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백 투 헬이다, 씨×.”
‘쏭남’ 송나미(오우리)가 ‘황구라’ 황선우(방효린)에게 무언가 벅찬 표정으로 말한다. 선우는 웃으며 답한다. “오키 오키.” 두 사람은 며칠간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온 참이다. 그리고 그 집이 여전히 지옥-헬이라는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떠날 때와 달리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함께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간을 돌려 며칠 전, 다른 학생들은 모두 수학여행을 떠난 오후. 학폭 피해자인 나미와 선우는 수안보의 버려진 낡은 목욕탕에 앉아 죽을 궁리 중이다. “어차피 망했고, 앞으로도 망할” 인생에 미련 따위는 없다. 나미가 목을 매려는 순간, 그의 유서를 읽던 선우가 말한다. “너 박채린 소식 몰라? 걔 서울 가서 완전 잘 지내던데? 걔는 너 죽어도 상관없이 쭉 잘 살걸?”
순간 나미의 머릿속에는 이렇게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집이 쫄딱 망해서 야반도주한 줄로만 알았던 가해자 박채린이 잘 먹고 잘 산다니? 어차피 죽을 거 내 인생의 ‘헬게이트’를 연 박채린(정이주) 인생에 “기스라도 내고 죽자”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둘은 자살 시도를 멈추고 채린을 찾아 서울행 버스에 올라탄다.
채린의 인스타에 올라온 사진을 바탕으로 서울을 뒤진 두 사람은 종로의 오래된 건물에 위치한 한 교회에서 그와 마주친다. 동급생들 위에 ‘여왕벌’처럼 군림하던 채린이 계단 위에서 등장하는 순간, 선우와 나미의 몸은 반사적으로 위축된다. 그들을 발견한 채린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속이 울렁거리고 손이 벌벌 떨린다.
하지만 평소처럼 경멸할 줄 알았던 채린은 예상과 달리 감동한 듯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반가워하며 말한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거야.” 그리고 “너희들 나 벌주려고 온 거지? 나를 때려”라며 무릎을 꿇는다.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 순간, 채린은 필요한 ‘점수’를 얻고 “목사님이 말씀하신 낙원”으로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복수가 너의 구원”이 되어버린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 앞에서 나미와 선우는 당황한다.
‘지옥만세’는 피해자가 용서하기도 전에 가해자가 종교에 귀의해 ‘셀프 용서’를 한 이후의 시간을 따라간다. 가해자는 홀로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피해자의 삶과 마음에 남은 상처는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될 정도로 혹독하다. 애초에 폭력이란 그런 것이다. 타인을 해치는 행위를 통해 가해자가 얻는 것은, 그것이 권력이나 쾌락, 혹은 다른 무엇이 됐든 찰나와도 같이 머물렀다 흘러가 버린다. 채린이 자신의 불안을 폭력으로 가리려 했지만 그 차폐막이 오래가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폭력의 효과를 유지하려면 또 다른 폭력이 필요하다. 그에 반해 피해자의 고통은 깊게 뿌리내려 길게 지속되고, 점점 자라난다.
그러므로 가해자 쪽에서 서둘러 내놓는 사과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 없는 사과조차 듣기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사죄의 말 자체에 크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지만, 실제로 사과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고통이 야기된 구조와 맥락을 뒤집어엎으려는 집요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변화의 조건이 만들어지고, 피해자의 구체적인 일상이 그 조건 위에 놓일 때에야 비로소 사과는 형식적인 말의 공허함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채린은 그런 정성과 노력을 들일 생각이 없다. 그가 나미에게만 거듭 사과하는 이유다. 나미의 약한 마음을 조종해 이 지옥에서 벗어날 낙원행 티켓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용서 점수’만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채린은 선우에게까지 자신이 변했다는 걸 증명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선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선우는 끊임없이 따돌림을 당하면서 주변적 위치로 내몰렸던 경험 속에서 폭력의 시스템을 파악하는 것에 훈련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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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선우는 낙원행 티켓을 놓고 채린과 점수 경쟁 중인 혜진(이은솔)이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간파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본다. 선우는 채린에게 넘어가버린 나미에게 말한다. “나 뭔가 깨달은 거 같애. 여기에도 나 같은 애가 있어. 아무도 혜진이 말을 안 들어줘. 박채린은 아직도 여왕벌이야.” 그렇게 채린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 있었다. 여기서도 구원이 없다는 걸 깨달은 두 사람은 교회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지옥만세’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탐구했던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성큼 떨어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제 이 땅에서 신은 사이비로만 존재할 뿐이고, 신이 부재한 세상은 온통 폐허다. 나미와 선우가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수안보의 폐목욕탕도, 채린과 혜진이 부모의 배신과 학대로부터 벗어나 낙원을 구하려 했던 종로의 오래된 건물도, 이미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잃어버린 버려진 장소들이다.
선우와 나미는 둘만의 수학여행을 통해 “구하면 얻으리라”는 거짓된 신화를 불태우고 지옥을 살기로 선택한다. 두 사람이 웃으며 “웰컴 백 투 헬”(지옥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오래된 희곡의 대사처럼 “지옥은 바로 타인”(사르트르, ‘닫힌 방’)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옥만세’에서 타인의 의미는 다르게 쓰인다. 그건 상처 입고 버려진 나와 다르고도 닮은 너다.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즐거워지는 너, 조금은 덜 죽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너, 헬조선에서도 웃을 수 있게 해주는 너, 그리하여 이 망가진 세상에서 비로소 나를 구원할, 불꽃 앞의 너, 나의 지옥.
임오정 감독은 ‘지옥만세’가 “성스럽고 상스러운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런 세상에서 지옥찬양이라니 자못 성스럽고, 그럼에도 ‘함께 웃을 너’를 말한다니, 꽤 상스럽다. 역시 우리를 구원하는 건 이 소녀다운 상스러움이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