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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미미즈’가 꿈틀대는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

등록 2023-03-11 09:00수정 2023-03-11 10:16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스즈메의 문단속
쇼박스 제공
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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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신카이 마코토는 1년에 걸쳐 1인 수작업으로 틈틈이 제작한 5분짜리 애니메이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발표한다.

‘그녀’는 비 오는 날 길에서 고양이를 줍는다. 그가 주인공 ‘그녀의 고양이’ 쵸비다. 쵸비는 “진짜 어른”인 그녀를 지극히 사랑한다. 어느 날, 기나긴 통화 끝에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쵸비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지만 작고 하얀 고양이에게 수화기 너머는 이해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장소다. 이 사랑스러운 소품은 내내 쵸비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목소리는 신카이 본인이 직접 연기했다.

이후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언어의 정원> 등 그의 작품을 따라오면서, 나는 종종 주인공 소년의 모습에서 몸을 웅크린 쵸비의 그림자를 만나곤 했다. 신카이의 작품에는 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쓸쓸한 동경과 부드러운 열망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사랑하는 여자건, 이룰 수 없는 성장이건, 도달할 수 없는 메시지건, 신카이의 소년들은 여전히 ‘작은 방’에 갇혀 혼자 웅얼거렸다. ‘수화기 너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라고.

구조의 열망 품고 ‘작은 방’에서 나와

이건 한편으로 199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을 지배해온 ‘세카이계’(世界系) 세계관의 특징이기도 하다. 급진적 사회변혁 운동이 실패하고 그에 이어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찬란한 버블 경제마저 붕괴된 이후, 더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비관과 불안이 대중문화로 스며들었다.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징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세카이계’는 온라인에서 만들어져 문화비평 언어로 자리 잡은 개념인 만큼 그 정의도 규정도 모호하지만, 대체로 내면의 불안에 집중하는 소년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녀가 원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나 재난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로 범주화할 수 있었고, 이 세계관 없이 세기말 이후 일본 대중문화를 말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성장의 조건을 박탈당한 채로 성년기로 억지로 떠밀려가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매혹적인 만큼이나 퇴행적이었다. 그들의 ‘세계라는 경계’ 안에는 온통 ‘나’ 혹은 ‘너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소년-감독이 혼돈의 원인을 포착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문제와 대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가 작품 안에서 3·11 동일본 대지진과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이후였다. ‘수화기 너머’를 고민하기에는 눈앞에 떨어진 재난이 너무 큰 상실과 고통을 안겼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신카이는 운석 충돌, 홍수, 지진이라는 재난의 스펙터클을 반복함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결말을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감독은 이 작품들을 묶어 “재난 3부작”이라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구원 3부작’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재난은 우주 전쟁이나 불안한 미래, 이지메 같은 형태로 언제나 그의 작품과 함께했다. 순응이 아닌 구조(救助)의 열망을 끝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3·11 이후 신카이의 세계에 등장한 새로운 이야기다. 그렇게 움직여온 감독은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러 작은 방에서 나와 ‘세계라는 경계’를 확장시키고, 재난의 복잡한 조건을 구체화시켰다.

자연재해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부터 비롯되어 우리가 충분히 대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닥쳐온다. 그리고 현대화된 세계에서 이 재해는 많은 경우 문명과 만나 인재가 되면서 더 커지고 더 강력해진다. 무엇보다 3·11 동일본 대지진이 그랬다. 시작은 지진과 해일이었지만, 더 큰 재난은 원전이 폭발하면서부터였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현대 사회 재난의 속성을 신화적인 상상력 안에서 풀어낸다.

이 작품에서 지진은 불가해한 이유와 욕망으로 움직이는 존재 ‘미미즈’가 일으키는 일이다. 미미즈는 때때로 흥분해서 날뛰고 그를 다스리는 이들에 의해 저지되었다가 또 부흥하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미미즈가 봉인되어 있던 ‘저 세계’로부터 ‘이 세계’로 뛰쳐나와 기어코 땅을 흔들어 만물을 해치는 것은 인간들이 모여 살다 버리고 떠난 폐허에 남겨진 낡은 문들을 통해서다.

미미즈가 일단 문을 통과해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지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란 그 문을 닫아 열쇠로 잠그는 것뿐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소타(마쓰무라 호쿠토)와 스즈메(하라 나노카)다. 미미즈가 열어젖힌 ‘저 세계의 뒷문’을 닫은 뒤 과거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기도를 하면 반짝이는 열쇠 구멍이 만들어진다. 그 구멍에 열쇠를 꽂아 잠그면 ‘문단속’이 끝나는 것이다.

버려진 문을 통과하는 미미즈는 인간적인 것과 인간 외적인 것, 문명과 문명 외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등장하는 재난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카이는 그렇게 열린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말한다.

‘우리’를 다시 상상하는 일

쵸비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드디어 성장해서 책임을 다하는 어른 소타가 되었을까? 아니면 생의 덧없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타인을 위할 수 있는 스즈메가 되었을까. 나는 다양한 소년의 형상으로 변주되었던 쵸비가 이 작품에 이르러 다시 고양이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고양이 ‘다이진’에게서 쵸비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이진은 미미즈를 봉인하는 요석(要石·かなめいし)이다. 스즈메 덕분에 꽁꽁 얼어붙은 돌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은 다이진은 요석의 임무를 버리고 스즈메의 ‘아이’가 되고 싶었다. 작품에서 벌어지는 모든 모험이 그런 다이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소타만을 바라보는 스즈메의 진심을 알게 된 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접는다. 징징거리기를 멈추고 내 앞에 타인을 놓는 다이진의 마지막 선택은 가슴 아프고, 또 놀랍다.

최근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모브사이코100> 등 소년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미 충분히 망가진 세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대의라는 명분으로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 선동과 ‘우리’를 다시 상상함으로써 연립하려는 노력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 한 장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3·11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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