장에 출연시키는 훈련사 일도 병행하고 있다. 활달하고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동생 에메랄드와 매사에 쓸데없이 진지해 보이는 오제이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위성 지도에도 제대로 표기되지 않을 정도로 외진 목장에서 살아가는 이들 가족은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재난 상황에 맞닥뜨린다. 문제는 누구도 이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도움도 주지 못하기에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평소 동물과 탁월한 소통 감각을 지닌 오제이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 분투한다.
조던 필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 <놉>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예술이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영화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놉>은 익숙한 공포 영화의 플롯을 지니고 있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수준의 장면들이 쏟아지듯 등장한다.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없는 동시에 지나간 장면이 대체 어떤 의도와 의미를 갖는 장면인지 알 수도 없다.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영화의 전개와 설정은 관객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뒤죽박죽 배치되어 있다.
조던 필 감독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흑인 감독 중 한명이다. 배우이자 코미디언이었던 그는 연출 데뷔작 <겟 아웃>(2017)으로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 역사상 각본상을 수상한 첫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두번째 연출작 <어스>(2019)도 호평받으며 ‘소포모어 징크스’(첫 작품 성공 후 부진한 경우를 이르는 말)를 깼다. 세번째 연출작 <놉>은 앞서 만든 두편보다 영화적 상상력의 규모를 업그레이드했다.
조던 필 감독은 <놉>을 공포 영화로는 최초로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그가 만들어내는 공포 영화의 미장센 안에는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과 폭력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 특히 흑인의 시선에서 인종차별 이슈를 주요 소재로 활용해 공포 영화에 녹여낸다. 갑자기 사라지는 흑인의 공포를 다룬 <겟 아웃>, 정체 모를 복제 흑인들의 습격을 다룬 <어스>는 미국에서 흑인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영화다. 이번 영화 <놉>은 흑인 이슈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공포, 미지의 존재에 의한 인류의 위기를 다루는 듯 보인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놉>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공포 영화로는 최초로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점이다.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연출 의도다. 그 이미지의 힘은 <놉>을 보는 관객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가? 거대하고 파괴적인 것은 아름다운 것인지, 아니면 그렇기에 더욱 폭력적인 것인지를 묻게 한다.
또한 <놉>은 영화라는 예술매체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주인공 남매의 성은 할리우드(Hollywood)와 유사한 헤이우드(Haywod)이며, 영화 내내 인류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움직이는 이미지의 주인공은 말을 타고 달리는 흑인의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소문난 앤틀러스(마이클 윈콧)라는 인물이 등장해 오제이와 에메랄드 남매의 사투를 돕는 장면에서도 영화예술에 찬사를 보내는 감독의 속내가 읽힌다.
조던 필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 <놉>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예술이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영화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지금까지 언급한 연출 의도 외에 <놉>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도 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과연 지구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주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놉>의 스펙터클한 영화적 박력은 자연이라는 스펙터클한 힘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역설적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것일지 모른다.
조던 필 감독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에스에프 영화 <미지와의 조우> <이티>(E.T.) 등에서 영감을 받아 <놉>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 밖에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과 설정도 등장한다. 그가 이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혼란을 겪고 있는 팬데믹 상황이다. <놉>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예술이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영화다.
김현수 전 <씨네21> 기자·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